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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소망! (벧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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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2005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늘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새해 들어서면서 사람들마다, 언론 매체들마다 유난히 ‘희망’을 화두로 삼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새해에 대한 소원과 기대는 늘 있기 마련이지만 금년에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여러분, 왜 그럴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우리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어두울수록 빛에 대한 갈망이 강렬해지듯이 절망의 시대에 희망에 대한 갈망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희망 혹은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아니, 사람은 소망이 끊어지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그 소중한 목숨을 왜 스스로 끊겠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소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homo esperans)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도 무려 40일 가량 버틸 수 있지만 소망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아가기 힘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망을 갖되 과연 어떤 소망을 갖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무리 소망을 가져도 그것이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면, 혹은 이룬다 해도 별게 아니라면 나중에 더 큰 실망을 하고 무서운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헛된 소망에 속아 사는 딱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갖되 반드시 성취할 수 있는 소망, 이루기 전에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이룬 후에는 그것을 누리면서 기뻐하는 참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과연 그 소망은 참된 소망인가? 아니면 헛된 소망인가? 함께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참된 소망을 가짐으로 늘 기쁨이 넘치는 한 해가 되고, 남은 생애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초대교회 시대 즉 주후 1세기에 기록한 편지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치하에서 모진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절망의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소망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그 소망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소망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산 소망’(Living Hope)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속한 소망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소망과 베드로가 말하는 하늘나라의 소망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그 중에 어떤 소망을 가져야 할까? 그리고 그런 소망을 가지면 우리의 삶의 질이 얼마나 좋아질까? 차례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세상에 속한 소망 : 죽은 소망, 일시적 소망

세상 사람들은 대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소망을 가집니다. 이를 가리켜 ‘세상에 속한 소망’이라 불러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아볼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갖는 소망입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한 해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금년에는 이러 이러한 것을 갖고 싶다, 해보고 싶다, 이루고 싶다, ... 등의 소망들입니다. 어느 백화점에서 판매 전략을 수립하고자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새해의 소망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봤답니다. 그랬더니 1위가 돈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든가, 가지고 있는 증권이 확 올라가든지 부동산값이 확 올라서 돈벼락을 맞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무려 67%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건강 문제, 승진 문제 등이 2위, 3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자녀의 진학, 결혼 문제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비슷한 소망을 갖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소망을 갖는 게 그 자체로 나쁠 것도 없습니다. 육신을 갖고 세상에 살 동안 다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속한 소망에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시간과 정력을 쏟으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 속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소망을 성취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결국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의 표현을 빌면 세상은 ‘장망성’(將亡城)입니다. 세상에는 종말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 죽음이 있고, 우주역사적인 종말도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먼저 떠나든지 혹은 세상이 사라지든지 어떤 경우든지 세상 것들은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 ”

또 잃어버리기 전이라도 세상 것들이 인간의 육신을 만족시킬 수는 있어도 영혼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러니까 세상에 속한 소망은 성취하지 못해도 속상하고, 성취해도 허망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절망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바라던 소망을 성취하지 못한 데서 오는 절망이요, 다른 하나는 그 소망을 성취한 이후 느끼는 절망이다.”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소망을 성취하지 못한 데서 오는 절망은 누구나 쉽게 공감합니다. 그런데 소망을 성취한 후에 느끼는 절망은 경험하기 전에는 쉽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가서 다 경험하고 나면 그때는 이미 늦거나 후회막심한 겁니다. 전2: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
그래서 성경은 거듭 강조합니다.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말입니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 ”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속한 소망만 갖고 사는 사람은 세상의 상황에 따라 요동하게 됩니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절망하고, 상황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방탕합니다. 요즘 경제사정이 안 좋다니까 난리입니다. 반대로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 난리가 안날까요? 다른 종류의 난리가 납니다. 먹고 마시고 허랑방탕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죽는다고 난리고, 형통하면 오만방자해져서 난리입니다. 이래저래 꼴불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게 결코 행복한 인생의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를 걸 필요가 없습니다. 돈에 소망을 가지면 돈에 실망할 때가 옵니다. 권세에 소망을 두면 권세에 실망할 때가 옵니다. 쾌락에 소망을 두면 쾌락에 실망할 때가 옵니다. 심지어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사람에 실망할 때가 옵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이런 소망을 가리켜 어떻게 표현합니까?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 ” 하늘에 속한 소망을 설명하는 말이니까, 뒤집어 보면 세상 소망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썩는 것이고, 더럽고, 쇠합니다. 한 마디로 ‘죽은 소망’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염세주의자가 되자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전적인 소망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언젠가 실망할 때가 오니까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세상 것보다 더 좋은 것에, 확실한 것에 소망을 두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하늘에 속한 소망입니다.

[2] 하늘에 속한 소망 : 산 소망, 영원한 소망

하늘에 속한 소망은 이 세상 너머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이루어지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3절에서 이를 가리켜 ‘산 소망’이라 부릅니다.

① 하늘에 속한 소망의 내용 :

그러면 구체적으로 ‘산 소망’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4절, 5절을 보십시오.

* 5절.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천국에서 누릴 영생과 부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얻은 구원은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요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새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의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가 영생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산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게 영혼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과한 후 영혼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죽음 이후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후일 예수님 재림 시에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이미 영혼은 영생하지만, 육체는 무덤에서 잠자다가 영혼과 연합하며 새로운 몸(영원히 썩지 않고 강하고 아름다운 새 몸)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게 구원의 완성입니다. 성도들은 이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14:32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 4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늘의 기업이란 성도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상속한 하늘나라의 보화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와 그 열매, 황금 길과 보석 집 등으로 묘사됩니다. 사도 요한이 천국을 보고 기록할 당시로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천국의 기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좋은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이런 것들이 얼마나 귀중하고 중요한 것인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② 하늘에 속한 소망의 확실성 :

뿐만 아니라, 하늘에 속한 소망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성취됩니다. 99.9%도 아니고 100%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망이라도 그것이 성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소망은 반드시 확실합니다. 때때로 세상에서 환란과 풍파가 있고, 핍박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결국은 성취됩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속하시고 승리하신 십자가와 부활은 믿는 성도들이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 영생과 부활을 누리고 천국의 기업을 누릴 것을 보증합니다. 또 그럴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으로 성도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 3절(하). “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
* 5절(하). “ ...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

요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리고 고난의 과정이 오히려 정금 같은 믿음으로 단련해서 하늘의 소망을 기어코 성취하게 만들어 준다고 말씀합니다.

* 6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7절.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3] 영원한 소망을 가진 성도의 삶 : 인내, 자족, 헌신

이와 같은 하늘에 속한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당연히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가지면 이 세상에 속한 일시적인 것들은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겁니다. 한 마디로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① 고난 중에 인내하고 승리하는 삶 :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합니까? 그럴 때 세상 것에만 소망을 둔 사람은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견뎌내지 못하고 포기하고 죽어갑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을 가진 자는 어차피 세상은 장망성이요 고난이 많은 곳임을 알기에 인내하며 견뎌냅니다. 세상의 유일한 소망임을 알기에 그분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새 힘을 얻고 승리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이 많이 나쁩니다. 특히 금년에 경제 전망이 밝지 못하다고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청년들도 취직을 못해서 야단입니다. 한참 미래를 향해 청운의 꿈을 품어야 할 청년들이 소망의 날개를 접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인생의 키는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생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소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 실망이란 단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광고 카피를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어려운 시대상을 반영한 기발한 광고 카피입니다. 힘들어하는 가장들의 가슴에 파고들어가는 문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 서로 서로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힘내세요! 예수님이 있잖아요!” “여러분! 힘내세요! 하나님이 있잖아요!”

②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하는 삶 :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이미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삽니다. 하늘의 평강을 맛보며 삽니다. 그 맛을 보면 세상 맛은 별게 아닙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습니다. 그게 곧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능력입니다. 어떤 형편에도 잘 적응하는 영적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것을 보면 천국에 가서 더 좋은 것을 누릴 것이기에 그런 것에 혹해서 빠져들지 않고 적당하게 누립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사치나 방탕에 빠지지 않는 겁니다. 혹 세상에서 열악하고 불편한 것을 만나면 천국에 가면 언제 해보랴 하는 심정으로 감내합니다.

이따금 여행을 하다 보면 불편하고 구질구질하고 그럴 때 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어 하고 즐깁니다. 만일 그런 것들을 싫어하면 여행은 할 수 없겠죠. 왜 그런 구질구질하고 힘들어도 참으면서 여행을 다닐까요? 잠시 그러다가 곧 집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여름 중국 선교 여행 갔을 때의 일입니다. 깊은 시골 지역을 방문해서 한 집에 머물었는데,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화장실이라기보다는 뒷간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곳입니다. 일을 보러 들어가니까, 바로 옆에 붙어 있는(야트막한 담만 아니면 그냥 한 군데라고 할 수 있는) 돼지 우리가 있었습니다. 순간 질겁을 했지만 그런 대로 재미있더라구요. 만일 거기 갇혀서 영원히 살아야 된다면 고민이죠. 하지만 잠시 후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 웃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이 세상에서 때때로 어려운 여건 가운데 놓이기도 하지만, 하늘에 속한 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장차 들어갈 천국이 있기에 자족하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영원을 위해 투자하고 헌신하는 삶 :

여러분,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얻은 것들을 먹고 마시는 데 다 소비해 버립니다. 혹은 너무 집착해서 써보지도 못하고 빼앗기거나 다 두고 죽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하늘에 갈 것이므로 하늘나라를 위해 세상에서 얻은 것들, 시간과 물질, 지식과 재능 등을 하늘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투자합니다. 하늘나라 소망의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합니다. 또 그런 목적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갑니다. 아른바 목적이 있는 고상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모트라는 영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37세가 되도록 캐비넷 제조공으로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남은 부모 잘 만나서 화려하게 잘만 사는데 나는 뭔가? 이렇게 매일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 앞으로 내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울적한 마음으로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마음이 끌려 작은 교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그는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영안이 열렸습니다. 과거에는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소망이 달라졌습니다. 하늘에 속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변화된 삶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환경 조건을 그대로였지만 자신이 변화됨으로 그는 행복한 철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인생은 점점 풍성하게 되었고, 자기가 일하는 철공소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 꿈으로 행복했고, 열심히 일한 결과 정말 철공소 주인이 됩니다. 그후 큰 사업가가 되었고, 55세 되던 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절망 중에 있던 자신을 소망으로 인도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소망의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사재를 털어 교회를 지어 봉헌합니다. 바로 그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찬송시를 하나 지었는데 그게 곧 찬송가 539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 ”

성도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소망을 가져 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소망을 갖고 계십니까?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소망은 우리 삶에 큰 활력소가 되고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꼭 기억해야 됩니다. 세상에 속한 소망은 언젠가 우리를 실망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아도 될 소망 그것은 하늘에 속한 ‘산 소망’입니다. 아무쪼록 신년 벽두에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소망을 여기에 맞추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소망 때문에 현실의 고난과 아픔도 이겨내고 늘 감사하면서 영원한 가치와 보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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