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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소망의 하나님 (사 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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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시카고의 무디대학 총장을 지낸 조지 스위팅이란 성경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먹지 않아도 40일은 견딜 수 있고, 물을 마시지 않아도 8일을 살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어도 8분을 살고, 숨을 쉬지 않아도 최고 4분까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소망이 없이는 단 1분도 살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대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간을 한마디로 ‘호모 에스페란스’로 정의했습니다. ‘호모’는 ‘인간’, ‘에스페란스’는 ‘희망, 소망’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희망을 갖고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희망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주는 격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가운데 생활하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소망의 하나님을 심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주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소망을 가집니다. 늘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2004년 마지막주일입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하나님, 신앙이 심어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요, 우리는 꿈과 소망으로 사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소망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현대를 사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소망으로 알려주셨을까요?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첫째, 말씀이 소망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는 이사야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위해 크게 활동했던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가 기록한 이사야서는 성경에서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이사야서는 성경 전체의 축소판이라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성경이 66권인 것처럼 이사야서는 66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나뉜 것처럼 이사야서도 전반부의 39장과 후반부의 27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말하고 신약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는 것처럼, 이사야서도 전반부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고, 주위의 열방이 죄를 범하고, 온 땅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죄의 결과는 심판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메시야가 주권자로 오셔서 은혜와 평강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구성과 흐름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축소이기에 이사야서가 놀라운 말씀입니다.

  본문은 전반부가 끝나고, 후반부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으로서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부분입니다. 그 가운데 6절부터 8절까지를 보면, 이스라엘을 풀로 비유하여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시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소망으로 임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무엇이 이스라엘에게 소망이었습니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나라가 멸망하고, 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가는 그 어려운 상황에 무엇이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였습니까? 바로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소망을 붙잡은 것입니다.

  무엇이 오늘 이 시대를 여러분과 저에게 소망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말씀이 우리의 상황을 깊이 깨닫게 하고, 말씀이 결국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처럼 말씀이 소망이기에 이스라엘은 말씀이 언제나 그들의 삶에서 떠나지 않게 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말씀에 대한 소망을 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잊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일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말씀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에,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듣고, 말씀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풍요와 성공과 승리로 이끌어 갑니다. 이제 다시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말씀을 붙잡고 사십시오. 말씀을 따라 행하십시오. 바로 그곳에 우리의 희망이 솟구치고,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망으로 삼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가 소망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이사야는 포로로 잡혀가는 그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10절에서 메시야가 궁극적인 소망인 것을 강조합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라고 말합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처럼 소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원자가 오시고, 구주가 강림하셔서 개인과 나라와 열방을 통치하고 다스리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이 예언대로 오셨습니다. 그는 강한 자로 오셨습니다. 그의 팔로 세계와 열방을 품으셨습니다.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만 상급이 있고, 그를 따르는 자에게 보응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메시야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예수가 소망인 것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들의 친히 목자가 되셔서 먹이시고, 안으시며,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위험한 일 생기지 않도록 안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야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소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 외에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없이 사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예수 없는 세상이 어떤지를 아십니까? 예수 없는 나라를 보셨습니까? 예수 없는 현장을 보셨습니까? 모두가 어두움이요, 범죄입니다. 예수 없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이래 이것이 반복되었습니다. 예수가 있을 때, 그곳은 늘 희망과 용기가 솟구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을 때, 그곳은 가난했고, 어려웠던 것입니다.

  어제가 성탄절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떠나있던 삶의 현장은 너무도 어두웠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이런 타이틀로 자막이 나가고 있었습니다. “성탄절, 성탄전야 사건 사고로 얼룩” 아기 예수님이 주인공인 성탄절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이 나라에 구석구석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날치기, 강도, 살인, 교통사고, 식중독, 화재... 이것이 불과 하루만에 이 나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은 정말 좋은 날, 기쁜 날인데, 예수 밖에서는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우울하고 슬프게 한 날이었습니다. 예수가 없는 곳은 아무리 풍요로워도 결코 좋은 곳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가 있는 곳, 바로 그곳이 가장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입니다.

  예수가 이 시대에 유일한 소망이요, 대안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다스리고, 그분이 나라를 다스리고, 그분이 세계를 통치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희망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 그분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이 친히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먹이실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 넓은 팔로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오직 그분만을 다시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천성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미래가 소망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말씀과 메시야를 소망으로 강조하고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던 당시 사람들은 시련의 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라는 멸망을 당하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쟁에서 무수히 죽었고, 선량한 사람들이 적군이 휘두르는 칼로 맥없이 쓰러졌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고,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잠도 잘 수 없었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 뒤죽박죽,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일, 미래가 희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유의하여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10절에 ‘장차’라는 말입니다. 이사야의 후반부에서 가장 강조하는 단어가 바로 ‘장차, 보라’입니다. 이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오늘을 넘어선 내일, 미래, 그러다가 세계가 끝나는 날, 저 천국이 임하는 순간까지 그 ‘장차’가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무엇을 알려줍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고통이지만 ‘내일’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소망이었습니다. 다가 올 미래, 나타날 영광, 미지의 세계가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2004년도가 끝나갑니다. 금년 한해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한해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힘든 한해였습니다. 국가가 힘드니까 우리의 삶도 참 힘들었습니다. 풀릴 듯이 풀리지 않는 경제의 먹구름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나라도 힘들고, 개인의 삶도 힘들다보니 건강을 지키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도 조급했고, 늘 짜증이 많았습니다. 이런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그러나 2005년이 또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아무리 내일을 설명해도 모르고, 나비도 내년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미래를 압니다. 미래가 은혜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년을 기대감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염려로서가 아니라 희망으로서 맞이해야 합니다. ‘어려울 거야’ 하고 살면 계속 어렵습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은 하나도 생기지 않습니다. 아니 생겨도 그것이 좋은 것으로 여기지를 못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는 언제나 나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우리의 가장 마지막 미래입니다. 점점 가면서 좋아지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나 노예로 대하지 않습니다. 조지 스위팅 박사가 그런 말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가 없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세상에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줍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늘 좋은 것을 주십니다. 좋은 길로, 좋은 여건으로,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03편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노래는 다윗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경험한 뒤의 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에도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거야’ 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런 기대감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년에는 여러분들의 모든 병을 고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기대감이 있을 때 우리의 인생에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실 것입니다.

  시편 146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가 소망의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 때,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살 때, 우리에게 복이 임할 것입니다. 평화와 기쁨을 주시고, 힘과 용기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말씀이 소망이고, 예수가 소망이고, 그리고 미래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제 오늘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200년을 마무리하시고, 새로운 한해를 벅찬 감격과 흥분과 기대감으로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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