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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 묻되 (삼상 2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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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흔히 ‘남자는 자존심 빼면 시체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알량한 자존심이란 것 때문에, 운전하다 길을 잃어도 좀처럼 남에게 묻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길 묻기를 귀찮아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한 자리를 뺑뺑 돌든지 아니면 고속도로 출구를 여러 개 놓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묻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버릇은 길 잃어버리는 정도가 아닌 훨씬 더 큰 영적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 뻔합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사는 동안 그에게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위태한 상황을 맞이할 때가 비일비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즉시, 혹은 아예 미리 하나님께 묻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고, 바로 그 좋은 습성 하나 때문에 그처럼 매일같이 이어지는 복잡한 상황, 위태한 시기에도 바른 길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생활을 통하여 인도함을 받고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수시로, 매사에 물으면서 사는 신자는 이 인생여로에서 어떤 곁길로도 빠지지 아니하고 항상 바른 판단을 내리고 옳은 길을 찾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2004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서, 다가오는 새 한 해의 우리 인생을 오판이나 시행착오 없이 항상 바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묻는’ 신자의 삶이 어떻게 인도함을 받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 묻는 신자만이 사람의 어리석음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본문 1절로 5절에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다윗의 세력이 아직 매우 미약했습니다. 참 어중이떠중이 같은 인생들, 할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랑자, 부도내고 가출한 사람, 뭐 주로 이런 잡다한 문제아들만 한 400명쯤 거느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과 함께 이리저리 방랑하며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다윗에게,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곡창(穀倉) 중의 하나인 그일라를 침공해 왔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곧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즉각 블레셋 군을 공격하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출하라.’는 지시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기 부하들을 불러 작전을 짜려고 하니까, 그의 참모들은 하나같이 펄쩍뛰며 반대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유다에 숨어 도망 다니기도 급급한 형편입니다. 이 삼십육계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숨이 찰 노릇인데, 이런 전력을 가지고 어떻게 블레셋 정규군을 공격한다는 말입니까? 한 마디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입니다.”라고 극구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400명 중에서는 그래도 다윗의 최고 브레인(brain)들이었습니다. 그런 참모들이 나름대로 정확하고 이성적으로 형세 판단을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그 전투는 승산 없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가끔 생기는 일입니다. 목사가 볼 때에는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분명히 성경 말씀이 명하는 것이라고 영적 판단이 확실히 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세상 사리에 밝은 장로의 생각에는 도무지 말도 안 될 일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똑똑하고 계산 밝은 집사의 판단에는 이런 IMF 시대에 그저 교회 망하게 만들 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당회, 제직회를 모아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두 번째 다시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라고 장담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윗이 자기 부하들에게 무슨 말을 했다는 기록이 본문에 없습니다. 아마 다윗은 ‘너희들 생각은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니 무조건 이대로 따라야 한다.’라고 그들에게 말했을 것이고, 그 참모회의에서는 더 이상 무슨 회의고 토론이고 필요조차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갈림길에서도 다윗은 올바른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자기 측근의 지극히 상식적인 조언, 모든 참모들이 그야말로 민주적으로 회의하여 만장일치로 동의한 소위 중지(衆智)를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그일라 거민을 구원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그를 따르는 400명의 사람들이 치른 첫 전투이기도 했고 또한 첫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그 멋진 승리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사람의 의견이나 지혜보다는 오직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중지’ 즉 ‘많은 사람의 지혜’를 따르는 것은 세상 사회에서는 가장 합당한 판단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중지’라는 것은 자주 ‘중우(衆愚)’가 될 위험이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다수의 의견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네들에게 이로운 쪽으로만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런 중지에 따른다면 결국 자기희생이 따르는 선한 일은 결코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바로 이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사람의 소위 냉정한, 사리에 밝은 판단에 따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 말씀이 명령하는 원리는, 교회에서 따르는 헌법은, 목사가 지도하는 방법은, 자기가 세상에서 알던 상식이나 논리나 경험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바로 그 양자 사이에 설 때가, 우리가 정말 신앙의 용사로서 교회의 큰 일꾼으로 자라 가느냐, 아니면 끝까지 자기 똑똑한 줄만 하는 평범한 졸병으로 평생을 사느냐 하는 결정의 기로에 서 있는 순간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너도나도 잘났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자기 생각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만 주장하면, 그런 교회는 영적 전투에서 그 어떤 승리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일을 함께 성취해 나가기 위해서는 자기 머릿속 계산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똑똑하다는 이 교만을 반드시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소위 ‘나는 입바른 소리 잘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자랑스레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도대체 누가 성경 말씀보다 더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민주적인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라고 착각해서도 절대로 아니 됩니다. 사람이 회의하고 다수결로 가결해서 복음의 내용이 결정되고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말 잘 하는 교인들이 모여서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가 결코 아니라, 오직 철저히 성경중심으로 그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성도들의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인 줄을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묻고 따르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하고, 그저 자기 머릿속에 있는 ‘노하우(know-how)’만 가지고 장로 노릇하려는 사람들이 지상교회 안에 꽤 많이 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마는, 저는 그런 장로들보다는 오히려 그런 장로들에게 끌려 다니는 목사가 훨씬 더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목사 스스로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여쭈어 보고 그 대답을 들어서 장로들을 이끌어가지 못하고, 몇 시간이나 당회를 하면서 장로들의 ‘중지’를 모아야만 하는 목사라면 일찌감치 사표내고 나와야 마땅합니다.

경향교회의 당회는 큰일을 하면서 오래 회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계획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확신을 가지고 당회에 내어놓으면, 거기에 대해서 뭐 복잡하게 왈가왈부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비민주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저는 ‘민주적인 당회’보다는 ‘말씀 중심의 당회’가 되는 것이 백 배 천 배 더 낫다고,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향교회 당회원이나 제직회원들이 지난 30여 년 동안 자기의 ‘노하우’가 아니라 오직 ‘말씀 순종’으로써 이처럼 큰 교회운동과 막강한 세계선교운동에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 대해서 내가 조금 아는 것 있다고, 사회생활 좀 능력 있게 한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면 평생 졸장부 교인으로 남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사고 작용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판단과 행위의 기준이 되고, 하나님 말씀이다 하면 그저 반사적으로 즉각 순종할 줄 알게 될 때에는, 도무지 못할 것 같았던 일도 능히 해 낼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을 줄 아는 성도, 그래서 자신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뜻대로 순종하여 행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묻는 신자만이 사람을 의존하다가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게 됩니다.

6절로부터 8절의 말씀에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왔을 때 그것을 또 사울 왕에게 고자질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보를 들은 사울은 당장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는’ 긴급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정말 해야 했을 때, 그일라가 블레셋의 침공을 당했을 때에는 꼼짝도 하지 않다가 다윗 잡으러 갈 때는 그처럼 대 군사 모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정작 와야 할 때에는 오지 않고 있다가, 이제 적군을 무찌르고 나라를 구한 충신들을 오히려 포위해서 죽이려 한 것입니다.

옛날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압록강까지 도망했던 조정의 대신들이 꼭 그랬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국란 중에 는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 놓고서는 왜군이 물러간 후에는 오히려 수많은 의병장들을 반역죄로 덮어씌워 고문과 사형에 처했던 것입니다. 또 한 차례 그런 억울한 지경에 빠진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어지는 9절 이하 13절에 기록하기를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 오리라 /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제사장이 입던 조끼 같은 복장인데, 거기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돌들이 부착되어 있었고, 제사장이 하나님께 어떤 일을 물을 때 그것을 사용했었습니다. 먼저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것이 사실인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다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정말 궁금했던 것은, “설마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사울의 손에 넘기겠습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자기네들의 목숨을 구해 주고 추수 곡식 빼앗겼던 것을 되찾아 준 은인인데, 정말 쥐꼬리만한 양심이라도 있다면 설마 그런 자기를 그들이 배신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전혀 뜻밖에도 ‘그들이 너를 사울의 손에 붙일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정말 충격이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윗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뼈저리게 실감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 해 주어도, 아무리 베풀어 주어도, 아무리 선하게 대해 주어도 오히려 배반하고 대적해 오는 이 인간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109편 4절에서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라고 한탄한 것도 바로 이런 자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제 그일라의 승전 이후에 200명이 더 불어나 600명가량 된 자기 부하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발 내디뎌지는 대로 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정처 없이 걸어간 길은 아니었습니다. 정처를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갔던 것입니다. 아무 데로나 움직인 것 같았지만 실상은 가장 정확한 인도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 미리 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레짐작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웬만한 경우라면 상식적으로 충분히 기대해도 될 만했던 사람의 보은(報恩)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보았던 그 예방책 때문에 그는 사람으로부터 배반당할 일을 미리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는 교인은 은연중에 사람을 더욱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상속해 줄 유산 많은 부모를 믿고 돈 잘 벌어오는 내 자식만 의지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친구지간의 의리가 평생 나의 보호가 될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매달릴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돈 열심히 벌고 세금만 꼬박꼬박 내면 이 사회 이 나라에 몸 붙이고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주일에 받은 말씀을 철저하게 생활화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이만큼 해 주었으니 그만큼 내게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하는 계산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계산은 정말 오산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신이란 것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믿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믿던 사람 때문에 큰 코 다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같은 인맥에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교회도 이 지상에 꽤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서로 상부상조하는 재미로만 교인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그러합니다. 사회적으로 권력이나 재력 있는 장로가 출석하는 교회에 나가서 자기도 무슨 한 자리나 혹은 사업 밑천이라도 얻어 보겠다고 꿈꾸는 교인들이 정말 있는 것입니다. 실로 말하기도 창피한 노릇이지만, 장로에게 교회 돈 빌려 쓰게 해 주고 그 은공 돌려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삯꾼 목사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생활을 무슨 ‘공생(共生)’하는 동물들처럼 살고 있는 이런 자들은 반드시 그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말씀에만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처럼 쉬 배반하는 사람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많은 시험을 예방하고 앞길에 숨어 있는 올무를 미리 피해가는 새 한 해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의 부하들은 말을 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 잘 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큰 인물들로 성장해갔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의 보은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만 믿고 따라감으로써 연이은 구사일생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매사에 ‘먼저 그리고 미리 하나님께 묻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잘 되어야 평생 부랑아 집단으로 남든지 아니면 일찌감치 사울의 손에 끝장나고 말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회의만 모이면 몇 시간이 흘러가는 ‘민주주의적 교회’가 아니라, 단순하게 ‘하나님 말씀 순종하는 교회’만이 최고 수준의 교회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인맥의 교회’가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는 교회’만이 그 어떤 시험과 환난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묻는 것’을 어찌 게을리 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계속 지도를 펼쳐 보는 일이며, ‘기도하는 것’은 길 잘 아는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일어날 일은 뻔합니다. 길 묻지 않아도 그 정도로 헤매게 될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에 닥칠 시행착오나 재앙은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자기 평생을 제 자리에서 뺑뺑 돌든지 아니면 영원히 출구를 찾지 못하고 멸망길로 직행하게 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필요 없을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필요 없을 만큼 매사에 정확하다고 자신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영적 교만과 옹고집인 것입니다.

새해에는 경향교회 교인의 생활강령 제4번에 있는 대로 더욱 「설교 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하는」 신자, 또한 제6번의 생활강령에 있는 대로 먼저 「기도에 힘쓰는」 신자, 곧 항상 ‘여호와께 묻는 자’가 됨으로써, 사람의 어리석음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며 사람을 믿는 시험에 들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더욱 의지하는 가운데, 2005년 내내 매사에 승리하며 형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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