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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평화,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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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높은뜻 숭의교회) 
   
  복된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가정과 가족 그리고 경영하시고 바라시는 모든 일 들 위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잠언 17장 1절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겨우 겨우 먹으며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 아마 가장 비참한 일 중에 하나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다투고 싸우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화와 갈등은 가난보다 더 나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난 한 해 그 어떤 해 보다도 불안하고 불행한 한 해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일년 내내 들은 뉴스가 국외는 이라크 전쟁의 소식이었고 국내는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과 다툼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참으로 우울하고 살 맛 안 나는 한 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도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가 사람들과 불화하고 다투며 싸울 때입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냉전을 벌일 때, 부모와 자식 간에 원수처럼 싸우고 직장의 동료와 사이가 나빠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받으며 매일 아침 돌덩이처럼 무거운 부담을 안고 출근을 할 때 참 삶은 고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정말 삶은 지옥과 같습니다. 저에게도 그와 같은 삶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을 해 보아도 정말 끔찍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고, 헤어 나올 수 없었던 구렁텅이와 같은 삶이 저에게도 분명 있었는데, 어느 새 거기서 빠져 나와 참으로 행복하고 만족한 축복의 삶의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참 놀랍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더 정확히 그리고 더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죽지 못해서, 죽을 수가 없어서, 저는 그것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꺼져가는 촛불 같은 작은 믿음으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꺼져가는 촛불 같은 믿음에도 역사하시어 저를 구원해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편 62편의 말씀을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 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 하리로다. 넘 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 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 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 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아 멘. (시 62:1-8)

지금 저는 그런 면에서 최고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혼 한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내와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틀림없이 그리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들 부부는 신혼 때 보다 지금이 몇 배나 더 행복합니다. 자식과의 관계도 참으로 감사하게도 좋습니다. 지난 주말에도 아들 며느리 모두와 함께 극장엘 갔었고, 어제는 아들 부부와 밖에 나가서 칼국수도 함께 먹고 밤늦게 까지 카드 게임을 하였습니다. 교회 생활도 저로서는 최고입니다. 이제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연말연시를 이렇게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고 하리만큼 좋습니다. 저는 요즘이 참 행복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 행복의 주체는 평화입니다. 화목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도 화목한 것이 좋은데, 저는 모든 면에서 육선(肉饍)도 가득하고 화목도 최고 상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와 같은 화목과 평화의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기독교 방송국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진행자가 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 중에 하나인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속에 있는 ‘원죄’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좀 엉뚱한 대답처럼 느꼈을는지 모르나 저는 그것이 정확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우리 속에 있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한 절대로 갈등과 분열의 문제는 해결 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이 바뀌고 달라져야만 갈등과 분열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갈등과 분열의 원인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 속에 있는 원죄 때문입니다.

저는 원죄를 마음속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불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단절되고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그와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세상과의 관계도 나빠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기 전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았을 때 아담과 하와의 관계와 사이는 최고였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한 말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습니다. 너는 너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도 가장 소중한 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아담이 하와에 대하여 한 말은 ‘저 여자’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후 아담에게 하와는 더 이상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1장에서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거역하기 이전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쓰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을 하게 된 후 저들은 분열하였습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지 않아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 교인들이 열심히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창세기 11장 때 흩어졌던 언어가 방언을 통하여 회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누구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로 유무상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저들은 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사는 사람들을 보니 천국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치루어야만 예수를 믿을 수 있었지만 저들은 그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예수를 믿으려 하였습니다.

저는 시편 128편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 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 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 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아멘.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하는 일이 형통해지고, 부부관계와 부자관계가 좋아질 것이라는 것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사탄은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 살려면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면 된다고 가르치고 유혹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나빠지면 세상과도 점점 나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는 더 말할 것이 없이 나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모든 관계와 사이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돼지와 함께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는 탕자와 같은 우리들은 더 이상 기다리지만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우리들의 구원과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으로 찾아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하실 곳이 없으셔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그런 것이라며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완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이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예수님은 아마 왕궁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동방박사들의 귀한 예물을 사양하지 않으시고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노동자의 일 년 임금에 해당하는 옥합의 향유를 발에 쏟아 붓는 마리아의 마음을 사양하지 않으시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칭찬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야만 직성이 풀리는 삐뚤어진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색함과 완악함을 하나님과 상대방의 겸손과 훌륭함으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을 소홀히 여기며 함부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상과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나쁘면 세상과 사람들과의 사이와 관계도 나쁩니다. 우리의 구원과 축복은 하나님과의 사이와 관계가 결정합니다.

올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는 인색하고 완악한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위하여 옥합을 깨고 향유를 쏟아 붓던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축하하기 위하여 먼 동방에서부터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경배하였었던 동방박사들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아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적당히, 대충대충, 인색하게 그리고 게으르게 살았던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오늘부터 한번 마음을 다져 잡고 하나님께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집중하는 삶을 살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직장과 사업과 가정과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넘치는 평화의 축복을 누리며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며 간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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