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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평화의 아기 예수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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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성탄절 아침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경배하는 여러분과 가정 위에 성탄의 축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성탄절!”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평화’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신 곳은 비록 누추하지만 평화로운 곳입니다. 요란함과 다툼이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 그리고 비록 후미지지만 아주 조용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 예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평화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 소식을 듣고 방문한 사람들은 양떼를 돌보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낮고 천한 계층이었지만 마음이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성경을 다시 읽어 보면서 그 광경을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로운 장면입니까? 한밤중에 목자들이 천사를 만나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습니다. 천사들이 노래가 사방에 울려 퍼집니다. 문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또 천사들이 찬송한 내용을 보면 어떤 내용입니까?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성탄절의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면 성탄절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절을 수십 번 지낸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에 관해 살펴보고 그 은혜를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부디 이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고 가정과 범사에, 더 나아가 온 세상에 참 평화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1] 가장 소중한 평화, 그러나 평화가 없는 세상

어떤 청년이 일생을 두고 꼭 갖고 싶은 것을 종이에 적어 보았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 이런 것들을 적어서 평소에 존경하는 선생님을 찾아뵙고 보여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다 좋은 소원들이군.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구먼. 그게 없으면 이 모든 것을 소유해도 소용이 없을 텐데 ... ” 청년은 깜짝 놀라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그게 뭔가요? 가르쳐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선생님은 종이에 적은 것들을 펜으로 죽 그어버리고는 그 밑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음의 평화! 그 청년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후일 마음의 평화라는 책을 저술해서 수백만부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청년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평화이기에 그 책이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정에, 사회에, 세계에 평화가 없습니다. 곳곳에 불화와 갈등, 불안과 근심, 다툼과 전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소원하는데 왜 그럴까? 한 마디로, 죄로 인해서 그렇습니다. 죄는 단절시키고 분리시킵니다. 사단이 죄를 갖고 벌이는 일 역시 분리시키는 일입니다. 평화는 본래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평화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유래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은 모르고 무엇을 많이 소유하면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것은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잠시 보면 가능한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많으면 평화가 이뤄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조용하던 집안에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면 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심한 경우 돈 때문에 법정에까지 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서부 아프리카에 감비아라는 나라가 있죠. 그곳에서 오래 사역하던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감비아와 옆에 있는 시에라리온 두 나라는 겉보기에 비슷합니다. 그런데 감비아는 평화로운 나라이고, 시에라리온은 내전이 끊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감비아는 너무 가난해서 평화롭다는 겁니다. 반면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가 나서 이권 때문에 늘 싸움이 있다는 겁니다. 돈이 좋을 때는 좋지만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이 있으면 평화로울까?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으로 억누르고 잠시 평화를 얻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위장 평화’입니다. 언제라도 깨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권력이 있으면 더 불안하고 평화롭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비근한 예로, 대통령은 최고의 권력자지만 늘 불안합니다. 대통령이 어딜 가면 경호원이 수십 명, 때로는 수백 명이 수행합니다. 왜 그래요? 폼 잡으려고 그러나요? 위험하고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권력이 없으니까 경호원 한 사람 없이도 활보합니다. 사명을 위해서라면 위험해도 권력을 추구해야 됩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권력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무엇을 많이 소유하면 평화로울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착각입니다. 잠시는 그런 것 같아요. 그러나 가만히 보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평화를 마치 휴화산 같은 ‘사이비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세상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평화는 없습니다.

[2]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 : 평화의 아기

그러므로 참 평화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그때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데 3장에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의 징표인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가 깨지고 맙니다. 심지어 인간과 피조물과 사이에 평화가 깨집니다.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그러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직 십자가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줍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이어줍니다. 엡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 더 나아가 만물과 인간 사이도 이어줍니다.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영국 사람이 그린 「개통」(開通)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한 통신병이 부대 간의 교신을 하는 전화선을 수리하러 갑니다. 적진에 총탄이 빗발치듯하는데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전화선이라 목숨을 걸고 뛰어갑니다. 드디어 끊어진 데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전선을 이어줄 아무런 기구도 없습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양쪽 전선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적의 탄환을 맞고 쓰러졌지만 두 손을 움켜쥔 채로 사력을 다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이겁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신 겁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 개통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개통된 사람들입니다.

[3] 평화를 누리고 나누는 사람들 : 그리스도인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눠주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책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여전히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화가 없고, 가정에도 평화가 없고 ...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평화를 나눠주지 못합니다.

① 평화를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십시오.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그 뜻대로 순종하면 마음에 평화가 입합니다. 자꾸 내 뜻대로 살려고 고집하고 욕심을 부리고 성질을 내면 평화가 깨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평화의 특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화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밀쳐내고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장 평화가 깨지고 맙니다.

여러분, 마음이 요동하고 평화가 없어질 때면 즉시 평화의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죄를 지고 돌아가신 그분의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화가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평화의 기도」로 유명한 프란체스코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우물에서 물 긷는 여인을 유심히 관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인이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뒤 나뭇조각을 물 위에 띄운 후 그 물통을 지고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물었습니다. “왜 물 위에 나뭇조각을 띄우고 갑니까? 무겁잖아요.” 그랬더니 여인이 대답합니다. “그냥 지고 가면 물통이 흔들릴 때마다 물이 출렁거리며 쏟아지죠. 그런데 나뭇조각을 얹어놓으면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에 물이 넘치지 않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 말을 들으면서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동요되고 출렁일 때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띄우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분노와 갈등이 일어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에 주님의 평화가 충만히 임할 줄로 믿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임하면 육신의 건강도 좋아지고 가정에도 평화가 임하고 범사에 형통함이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지난 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불화와 갈등이 있었습니까? 정파 간에, 계층 간에, 지역 간에, 세대 간에 얼마나 서로 으르렁댑니까?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면 평화롭고 발전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까 한 이유 때문입니다. 각자의 마음 속에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공격하는 겁니다. 평화를 마음에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질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② 평화를 나눠주는 평화의 사신이 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스스로 평화를 누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남에게 평화를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고후5:18~20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평화의 사신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여러분, 이 사명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는 작은 입술로 예수님의 평화를 전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어느 부인의 간증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생활이 넉넉했는데, 어쩌다가 간염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됐답니다. 잘못하면 간암이 된다는 진단까지 받았습니다. 남편은 사업가인데 세상적으로 얼마나 잘 나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만해졌는지 모르지만, 아픈 아내는 돌보지 않고 오히려 겉돌더니 바람을 피웁니다. 그 부인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아픈 것도 억울한데 남편이 그 모양이니. 게다가 아이들마저 공부는 안 하고 탈선합니다. 죽고 싶은 심정이면서 동시에 죽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인간의 본능이죠. 나중에는 불면증까지 생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아줌마가 전도를 합니다. 교회 가보자는 겁니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딱히 붙잡을 것도 없는 암담한 상황이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따라 나갔습니다. 예배 중에 마음이 열립니다. 한번 신앙 생활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새신자 공부를 하게 됐고,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인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평화가 임했습니다. 마치 밀물처럼 그 마음에 평화가 밀려들었습니다. 사죄의 확신이 생기고, 마음이 넓어졌습니다. 남편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그 전에는 잔소리하며 실랑이를 했는데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남편도 돌아오고, 아이들도 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삶이 펼쳐졌습니다. 결국에는 질병도 완치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 부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평화가 있었기에 인생의 거센 파도를 헤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평화의 복음을 전한 그 단순한 일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아니, 한 가정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영적, 도덕적 파장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넓게 퍼져나갔겠습니까? 우리는 연약하고 능력이 부족하지만 평화의 아기로 오신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해 주면 이런 놀라운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절에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우리 각 가정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국가, 인류에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평화를 맛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합시다. 그래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온 누리까지 평화의 물결이 굽이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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