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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 (삼상 19: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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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끝까지라고 하는 지속성을 사람들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끝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요구하고, 목회자인 저도 여러분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끝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바라고 싶습니다.

잠깐 냄비 끓듯이 열심히 하다가, 성실하게 하다가 곧 식어버리는 열심이나 헌신이어서는 안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이들이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 역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심에 변함이 없기를 다시 한 번 축원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목동으로써 그는 들에서 거친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양떼를 도둑질 하려는 수많은 짐승 떼로부터 그는 양떼를 보호하는 그런 열정적인 그리고 모험적인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가족들로부터, 형제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에서 열외가 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종을 선택하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사무엘이 그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에도 아버지나 형제들도 말째인 다윗은 제외시켰습니다. 당연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말째인 다윗을 기억하고 계셨고, 자기의 삶의 자리가, 자기가 봉사해야 할 자리가 거칠고 때로는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 있었지만, 사람은 넘어갔습니다. 부모나 형제들도 지나치는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지나치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셨던 줄로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거친 들에서 아무도 주목받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다윗을 불러 주셨고, 하나님은 그 다윗에게 장래에 나라의 역사와 운명을 맡기는 그런 사명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함께 했던 목동을 통해서 주의 종 사무엘을 만나게 하셨고,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이 국가를 침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짓밟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을 때,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대항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그 소년의 마음 속에 담대함을 주시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고백을 주셔서 담대하게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게 하셨고, 이기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친구 요나단을 통해서, 때로는 아내 미갈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의 위엄과 위기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셨고, 환경과 생각 할 수 없었던 장소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은 직접적으로 다윗을 도우시고, 인도하신 사건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다윗을 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울왕이었습니다. 이제는 군대를 보내서 그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고 다윗을 잡아 들여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다윗이 아내의 도움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에 가서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18절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 나아가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다.

여기서 고하였다고 하는 말은 모든 자기의 삶의 문제들을 상담을 받는 심정으로 사무엘에게 알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곤궁에 처할 때, 우리가 어려운 일에 직면할 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들이 이야기하지 못하면 병이 됩니다.

이런 병들은 주로 선교사들한테서 많이 나타납니다. 나아가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주의 말씀을 전하지만, 정작 자기들에게는 어려운 부분들은 나눌 대상이 없는 거예요. 지금 신창규선교사님 가정에 그런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바기오만 해도 한인들이 많이 있고, 동료선교사들이 많이 있어서 사역에 있어서 어려운 부분은 만나서 식사하면서 그 집을 오고 가면서, 서로 대화하면서 위로 받고, 위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산파비안으로 내려와서, 선교센타로 내려와서는 한국인이 없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저 선교사님은 여기저기 사람들을 분주하게 만나고 다니면서 그런 부분들이 해소가 됩니다. 여러분, 일을 한다는 것은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그 자체가 자기에게 위로의 시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일수록 주의 일에 뛰어들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오히려 그것이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문제는 사모님입니다. 센타에 앉아서 아이들만 키우고, 한국사람은 전혀 만나는 사람이 없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한국사람과 대화한 번 못하고, 남편은 맨날 바닐라고, 바기오로 돌아다니니까 얼마나 외로운지 병이 생겼어요.

목사님, 한국으로 가고 싶습니다. 목사님만 허락해 주신다면 한국으로 오고 싶습니다. 저는 강경하게 이야기 하지요.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죽어야지 무슨 소리 하고 있는거야. 호통을 치지만 그것도 사실 오래 갈 수 없어요. 사명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기도하면서 성경 읽으면서 견뎌볼께요. 그리고 몇 달 후에 또 전화가 옵니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눈물로 호소합니다.

지금 제가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할까? 본국으로 송환을 해야할까? 아니면 또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충성하지만, 충성의 뒤안길에는 어려움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늘 선교사님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감사하지만, 그게 입으로만의 기도로만 그쳐서는 안 될 거라고 하는 거지요.

성탄절 되시면 선교사님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소포로 보내면 안 됩니까? 요즘에는 아주 소포가 빠른 것들이 있어요. DHL도 있고, UPS도 있습니다. 일주일이면 갈 수 있어요. 그 때 현지에서 받아보는 작은 선물이나, 책들은 굉장한 힘이 됩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이 골짜기에, 이 속에 파묻혀 있는 나에게도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관심 가지고 있는 분이 있구나. 그것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윗은 이제 마지막으로 위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곳이 라마였습니다. 거기는 사무엘의 고향이었고, 사무엘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자기가 사울왕에게 헌신적으로 일했고, 목숨 걸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골리앗에게 나아갔었고, 자기의 그 담대한 믿음의 고백과 결단으로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하게 되었고, 그러나 돌아올 때의 여인들의 그 만만이요, 천천이요, 하는 평가 때문에 왕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고, 왕이 악신이 들렸을 때마다 비파로, 수금으로 자기가 음악치료에 헌신을 했지만, 왕은 오히려 자기를 단창으로 세 번씩이나 죽이려고 했었고, 이제 집에 피난했지만, 군대를 집에 보내서 잠 자는 자기를 침상에서 죽이려고까지 했었고,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주의 종에게, 사무엘 당신에게 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다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었는데, 다윗은 사무엘 주의 종을 만나서 그 이야기들을 다 했어요. 상담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들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담자의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멘토와 멘토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평안의교회 생명의 전화 상담훈련을 받은 분들을 굿멘토선교회라고 선교회로 사역하지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전화로 부천시민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8시간을 상담을 하다보면, 1시간씩 전화기를 들고 있어야 할 때가 있어요. 전화 할 때는 모르는데, 끝나고 나면 이 팔이 내려오지를 않아요. 1시간씩 들고 있던 팔이 굳어가지고 얼마나 뻐근한지 몰라요.

1시간 통화하는데 거의 50분이상은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세상은 물밀 듯 사람들이 밀려다니지만, 정작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생명의 전화가 생기고, 여성의 전화가 생기고 많은 전화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을 찾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무엘은 굿멘토였습니다.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상담자였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멘토의 역할을 할 분들이 있습니다. 직책으로 보면 권사님들입니다. 권사님들은 권위자입니다.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가진 분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권사님들이 ‘목사님, 저도 심방도 해 주세요. 성도님, 저 좀 위로해 주세요.’ 그러는 것은 조금 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권사님은 위로 받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권사님들도 위로 받아야 할 만큼 어려운 곤경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갈 때에 오히려 그 사역을 통해서 위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에게는 사무엘이라는 멘토가 있습니다. 자기의 모든 어려운 일들을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그에게 다 고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고향을 떠나서 이웃동네로 가자. 라마 나욧이라고 하는 동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일단 다윗에게 안정을 주고 그리고 다윗과 함께 있으면서 다윗을 위로했습니다. 아마도 이 주변에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멘토를 찾아본다고 하면 좋은 멘토는 우리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대장금이라고 하는 드라마에서 장금이가 상궁으로부터 같은 궁중의 나인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어쩔수 없어서 고통을 받다가 마지막 찾아가는 한 사람, 한상궁이지요. 한상궁에게 이런 저런 어려운 이야기들을 하면, 장금아~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한상궁은 장금이에게 최고의 멘토예요. 그에게 가서 그만 만나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것이 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서 또 돌아오지요.

사회적으로 그런 멘토가 필요하지만, 신앙적으로도 영적인 굿멘토가 우리에게 많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권사님들은 영적인 굿멘토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서 나의 이름만 불러도, 전화기에서 내 목소리만 들어도 위로가 될만한 그런 삶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런 은사를 위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권사쯤 되었지만, 일년의 성도들이 자기에게 한 번도 전화로 상담하고, 한번도 위로를 요청하지 않았다면 내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내가 오히려 목사님 전도사님 찾아다니면서 위로해 달라고 그렇게 한 해를 소홀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 보았나요?

19절에 우리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19절에서 21절에서 22절에서 계속해서 혹이, 혹이, 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아마도 사울왕이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내게 알려주면 뭐, 현상금이나 보상금이나 상을 주겠노라고 이야기 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고자질 합니다.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더이다. 우리의 주변의 문제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간질 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고자질 하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똑같이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였고,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고하였습니다. 우리 한글로는 똑같이 고한 것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고, 동기는 전혀 다릅니다. 전자의 다윗이 사무엘에게 고한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내어 놓는 상담을 원하는 피상담자의 모습입니다. 후자의 고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익을 위해서 어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실족을 위해서 하는 행위입니다. 절대로 우리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될 문제지요.

이것을 잘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사울에게는 불행하게도 자신에게 다윗의 위치를 알려주는 고자질 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이 사울에게 정보를 알려주지만, 그렇게 긍정적인 측근들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정보를 사울이 가질 때마다 군대를 라마나욧에 보냈지만, 놀랍게도 선지자와 선지자의 생도들과 더불어서 도착만하면 군사들도 예언을 하고, 그들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도착만 하면 은혜로운 집회에 같이 참석해서, 처음에는 붙잡으러 왔지만 저 뒤에 앉아가지고 이 집회만 끝나면 이 앞에 앉아있는 다윗을 잡아가리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무엘의 말씀을 듣고, 사무엘과 함께 하는 그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면서 나중에는 군사들조차도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할렐루야 은혜 받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거예요.

사울이 또 다른 사람의 정보를 얻고서 군대를 보내고, 또 군대를 보내고 세 번씩이나 그랬지만, 은혜 받고 돌아갈 때는 할렐루야! 은혜 받고 갑니다. 결국 사울왕은 자신이 직접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사울왕도 라마나욧에 와서 사무엘의 공동체에 참여하고 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또 옷을 벗고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사울왕도 하나님의 종 사무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을 붙잡으시고, 하나님께서 강팍한 그의 심정을 하나님께서 완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붙드셔서 그도 예언을 하며 하나님의 종 앞에 벌거벗고 누워있을 정도로 그도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결론에 우리는 이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생각과 계획과 도모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길 앞에서는 무력화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새롭게 확신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떤 인간에 하나님을 향한 도전도 오히려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지켜주시기로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내가 함께 하심이라. 임마누엘의 약속이 다윗에게는 살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다윗의 삶 속에서는 언제나 유효했다 그 말입니다. 불리하면 무효고, 유리하면 유효가 되는 그런 약속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은 유효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단순분명하게 확인하고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그 분은 나에게 끝까지 보호해 주셔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통해서든 장소를 통해서든 아니 사람과 장소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인도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지난 한 해동안 여러분과 함께 하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2005년 새해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럼으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흉하여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 우리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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