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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무엇이 보이느냐 ?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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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신삼철 목사

시작하는 말

하나님께서는 “묵시가 없으면(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것)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29:18)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전을 가진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시대의 히브리 민족들은 모세의 영도 하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비전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계시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비전을 가진 자는 2:10으로 열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비전을 가진 자들이 10:2로 우세가 될 때까지 40년간 기다리셨습니다.

40년간 비전이 없는 자들은 방자히 행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적으로 10번이나 하나님을 도전했고, 모세를 반역했습니다. 결국 가나안의 비전이 없는 자들은 광야에서 죽어 모래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가나안 정복 직전에 르우벤 지파와 갓지파, 므낫세 반지파는 요단강 동편에 자리를 잡고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일시적으로 들어가 가나안 정복을 위해 싸움을 싸워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같이 고생하고, 같이 싸움을 싸웠지만 비전이 있는 지파와  비전이 없는 지파와의 차이는 가나안과 광야, 가나안과 요르단, 천국과 지옥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말씀하신 질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1. 소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네 가지 부류의 인간이 존재합니다. ■영육이 공히 소경인 자 ■육안은 소경이지만 영안이 밝은 자 ■육안은 밝지만 영안이 소경인자 ■육안과 영안이 공히 밝은 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신체적인 소경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은 신체적 장애의 소경이 엄청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자들은 오늘도 앞을 보지 못하고 지팡이 하나를 의존하고, 말 못하는 맹인견에 이끌려, 사랑하는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10:51)고 말씀하셨을 때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막10:51)라고 대답했습니다.

2). 영적인 소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은 눈에 뵈는 게 없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영이 어둡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체적인 눈은 멀쩡하지만 영적인 소경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안이 열리지 않은 자들 말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비전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미래를 내다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시고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바리새인 청년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눈이 멀었던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대단하다고 자부심을 가진 자였습니다.

사울의 눈에는 “뵈는 게”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7집사중 스데반을 돌로쳐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자로서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던 자였습니다.

사울이 교회의 씨를 말리기 위하여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일을 신나게 하고 돌아다녔습니다(행8:3).

사도행전 9장에 가서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9:1-2)고 말씀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열심은 더 무섭습니다. 사울의 열심과 살기등등함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일을 망치고 돌아 다녔습니다.

테베를 정복한 “오이디푸스”왕은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그의 왕비 “이오카스테”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뒤늦게 자신이 죽인 라이오스 왕이 자기 아버지요, 아내로 삼은 여인이 자기 어머니임을 알게 됩니다.

수치를 이기지 못한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친부모도 알아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린 오이디푸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마디는 “오 빛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기이하게 생각했던 신하가 “그 무슨 뜻이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오이디푸스는“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2.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간사에서 만남이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현제와 미래 즉 장래가 달라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고, 어떤 이들은 공자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로아스트를 만났고, 어떤 이들은 마호멭을 만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을 만나 죄를 범함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만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를 만나게 되고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벳새다의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 그 소경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일생을 흑암에 갇혀서 생활하던 소경은 빛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막8:23)라고 말씀하시니 소경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막8:24)라고 대답했습니다.

절반 뜨여진 눈이었습니다. 완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치료가 더 필요한 눈이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오기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이 두려워 엎드려 있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라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주여 뉘시오니이까”(행9:4)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는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졌습니다. 그의 호주머니에 간직했던 대제사장의 공문서가 의미가 없었습니다. 모든 의미와 가차가 달라졌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비늘이 한 껍질 덮어 씌워졌습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백내장 내지는 녹내장이었습니다. 갑자기 주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아서 눈이 잠시 멀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치료를 더 받아야 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의 눈에는 비전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제네바의 쁠렝빨레 광장 옆에 120년 된 예배당이 있습니다. 제네바 시가 문화재로 지정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그 예배당 내부가 술집으로 얼마 전 술집으로 개조되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예배당에 술집을 차린 당사자가 그 교회의 담임목사라는 사실입니다. 기자들의 인터뷰에서 그 목사는 “오늘날 제네바의 젊은이들은 술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술독에 빠진 그들을 교회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예배당 안에 술집을 차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8월이 되면 제네바 축제가 열립니다. 제네바 주 정부가 주민들을 위해 음악회와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를 벌이는 바 지난 축제에는 그 일환으로 “달라이 라마”의 초청 강연이 있었습니다.

강연 날짜는 8월 둘째 주일이었고, 장소는 칼빈이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생피에르 예배당”이었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에큐메니컬 차원에서 “티베트 라마불교”에 관해 “달라이 라마”가 강연을 했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평상시는 교인들이 100여명 정도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날 강의를 듣기 위해 5.000명 이상이 모여 예배당에 2.000명, 밖에서 선채로 스피커로 3.000명가량이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신문은 500년 전 칼빈이 설교를 할 때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고 대서특필했다고 합니다. 제네바는 칼빈의 종교개혁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의 소경에게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사물을 밝히 보는 지라”(막8:25)고 했습니다.

비전은 일장춘몽이 아닙니다. 꿈이 아닙니다. 잘못된 꿈은 망상일 수 있습니다.

비전은 야망도 아닙니다. 야망은 구체적이 행동이 수반되기 때문에 꿈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야망은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야망을 이루면 자기에게는 유익할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는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전은 오늘의 뛰어 넘어 미래를 향한 아름다운 도전입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기 개발과 자기 가꿈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지면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비전은 자신과 타인을 모두 살리는 작용을 합니다.

소경이 예수님의 안수를 받아 고침을 받은 후 그는 만물 뿐 아니라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을, 바리새인들을 확실하게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생전에 환자들을 만나시는 족족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잔칫집에 가셔서는 축복의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장례식 집에 가셔서 조문을 하신적은 없으셨습니다.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를 죽은 자 중에서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 구제 문제로 헬라 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간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곱 집사를 뽑았는데 뽑힌 사람들은 전부 헬라 파에서 뽑혔습니다.

어느 파에서 뽑혔던지 그들 모두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안정이 되었고, 교회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안수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사울이 안수를 받을 때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므로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므로 미래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복음, 소아시아, 유럽, 로마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끝맺는 말 

토인비는 “사울이란 한 청년의 비전은 구라파를 구원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이 질문은 단순히 의미 없는 세상 만물이 보이느냐는 질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꼭 같은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2005년 신년을 맞이하여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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