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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의 눈물 (창 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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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예용범 목사

한해를 아름답게 마무리 하는데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여러 인간관계를 돌아보아 꼬이고 매듭진 것을 잘 푸는 일이야 말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1) 요셉의 눈물

요셉은 억울한 노예 살이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10대에 형들에게 팔려서
30대의 애굽 총리가 될 때까지 근 20년간을 타향객지에서 고생했으니 그 속에 분노와 원망과 외로움이 오죽 했겠습니까?

훗날 형들을 만나서 크게 우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 45: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사람에게 드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그동안 억눌렀던 회한의 감정이 폭발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울어보셨나요?
아니 어떤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모르긴 해도 우리들의 눈물은 기쁨보다는 고통의 눈물이 많고
그 고통의 눈물 중에 인간관계에서 속상해서 흘렀던 눈물이 많을 것입니다.

혹자는 눈물이 나약함의 상징인 냥 착각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큰 착각입니다.
눈물은 내면 깊은 곳의 상처가 외부로 드러난 한 모양 일뿐입니다.

2) 내면치유

이러한 내면 치유를 위한 여러 방법이 있긴 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주신 방법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무엇인가요?
요셉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눈물만 흘리는 것으로 매듭짓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한 말을 가만히 보면 지난 날 고통과 받았던 상처에 관하여 전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책임을 묻지도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 차원에서 대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눅 23:34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UN 전 서기관 차관을 지낸 로버트 뮬러박사가 발표한 국제 용서주간의 취지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용서하겠다고 결심하라.
분노는 유독하기 때문이다.
먼저 용서하고 미소를 지어라.
언제나 앞장서고 타인의 용서를 기다리지 말라.
용서함으로 운명의 주인이 되고 생활의 모범자가 되고 기적의 실천자가 되는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비겁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지금 용서하라.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용서라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 아닙니까?
소위 용서 받음에 경험자입니다.
따라서 이웃에게는 백 데나리온의 용서를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3) 용서가 되지 않는 이유

그럼에도 왜 용서가 되지 않을까요?
① 믿음이 지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은 가슴에서 느끼고,
        머리에서 명령하고,
        손과 발과 입 같은 지체가 행동해야 되는데,
가슴에서 느낀 것이 머리로 가질 않고, 혹은 머리에서 명령한 것이 각 지체로 가질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소위 신앙의 동맹경화입니다.

용서에 관한 믿음의 내용을 압니다.
◦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 원수 갚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등....

◦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등...
다 압니다.

문제는 가슴은 「Yes!」했을지라도
      머리는 「No」를 외치고
아니, 머리까지 「아멘!」했을지라도
손과 발과 그리고 입이 「No」를 외치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결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 자연적인 방법 -> 자연 성숙해서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마치 아랫목에서 윗목까지 시간가면 따뜻해지듯이..
시간가면 신앙이 성숙해 집니다.

어느 집사님은 가슴에서 머리까지 그 짧은 거리를 오는데 30년 걸렸노라고 한탄하는 소리도 들어보았습니다.

◦ 강제적인 방법 -> 발레리나들이 몸을 만들듯이 자주 행동하고 반복해서 생활화 사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방법이 다 교훈되고 있습니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자연적인 방법입니다.

  눅 6:38 “~ 용서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
강제적인 방법입니다.

요셉과 주님은 어떤 방식을 취했을까요?
요셉은 자연적이었습니다, 형들을 만날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강제적이었습니다. 지금 용서하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입니다.

② 관용의 부족입니다.
사람이 타고난 성품은 다릅니다.
그러나 이 관용은 천성적 성품이 아니라 은혜 받은 후의 새 성품입니다.
즉, 신의 성품이고 성숙한 믿음의 성품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초기 사역을 보면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후임 사도로서 선임사도를 공개적으로 면책했습니다.
또 사도행전을 보면,
마가를 2차 전도여행 중에 떼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일로 바나바와 크게 다투기도 하지요.

원래 사도바울의 성품이 사람보다는 일을 중요시 여기는 타입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그가 말년에는 달라졌습니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했습니다.

어디든 원리 원칙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것은 관용입니다.
용서입니다.

교회란 모름지기
주의 일을 하는 곳이기에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 사람을 만드는 곳이기에 「관용」이 있어야 됩니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나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교회가 법정 같길 원합니까?
아니면 가정 같은 교회가 되길 원합니까?

하나님의 원칙대로 한다면 우리는 다 지옥행입니다.
교회법의 원칙대로 한다면 몇이나 나아 있겠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크신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배반한 베드로에게 책벌보다는 떡과 생선을 들고 찾아가셨습니다.
누가 어른입니까?
누가 승자입니까?
누가 위대합니까?

관용은, 덮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관용은 문제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내게 와서 배우라」하셨습니다.
관용의 최고 모습입니다.

제 기도중 하나는 「관용의 사람 되게 하소서」입니다.
큰 그늘 만드는 나무만이 모든 생물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큰 일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관용의 사람입니다.

선조 때의 일입니다.
유극량이라는 사람이 무과에 급제한 후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처럼 기쁜 날에 왜 우시느냐? 고 묻자,
어머니가 자초지종을 말씀하는데,
본래 어머니는 홍판서댁의 노비였지만, 홍판서가 아끼던 옥접시를 깨고 너무 두려운 나머지 배천으로 도망했다가 다행히 결혼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유극량은 놀랐지만,  어머니를 위로하고 곧 도성으로 올라가 홍성이라는 판서를 찾아 사죄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홍성은 유극량의 사람됨을 장하게 여기고 그를 노비에서 해방시켜 주고 무과에 합격시켜 조정에 등용하기도 했습니다.

이 유극량은 훗날 귀한 신분이 되고도 홍성에게는 늘 노비로서 예를 갖추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극량은 군사를 이끌고 죽령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던 것입니다.

4) 주변 사람들

주변을 보십시오.
용서 받지 못해서 불안과 두려움에 살고 혹은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롭게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부부간의 이혼이 무엇입니까?
이유야 무엇이든,
결국 용서하지 못해서 일어난 불상사 아닙니까?

아이들의 가출사건이 무엇입니까?
형제와 친구지간이 왜 경원지간이 됩니까?
피타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는 아무런 빛도 희망도 힘도 없습니다.
오직 고통과 파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이든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의 본이고 명령이며 인생의 최상입니다.

용서할 때
먼저는 내가 삽니다.
    분노에서 자유하고
    미움에서 자유 합니다.

용서할 때
    상대방이 삽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결  론)

그렇다면 요셉의 눈물은 무엇입니까?
  용서의 눈물이며,
  승리의 눈물이며,
  사랑의 눈물이며,
  평안과 평화의 눈물입니다.

피만큼 귀한 눈물입니다.
우리의 피는 주께 드리고 눈물은 이웃을 위해 뿌립시다.
이 눈물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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