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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분명한 영적 깃발을 꽂으십시오 (삿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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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킴 코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95년 서른일곱의 나이에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이라고도 하는 루게릭 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현재로서는 치료받을 것도 없는 불치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근육을 조절하는 신경 세포가 죽어갑니다. 근육이 약해져서 점차 기능이 멎게 되고, 결국에는 사람이 완전히 마비가 되고 맙니다. 증상이 진행되는 동안 의식은 대개 멀쩡하지만, 진단 후 3년에서 5년 내에 호흡기 계통의 합병증으로 죽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킴이라는 사람이 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다가 곧 휠체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공 호흡장치를 부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열살된 아들과 여덟살 된 두 아들을 두고 장기 요양병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1개월 후에 그는 고개와 안면근육 밖에는 움직일 수 없는 중증환자가 되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그저 눈을 깜박이거나 눈썹을 올려서 의사를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좀 더 복잡한 말은 야구모자 같이 생긴 아주 특수하게 제작된 것을 머리에 쓰고 지극히 제한된 머리 동작으로 화면에 보이는 키보드를 치면서 노트북 컴퓨터로 해결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글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아내를 포옹할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내의 체취를 들이마셔 다음 번 방문 때까지 내 오감을 가득 채우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벌써 죽었어야 하는데. 더 이상 아이들한테 아버지 노릇도 못하고, 남편 노릇도 못하고. 내게 남은 게 뭔가?"
그는 그런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해서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병실 문에도 이렇게 붙여 놓았습니다. "출입금지, 들어오기 전에 간호사를 만날 것. 면회 사절"

그런데 어느 날 한 여자가 요란하게 그의 병실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바로 코너스의 오랜 친구 폴라였습니다. 조금 후에 간호사가 들어와서 그녀를 내보내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인 그녀의 행동에 킴은 허락을 합니다. 그것도 눈썹을 올리는 것으로....

두 사람이 대화를 할 수 없음에 난감해 하던 폴라는 야구 모자 같은 것을 킴의 머리에 씌우고 컴퓨터로 대화를 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과의 대화는 시작이 됩니다. 폴라는 질문을 퍼붓고 킴은 제한된 머리 동작으로 열심히 컴퓨터에 단어를 두드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듯 저녁 시간이 되고 폴라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폴라는 킴에게 내일 올 때에 음식을 좀 가져오겠다고, 살이 좀 쪄야겠다고 말을 합니다. 이 말에 킴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난 곧 죽을 건데" 이 말에 폴라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킴,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어요. 하지만 열심히 살지 않으면 당신은 그저 열심히 죽어 가는 거예요. 이봐요 친구, 당신은 오늘 살아있다고요. 이제부터 삶을 시작해 봐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히 살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열심히 죽어 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2005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주신 것은 다시 시작하라고 주신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꿈과 비전을 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열심히 죽어 가는 의미 없는 존재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바둑을 잘 모르지만, 그러나 바둑을 둘 때에 고수와 하수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압니다. 고수는 항상 수를 많이 내다봅니다. 어떤 때는 10수, 20수, 그 이상을 내다봅니다. 수를 많이 내다볼수록 고수입니다. 반면에 하수는 항상 한두 점 따먹기에 바쁩니다. 그러다가 쉽게 대마를 죽이고는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 앞에 있는 환경에 붙잡혀서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접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보다 멀리 내다보십시오.

지금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정하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이 혼돈의 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보다 멀리 내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눈 앞에 있는 것에만 사로잡혀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솔직히 인생 여정에서 혼란의 시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아니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목표를 잃고 갈피를 못 잡고 심지어 탈선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될 때에 중요한 것은 드러난 행동보다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 의식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믿음 안에서 바른 선택을 하는 일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번의 잘못된 선택이 끝없는 고난을 당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한번의 잘된 선택이 나를 복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선택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섰을 때에 선택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갑자기 이스라엘 역사에 구심점이 사라진 지도력의 진공 상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숱한 물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퍼져나갔습니다. 이 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말씀이 사사기 17장 6절과 21장 25절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역사의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던 시대가 바로 사사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가리켜서 '혼돈의 시대', '혼란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혼돈과 혼란이 시대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더 분명한 자기 선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두울수록 작은 빛은 더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절대적인 헌신과 절대적인 믿음이 결여된 이 시대에 우리는 오히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혼돈과 무질서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도 분명한 자기 결단이 있었던 사람들은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혼돈이 난무하는 삶의 교차로에서 분명한 자기 영적 깃발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영적 혼란의 시기라고 한다면 이 때에 더 확실한 자기 이정표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2005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깃발을 꽂아야 합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이 한해를 살아가면서 이 두 가지의 깃발을 분명하게 꽂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는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는지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에 우리는 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시대가 힘들고 어렵다고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너무 쉽게 절망하고,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중심에 분명한 이상과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꿈과 비전이 없는 중요한 이유는 그들 중심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쉽게 절망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그렇게 자포 자기하다가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면 그때 한다는 것이 "기도나 한번 해 볼까?" 그러나 이것은 기도가 자기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기도의 참 맛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좀 어려우니까 하나님께 요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 보려는 몸짓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기도가 되지 않습니까? 어디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 삶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인도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무엇보다도 요청되는 시대에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돈의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삶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게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삶의 방향을 물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지도자를 잃은 혼돈의 시대에 그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슬픔이나 감정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시대적인 고통이 심할수록 믿음의 사람들은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혼돈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여러분이 되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던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면 아주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다윗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여쭙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힘든 시기에 다윗이 먼저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방향을 지시하시면 그 길을 향하여 주저하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에게도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삶에서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무릎을 꿇습니까, 아니면 내 주관과 판단대로 행동을 합니까? 늘 확실하고 분명하다면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기가 바로 갈림길에서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림길이나 혼란의 시기는 바로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이 때가 가장 영적으로 성숙되고 기뻤던 때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 오늘날 미국의 밑거름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카리 테일러 장군입니다. 그는 헌법에 의해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신앙이 독실한 테일러 장군은 이날의 취임을 거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고 간청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헌법은 임기가 만료된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폭스 폴크가 대통령직에 하루 더 머물러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동안 국가 원수의 자리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테일러가 취임을 거부한 그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동안 자리를 메울 임시 대통령을 상원에서 선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상원은 상원의장인 애치슨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애치슨은 그만의 금도를 발휘해서 어떤 이유로도 깨우지 말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당부를 하고서는 토요일 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월요일까지 그의 임기 24시간을 모두 잠으로 채워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법도가 인위적인 법률보다 위에 있음을 믿고 주일 취임을 거부한 대통령이나 24시간 국가 원수의 직위를 위임받고도 의도적으로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지 않는 임시 대통령 모두 미국 국민들의 신앙과 도덕성, 절제력, 준법정신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오늘의 미국을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도 주님의 길을 먼저 선택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길을 선택하고, 주님의 뜻을 먼저 묻는 자의 삶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둘째로, 신앙은 현상 유지가 없음을 기억하시고 앞을 향해 더 전진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인숙 씨의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추가 달린 커다랗고 낡은 시계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시계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성실하게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물끄러미 시계를 바라보던 시계 주인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낡은 시계에 저렇게 무거운 추를 달아놓는 것은 좋지 않아" 그래서 추를 떼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시계는 더 이상 움직이지를 않았습니다. 시계는 좌우로 흔들리는 시계추의 무게 때문에 감아놓았던 태엽이 일정한 속도로 풀리는 원리로 시간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엔가 우리가 지고 가는 짐이 너무나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때때로 직분이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주 앞에 드리는 물질이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마음이 들 때에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내 신앙까지도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또 다른 그릇으로 바뀌어져서 바뀌어진 그가 더 놀라운 하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하고, 복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것은 힘들어도 그것을 감당하려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못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어느 순간엔가 하나님께서 그 있는 것까지도 거두어 가실까 두렵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신앙에는 현상 유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도전하십시오. 시작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의 통솔 하에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많은 부족과 싸워서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열 두 지파가 각기 자기들의 땅을 분할하여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 과제를 성취한 시점이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이제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고, 현상 유지로 만족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시점에 사사기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시점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하느냐, 아니면 후퇴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신앙에는 절대로 현상 유지가 없습니다. 신앙은 마치 언덕 위에 있는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앞으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완전히 밑으로 추락하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아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신앙에는 현상 유지가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때에 전투를 결의합니다. 그들의 전환기를 후퇴의 기회로 삼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서 뚜렷한 성취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현상 유지에 만족하려고 하는 경향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되었다'는 사고 방식이 더 이상의 전진을 막고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맞은 혼돈의 시기에 새로운 도전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늘 혼돈의 시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 여정에서 '이만하면 되었다'는 현상 유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동일하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 열심을 내어야 하나? 생활 가계부가 뻔한데 그렇게 드려야 하나? 이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마음은 사탄이 주는 유혹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나태하고 게으른 마음을 멀리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했지만 유대 땅에서 가장 중요한 한 요새를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섹'입니다. 여기에서 베섹은 후에 사울이 야베스 길르앗을 구원하려고 출전하려할 때에 이스라엘의 전 군사를 집결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아주 좋은 땅이요, 유대 땅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새이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이곳은 분명히 살기에 좋은 땅입니다. 탐이 나는 땅입니다. 그러나 쟁취하기에는 쉽지 않는 요새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살기에는 좋은 땅이지만, 갖고는 싶지만 그 땅을 점령하기에는 많은 어려움과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현상 유지라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합니다. 더 이상의 어려움과 대가를 치루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그만 하자. 이만하면 되었지 않느냐?"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일어납니다.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그곳을 향하여 분연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베섹과의 전투에서 적군 일만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아도니 베섹'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아도니'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베섹의 주인', 다시 말해서 베섹의 왕을 잡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란의 시기에 그냥 현실에 안주하려고 했다면 어쩌면 베섹은 두고두고 골칫거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어났고, 싸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 현상 유지 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있어서 베섹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이루고는 싶은데, 그러자니 치루어야 할 대가가 너무 큰 그것은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대가 없는 성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헌신이 없는 영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은 없고 영광만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분명히 영적 혼란의 시기입니다. 절대적인 믿음도 없고, 절대적인 헌신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보다 분명하게 영적 깃발을 꽂아야 할 것입니다. 갈등과 갈림길에서 내 신앙의 깃발을 보다 분명하게 세우십시오. 그러자면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물으십시오. 그리고 내 신앙을 현실에 안주시키려고 하지 말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꿈과 비전을 향해 도전하십시오.

앞에서 이야기했던 킴 코너스의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폴라를 만난 얼마 후에 두 아들과 함께 성탄절 휴가를 떠났던 사랑하는 아내가 눈썰매장에서 스노모빌에 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틀 후 장례식장에 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폴라가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는 마우스가 달린 모자를 씌운 뒤 컴퓨터를 킴의 앞으로 가져다놓았습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얘기 좀 해요? 킴, 지금 어때요? 아이들은 어때요?" "죽을 맛입니다. 잠도 안 오고, 아이들은 친척집에 있어요. 아이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러고 싶으세요?" 폴라의 이 말에 킴은 말합니다. "어쩌자고요? 아버지까지 죽는 꼴을 보이려고요. 아이들이 이런 꼴이나 보고 살아서는 안돼요"

이 말에 폴라는 키보드를 치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신세타령이나 하실 거라면 날 부르지도 마세요. 애덤과 대런에게 말하세요. 아이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보세요. 당신한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떻게 살아갈지는 선택하기 나름이에요. 다시 말할까요? 당신은 아직 살아있어요. 당신이 두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도 알아요. 하나님은 당신을 그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은 절대 당신을 떠나시지 않아요. 애덤과 대런도 자기 아버지에 대해 똑같이 말할 수 있기를 원치 않나요?"

다음 번 아이들이 왔을 때 킴은 물었습니다. "아빠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마침내 애덤은 킴의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왔고, 대런은 모니터에 바짝 다가가서 실눈을 뜨고 아버지 킴이 입력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아빠도 많은 일들을 장담 못한단다. 하지만 아빠는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빠는 루게릭 병 때문에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다. 억울했던 거야. 하지만 이제야 깨달은 것이 있다. 아프지 않았다면 아빠는 하나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이며, 너희 둘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절대 몰랐을 거야. 아빠는 너희들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너희가 곁에 없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실지 한번 생각해 보렴"

그날 밤 폴라가 와서 킴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눈물이 앞을 가려 키보드가 잘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컴퓨터에 글을 입력합니다. "녀석들이 나를 사랑한대요. 그리고 최대한 빨리 내가 집에 왔으면 좋겠답니다. 내가 필요하다나요."

이 말에 폴라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킴, 이런 말은 처음인 것 같지만 당신이 루게릭 병에 걸려 나도 무척 마음이 아파요. 세상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든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돼요. 하나님께는 당신을 향한 계획이 있어요. 당신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언제나 있었죠.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는 거예요. 그분을 의지해야 해요."

지금 킴은 두 아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매주 하키 시합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관람석에서 보면서 손 대신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응원을 하는 아버지는 세상에서 자신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자랑스럽고, 그들의 앞날에 희망을 품으며, 내 앞날이 어떻게 되던지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다. 하루하루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다. 그렇다. 나는 살아 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향한, 우리들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계획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혼돈의 시기에 영적 깃발을 더 분명히 꽂으십시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더 큰 비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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