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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기도 (1)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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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부터는 주기도문의 내용을 하나씩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쉽게 기도하는 이 주기도문은 우리들 대부분이 다 암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간결한 기도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결하다고 해서 간단한 내용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히려 그 내용은 심오하고 깊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그 사람의 신앙만큼 그 깊이가 다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신앙의 깊이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깊이 있는 기도이고, 초보적인 신앙의 소유자에게는 그만큼 초보적인 기도에 머무른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먼저 교회사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사용에 관한 모습을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안디옥 출신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대주교를 역임한 바 있는 크리소스토모스(Johannes Chrysostomus, 354-407) - 우리에게는 쉽게 크리소스톰이라고 알려진 사람인데 - 이분은 예배 시간에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주님! 우리를 용납하옵소서. 우리가 기쁘고 담대하게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이 주기도를 암송하는 것을 받아 주옵소서.” 또한 로마 교회의 예배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감히 이 기도를 드립니다(audemus dicere). 주기도를 암송하나이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교부(Church Father)였던 터툴리안(Tertullianus)은 주기도문을 표현하기를 “전체 복음의 요약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하게 표현된 기도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주기도문이 중요하고 귀중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하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주님의 기도를 가능하면 깊이 있게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의 기도의 영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에서 가장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의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짧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은 이 주기도문의 시작의 말입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에는 더 짧게 “아버지여,”라고만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누가복음의 “아버지여,”의 말씀을 초대교회에서 예배 때에 사용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의미를 살리면서도 격식을 갖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 것을 마태는 따른 듯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초대교회의 전통을 살린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주기도문을 공중 예배나 개인기도 시간에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주기도문을 시작하면서 기도의 대상을 부르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에는 “하늘에 계신”이란 표현과 “우리”라는 표현 그리고 “아버지여,”라는 표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이 세 가지 표현을 따로따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과 공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여,”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1. “아버지여,”

주기도문에 나타난 이 “아버지여,” 라는 말씀을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는 편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교리적 사실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인 결과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색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입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종교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일반 세속 종교에서도 자기들의 신(神)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들의 신(神)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자기들의 신(神)에 대한 특별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아버지”라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의 신이 절대자로서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거나 또는 자기들의 신에 대한 가부장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쓰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오히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경우가 14번 정도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경우도 다른 종교에서의 쓰임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주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분으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예언자들을 통해 이 아버지란 표현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 말라기 1:6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제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인데 내가 너희 아버지라고 해서 너희가 나를 공경하기라도 하였느냐? 내가 너희 주인이라고 해서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기라도 하였느냐?” 이렇게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경우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인격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종교들처럼 하나님의 절대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경우는 다른 종교들처럼 가부장적인 즉, 남성적인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아버지로 즉 남성으로 표현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 63:16에 “주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에는 모성애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사 49:15,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고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이렇게 구약에서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에는 모성애적인 모습도 담겨 있는 것을 보면 가부장적인 권위로 표현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표현은 이러한 구약에 나타난 표현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라고 표현된 말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바’(Abba)라는 아람어를 헬라어로 바꾼 단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아바’라는 말은 우리말의 “아빠”와 같은 뉴앙스를 갖게 하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친근감을 갖게 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아스(Jeremias)라는 신약성서 학자는 “이 ‘아바’라는 칭호 속에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Jeremias는 “이 ‘아바’라는 칭호는 여기에 비길만한 어떤 다른 유사한 표현이 없으며, 예수는 이 ‘아바’ 칭호를 가지고 하나님을 설명하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어느 신학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있다”고 까지 말합니다. 그만큼 이러한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표현한 사실은 유대인들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사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 “아버지여,”라는 표현에 담겨진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여,”라는 표현에 나타난 “~여”라는 단어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이 “여”는 호격조사입니다. 누군가를 부를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주기도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주격, 소유격, 목적격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반드시 호격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격으로 인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을 주격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격으로 인식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을 소유격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하나님을 목적격으로 인식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혹은 “모든 일을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을 목적격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는 이 모든 주격, 소유격, 목적격보다 먼저 호격으로 하나님을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정당하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렇게 “아버지여,”라고 불리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의미인 것입니다.

2. “하늘에 계신”

이 “하늘에 계신”이란 표현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유대인들과는 다른 문화와 전통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이 말을 “하나님은 우리 인간 세상에서 초월한 곳에 계신 분”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우리로서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얽매이지 아니하는 그런 분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에 계신”이란 표현은 인간을 넘어서 계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처음 사용했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늘에 좌정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일이 아니랍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이미 시온과 그의 성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심 산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요 4장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수가 성에 살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유대인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의미는 이렇게 사람이 정해 놓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 머무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온 우주적인 성격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는 깊은 연관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3. “우리 (아버지)”

마지막으로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는 “우리”라는 표현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기도를 순전히 자기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용도로 사용하고자 하는 생각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는 우리 각 사람이 행하는 아주 개인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각자가 하는 개인적인 행위로서의 기도이지만 이 기도의 정신은 “나”가 아니라, “우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바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바른 자세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스운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가 운동경기를 한다고 합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나라가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곤란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만일 운동경기가 아니고 전쟁을 치르는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우리가 물질을 구한다든지, 나의 소원이나 바라는 것을 구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경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기도를 우리도 알게 모르게 많이 하고 있지나 않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있어서 인간관계의 정신은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우리”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웃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따지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기도하지만, 실제로는 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기도를 안 하는지도 모릅니다.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단지 입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른다고 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우리의 입술로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는 사실이 과연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우리 입술로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른다는 사실이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일방적인 것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목소리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내가 부를 때마다 “네!”라고 달려오는 종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TV 영화 "내 사랑 지니“에 나오는 심부름꾼 천사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른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뭘까요? 제가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화장실 갈 때, “똑 똑”하고 knock를 합니다. 그리고 안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사람이 없구나” 하고 들어가 사용합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똑똑 두드리고 나서, 응답도 안 기다리고 문 열고 들어간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기도문을 할 때, “하늘에계신우리아버지여이름이거룩히여김을받으시오며나라이임하옵시며....”하고 술술술술 그냥 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바로 화장실에서 노크를 하자마자 문 여는 경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른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부를 때,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냐?”라고 응답하시도록 우리는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기다림”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침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설교의 본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나서 잠시 쉬라고 표시한 쉼표까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서명할 때, 싸인 대신에 도장을 많이 씁니다. 이 도장은 둥그런 모양인데 어디가 윗부분인가를 알려 주는 표시가 있습니다. 대개 조그만 점으로 표시하여 알아보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도장, 특히 중요한 사람의 도장은 이러한 표시가 없다고 합니다. 왜 없냐고 하면, 도장을 찍을 일이 있을 때, 바로 찍기 위해서 이리저리 살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가 위라고 하는 표시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찾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문서가 과연 도장을 찍을 문서인가?”라고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그 표시를 안 해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부른다고 그냥 달려오는 하나님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신, 사랑이 많으신, 영광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등등의 형용사를 많이 붙인다고 해서 무조건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소박하게 부를지라도 부른 후에 응답하심이 있기까지 기다릴 수 있는 그 기다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기간은 길건 짧건 침묵의 기간입니다. 이 침묵, 이 고요함 가운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무슨 말씀을 드릴까? 하고 다시 한번 우리의 기도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은연중 강조합니다. “너희는 잠잠하라. 잠잠히 있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보라”고 우리의 기다림을 요구합니다.

오늘은 대강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기다림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일들을 시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오셔야만 그리고 하나님 당신이 응답해 주셔야만 나는 의미가 있고, 내 행위와 내 기도가 바르게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여기는 가장 겸손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은 기도와 관련하여 이러한 기다림의 의미를 되내겨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릴 줄 알았던 것은 이들은 주님이 곧 오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바로 이러한 주님께서 곧 오시리라는 믿음을 굳건하게 지닌 사람일수록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다릴 줄 모르면서 주님의 재림을 강조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강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그동안의 기다림의 모습을 다시금 반성해 보면서 우리의 모든 생활에 있어 하나님께 그 우선권을 드릴 수 있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다 되도록 하십시다.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오늘은 우리가 기도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하던 이 말을 우리는 반성합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제는 그 뜻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나만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도 같이 부를 수 있는 마음을 지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되, 일방적으로 부르기만 하는 저희들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부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러한 저희를 인쳐 주시고 응답해 주실 때에야 우리의 존재가 확실해짐을 깨닫고 늘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와 심령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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