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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천국백성의 가정윤리 (1) (마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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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남자의 성, 여자의 성

아주 오래 전이지만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부른 ‘여와 남’이라는 제목의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지구 위의 반은 남자 지구 위의 반은 여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남자 아니면 여자입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 무엇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남녀간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남녀간의 성(性)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성이 없으면 가정과 사회는 존재할 수 없고 나아가 우리 인류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라는 남자와 하와라는 여자를 만들어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이요 결혼이며 이 결혼을 통해 가정이 만들어지고 자녀가 태어나고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性)을 더러운 것이나 금기시할 것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선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성의 문제가 정말 복잡해졌습니다. 건전한 성, 아름다운 성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인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이 이 건전한 성을 왜곡시켜서 복잡한 문제들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경찰이 사창가를 집중적으로 단속하는데, 단속하면 숨어 있다가 또 나타나고, 또 잡으면 갇혀 있다가 또다시 나타나고 참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직업이 매춘이라고 합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곧바로 매춘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래된 전통이 집중단속을 한다고 하루아침에 없어질까요? 찾는 사람이 있으니 이런 직업도 생기는 것입니다. 건전한 성 외에 다른 성에 대한 욕구가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이런 직업이 뿌리 뽑힐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휴대전화 때문에 상당히 골치가 아픕니다. 시도 때도 없이 “오빠 보고 싶어”라는 문자 메시지가 날라 오고 요즈음엔 아예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속삭이니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요즈음에는 얼마나 귀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헌데 이런 음란전화를 받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거는 남성들이 의외로 많다니 이런 전화가 올만도 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레위기 19장 29절에 “네 딸을 더럽혀 창녀가 되게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라는 하나님의 경고 말씀이 나오는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정말 음풍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도 잘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얼마나 왜곡된 성에 얼룩지고 온갖 성 문제와 성 범죄가 판을 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결국 이런 불건전한 성과 왜곡된 성 문화가 부부 사이의 신뢰감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며 나아가 이 사회와 민족을 파멸시키는 길로 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런 음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건전한 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전한 성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은 건전한 성과 가정윤리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

율법이 말하는 간음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주님은 크게 두 가지의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바로 ‘간음’과 ‘이혼’에 관한 가르침인데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시작된 율법의 완성에 관한 말씀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천국백성이 가져야 할 성윤리와 가정윤리가 세상의 법에서 바라본 윤리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철저한 성윤리와 가정윤리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내용인 27절부터 30절을 보겠는데 여기서 주님은 간음의 정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27절 말씀처럼 구약의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 중 제7계명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무엇을 간음으로 보는가? 바로 행위(몸)의 문제를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행동으로 간음하고 몸으로 음행을 해야만 간음죄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어떤 유대교 랍비는 좀더 적극적인 해석을 했습니다. “몸으로 결혼 관계를 깨뜨린 자만 간음자가 아니라 눈으로 깨뜨린 자도 간음자다.” 즉 몸의 문제가 아니라 눈의 문제를 기준으로 확대해석 한 것입니다. 이 정도만 되도 상당히 큰 문제가 생깁니다. 눈으로 간음죄 저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요즈음 남자들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과거에 직장에서 남자들이 여직원에게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성추행으로 엄연한 범죄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함부로 여성의 신체를 건드리는 행위, 성적인 농담을 하는 일, 심지어 여성을 야릇한 눈으로 처다 보는 행위까지도 추행에 해당됩니다. 남자 분들은 눈 조심하십시오. 괜히 여자 잘못 처다 보면 졸지에 성추행범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 랍비는 눈으로도 얼마든지 간음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실제 성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이 사회에서 우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음란죄를 짓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창 3:6) 이 말은 그만큼 인간이 시각에 의해 죄를 많이 지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TV나 영화나 인터넷이나 길가의 사진 등을 보며 음란한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 중에는 머리에 혹이 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차라리 이런 것들 안 보겠다며 눈을 감고 다니다나 여기 저기 부딪혀서 생긴 혹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처럼 눈 감고 다니면 죄를 안 범하게 될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간음죄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몸의 문제도 아니고 눈의 문제도 아니고 아예 마음의 문제를 기준으로 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선 눈의 문제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유대교 랍비의 해석처럼 눈으로도 간음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몸의 행위를 넘어서, 또 눈의 문제까지도 넘어서, 이제는 아예 마음의 문제로 간음죄를 논하고 계십니다. 즉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란한 생각을 품은 것 자체가 아예 간음죄라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범하는 죄보다 내면적인 죄, 마음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율법에서는 남의 아내(혹은 약혼자)를 빼앗는 것을 간음죄라고 보았는데 예수님은 아예 모든 ‘여자’(28절)를 간음죄의 대상으로 보고 계십니다. 정말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말씀이지요.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어떻게 여자를 보기만 하고 마음에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죄가 성립되나? 물로 거꾸로 남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은 여자도 간음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다 간음죄인 아닙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생각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성을 보고 마음속에 “야 잘 생겼다, 예쁘게 생겼다. 저 여자(남자)하고 한 번 어떻게 해봤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이 모두 간음죄라는 뜻일까요? 이 말씀을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본문으로 돌아가 말씀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먼저 28절에 나온 ‘음욕을 품는’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갈망하다’, ‘욕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무엇을 적극적으로 원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성을 보고 묘한 느낌이 오는 것 정도가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적극적으로 그와의 성적인 관계를 원하는 마음이 들면 그것이 간음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마음에’라는 말이 중요한데 이 말은 육신이나 의지와 별개의 감정적인 부분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지․정․의(知․情․意) 중에서 ‘마음’ 하면 ‘정’(情)만 생각하는데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말은 어떤 감정적인 부분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어떤 성적인 감정만 든다는 뜻이 아니라 성적인 의도까지 다 포함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욕을 품는다, 마음속에 간음한다는 말은 눈으로 이성을 보고 내 마음속에 성적인 욕망이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적인 행동을 하려는 의지까지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의지를 실천으로 옮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한다고 다 뜻대로 되나요? 율법은 이 생각과 의지를 실천으로, 행동으로 옮겨야만 간음으로 본 반면 예수께서는 행위로 옮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음란한 생각과 의지 여부로 간음죄를 규정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을 듣고 조금 안심할지도 모릅니다. “다행이다. 여자를 보고 예쁘다는 생각, 날씬하다는 생각만 하는 것은 간음죄가 아니구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솔직해집시다. 이성을 보고 예쁘다, 잘 생겼다고만 느끼고 끝나는 경우가 그리 많습니까? 거기서 더 나아가 성적인 욕망이 생기고 의지가 생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둘 사이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어느새 내 마음이 순식간에 음욕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본다면 정말 우리가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간음죄를 짓고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시면 범죄하지 않은 마음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나님이 감찰하시면 세상 어느 누가 감히 내 마음이 깨끗하다고 할 사람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음욕을 이겨내려면

그러면 이제 중요한 내용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짓지 않으려면, 음욕을 품고 간음죄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답은 이것입니다. 29절과 30절을 읽어보세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얼마나 과격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정말 과격분자입니다. 데모하는 학생들 구호가 과격하다고들 말하는데 예수님은 그 정도가 아니라 과격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싫어했겠습니까? 자, 이 예수님의 과격한 말씀대로라면 정말 우리가 간음죄 안 지으려고 오른 눈을 빼버리고 오른손을 잘라버려야 할까요? 여기서 하필이면 ‘오른’ 눈, ‘오른’손 하고 ‘오른쪽’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른쪽이 더 중요하고 좋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로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범죄하기 쉬운 신체기관이기도 합니다.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하지만 또 그만큼 죄 지을 일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눈이나 손이 범죄하거든 차라리 빼내고 잘라버리고 천국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정말 눈을 빼버리고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신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만약 이 말씀 그대로라면 그리스도인 중에 저를 비롯해 눈 빠진 사람, 손 잘린 사람이 거의 대부분일 테니까 말입니다. 어디 오른 눈, 오른손만 자르겠습니까? 두 눈 다 빼버리고 두 손과 발 다 자른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주님이 네 오른 눈을 차라리 빼어 내버리라, 네 오른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것은 정말 빼라고 찍어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오리겐이라는 초대교회 교부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다면서 스스로 거세하여 고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은 결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순종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반드시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할 문자적인 진리가 있는가하면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진리도 있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눈을 빼버리라, 손을 찍어버리라는 것이 문자적인 진리일까요? 상징적인 진리일까요? 혹시 진짜 눈을 빼버리고 손을 잘라버리면 정말 음욕을 품지 않게 될까요? 아닙니다. 눈이 없어도 손이 없어도 얼마든지 죄 지을 수 있고 음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신체 중 일부를 잘라낸다고 해도 결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성욕이나 음란한 생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성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성불구가 되면 음란한 생각이 안 들까요? 실제로 그런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더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간음죄를 더 많이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빼버리라, 손을 빼버리라 하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네 눈을 빼버릴 정도로, 손을 빼버릴 정도로 단호한 각오를 가지고 네 마음속에서 음란한 생각을 끊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이 세상의 세태와 풍속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쓰는 말 중에 ‘빙산의 일각’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빙산이 무서운 것은 바다 위로 보이는 부분은 지극히 적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사실 그 밑에 감추인 부분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신문과 뉴스를 보며 세상이 정말 악하다고 타락했다고 한탄하지만 실은 신문이나 뉴스에 난 기사들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범죄를 저질렀지만 들키지 않은 경우는 그보다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거나 뇌물이나 청탁 같은 부당한 방법을 써서 처벌을 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죄를 저질렀지만 그것이 세상의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죄가 되는 경우는 더 많습니다. 술을 먹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렸는데 측정을 해보니 기준치에 아슬아슬하게 미달되어 처벌을 면했습니다. 음주운전은 음주운전인데 법에는 걸리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았는데 바쁘거나 귀찮아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버스에서 노약자를 보았지만 피곤해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위는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지 몰라도 법으로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죄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 마음속을 하나님의 눈으로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이런저런 더러운 생각과 정욕이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고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않으면 죄가 안 됩니까? 음욕을 품었지만 실천하지 않고, 미움이 가득한데 밖으로 나타나서 상대방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백성의 가정윤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 내용은 ‘천국백성의 성윤리’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천국백성의 마음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법은 나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기에 얼마든지 내 본 모습을 감추고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이나 세상의 법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마음속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역대상 28장 9절에서 다윗임금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의 한 구절을 듣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니 귀 기울여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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