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으로… (눅 19:1-10)

  • 잡초 잡초
  • 219
  • 0

첨부 1


- 설교 : 오주철 목사

교수 신문은 필진과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 등 교수 162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2004년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정리할 수 있는 사자성어로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뽑혔습니다. 당동벌이는 후한(後漢)의 역사를 다룬 [후한서(後漢書)] '당고열전(黨錮列傳)'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동벌이라는 말은 "같은 파끼리는 한 패가 되고 다른 파는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만들어진 배경은 중국의 한나라가 쇠퇴할 무렵 학자와 정치가들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는 붕당을 만들어 단합하고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공격하고 배척했으며 이로 인해서 분파가 성행하더니 결국에는 망했다는 데서 만들어진 고사성어입니다. 결국 이 말은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깨끗하고 정당하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부도덕하고 부정하다는 태도를 지적하는 고사성어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송나라와 명나라 등이 당파가 성행할 때 분파주의, 당파주의를 비판하는 용어로 널리 쓰였으며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극심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상대를 설득하는 논리나 합리적인 대화는 없이 날카로운 대립만 난무하는 이 사회를 꼬집어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1년 내내 지속된 정쟁과 끝을 알 수 없는 경제불황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을 빗대어서 '지리멸렬'과 '이전투구', '진퇴양난', '이판사판' 등도 순위에 올라서 대체로 대립하고 정체된 한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 한해는 대통령 탄핵이나 행정수도 이전, 국가보안법, 언론관계법, 사립학교법, 과거사규명법 등 4대 개혁법 개정을 둘러싼 여야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끊임없는 분열과 대립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던 한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설문조사에서 22.2%가 지난 한해에 한국 사회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라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란과 대립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말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사랑 없음'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 없음'에서 나오는 미움과 시기와 다툼, 그리고 '사랑 없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의에 찬 행동들이 참으로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지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도 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짜증나고 피곤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없는 정의'입니다.

여러분, 정의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에서 말미암은 정의'와 '사랑 없음에서 말미암은 정의'입니다. 둘 다 정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자에는 생명이 있지만, 후자에는 생명이 없다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의가 사랑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사람에게서 생명을 빼앗아 간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히려 불의보다 더 위험하고 나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불의는 누구나 다 그 속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랑 없음에서 말미암은 정의'는 정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보다 더 위험하고 나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의를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사랑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불의에 의해서도 파괴되고 있지만, '사랑 없는 정의'에 의해서도 파괴되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천사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천사가 불의한 말을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 내 삶의 주변에서 정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한낱 꽹과리 소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바로 '사랑 없음'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 없음'에서 비롯된 정의는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경제가 너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것은 사랑 없음에서 비롯된 정치판의 이전투구식 대립입니다. 한쪽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민초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정의라는 이름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모 아니면 또라는 식으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한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에 우리 모두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으로 가득찬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과의 생활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과 함께 가정 생활을 한다면 그 가정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사회 생활과 교회 생활을 한다면 그 사회와 교회는 참으로 멋있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뜨거운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안고 이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복된 만남을 위하여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할 중요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사랑으로 가득찬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영신교회가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 뜨거운 사랑을 소요한 사람들로 가득찬 멋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봉독한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왭니까? 그는 사랑으로 가득찬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과의 단 한번의 만남으로 인하여 그의 인생이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과의 만남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삭개오가 경험하였던 이 놀라운 사랑의 체험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삭개오를 늘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였던 것은 자기 자신의 삶 속에 있었던 죄와 불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더 고통스럽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 없는 정의'였습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은 삭개오를 가리켜서 매국노라고 불렀습니다. 도둑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때로는 그의 외모까지 들먹이며 난쟁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듣기 싫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까닭은 불행하게도 그것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그는 로마에 빌붙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매국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없는 세금까지 만들어서 세금을 포탈했기 때문에 도둑놈이었습니다. 더 분명한 사실은 그는 키가 너무 작은 난쟁이였습니다.

삭개오에 대한 사람들의 말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삭개오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삭개오를 살리고 축복하기 위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의를 빙자하여 삭개오를 정죄하였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 과시와 자기 은폐였습니다. 그들은 삭개오를 비난하는 일을 통하여 자신은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아님을 과시하고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 속에 숨겨져 있는 삭개오와 같은 부끄러운 삶을 은폐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신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삭개오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도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삭개오에게도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려고 하는 영적인 갈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의 그러한 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매국노, 도둑놈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의 그러한 긍정적인 면을 놓치지 않으시고 보셨습니다. 레위에게서 마태를 보신 주님, 세리에게서 위대한 전도자를 보셨던 주님께서는 회개한 삭개오,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선한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계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는 말씀 속에는 '네 속에 있는 영적인 갈급함을 내가 다 안다. 네가 인간적인 수치와 체면을 다 버리고 뽕나무에 올라간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요, 훌륭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너의 집에서 묵고 쉬고 싶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삭개오는 감격했습니다.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사람을 감격시키고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놀라운 삶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감동한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내 놓겠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것을 강탈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회개입니다. 삭개오의 이 모습에 예수님도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오늘날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

삭개오에 대하여 품으셨던 예수님의 이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예수님의 이해인 것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없으면 정의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힘든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고부간의 관계일 것입니다. 시어머니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보면 거의가 며느리 흉들을 봅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다 일리가 있고, 며느리들이 잘못하는 면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며느리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보면 거의가 시어머니 흉들을 봅니다. 그것도 가만히 들어보면 다 일리가 있고 시어머니들이 잘못하는 면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고부간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딸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친정 어머니처럼 사랑하지 못한다는데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위가 집에서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해주는 것을 보면 '우리 사위 참 좋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이 집에서 청소를 하고 설거지하는 것을 보면 '며느리가 못됐다'고 흉을 봅니다. 딸이 늦잠을 자면 '우리 딸이 얼마나 피곤하면 저럴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며느리가 늦잠을 자면 '게을러서 뭘 해 쳐 먹겠느냐'고 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무슨 말을 해도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삭개오를 매국노라고 이야기 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용기 있고 바른 말 때문에 삭개오가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삭개오를 도둑놈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 때문에 삭개오가 바르게 된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바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 없는 바른 말이 가정을 죽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바른 말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정의가 정치를 진흙탕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사회 정의가 이 사회 경제를 거덜나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당사자들이 아닌가 한번 돌이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사 한 사람이 가족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샷터를 누르려고 하면 꼬마 하나가 자꾸 뛰쳐나오고 해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사는 그 꼬마 아이를 보고 '얘야, 엄마한테 가거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사에게 '엄마가 아니라 할머닙니다'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말한 덕분에 그 할머니는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젊게 보이는가 싶어서였습니다. 그날 아주 좋은 사진을 그 사진사는 찍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를 엄마라고 이야기한 덕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엄마를 할머니라고 불러서 상대방의 기분을 일부러 나쁘게 하고 상하게 하려는 심보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할머니를 꼭 할머니라고 불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는 여유있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약점과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보는데 있어서는 다 맹인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약점과 허물을 보는데는 다 천재들입니다. 시력이 다 2.0입니다. 상대방의 단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가정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직장과 사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영신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러분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축복보다 더 중요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유가 있는 멋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아내로 맞은 남편이 축복을 받아 행복한 삶을 살고, 여러분을 남편으로 맞은 아내가 축복을 받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부모로 맞은 자녀가 복을 받아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자녀로 둔 부모님들이 축복을 받아 행복해 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교인으로 만난 목사인 제가 복을 받아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직장의 동료로 만난 사람들이 복을 받아 행복한 직장 생활과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축복이지만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축복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주하게 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윙크'입니다. '윙크'는 아무에게나 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부인이 아무 남자에게나 윙크를 했다가는 남편에게 엄청난 곤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윙크는 아무에게나 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만 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합니다.
그런데 이 '윙크'에도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윙크에도 깊은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한쪽 눈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한쪽 눈밖에 없는 모자라는 부족함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모습으로 영원히 당신만을 바라봅니다'라는 위대한 철학이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당신보다 못하다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상대방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부부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당신보다 못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 나는 죽어도 당신한테 질 수 없다'는 자세,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윙크의 이 위대한 철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말이 틀린 것이 무엇이냐?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서 고함을 치면서 상대방과 다투는 광경을 간혹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합니다. 사실 그 사람의 말이 틀린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 잘못된 것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정작 있어야 할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까닭에 그의 바른 말도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전서에 보면 많은 성령의 은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은사보다 사랑의 은사를 더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우리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속한 가정과 직장, 그리고 교회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그러한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사랑이 가득한 여러분의 심령에 우리 주님께서 계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