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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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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한국 신학대학교에서 상담학을 가르치는 정태기 교수의 수상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일본 북해도의 북해 시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북해 시에는 북해정이라는 유명한 우동집이 있다. 섣달 그믐날이면 이 우동집은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섣달 그믐날에 우동을 먹는 것이 일본인들의 풍속이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의 상흔이 아직도 곳곳에 짙게 깔려 있던 어느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오전부터 붐비던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종업원도 다 퇴근한 밤 10시 문 닫을 시간이었다. 북해정 우동집 안으로 누군가가 살며시 문을 밀고 들어왔다. 구호물자인 듯싶은 낡은 검정색 코트를 걸쳐 입은 중년여인과 초등학교 또래의 아이 둘이 머뭇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중년여인이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그맣게 물었다.
“저어, 우동 한 그릇만 주문해도 되나요?”
주인 여자는 그들이 우동을 먹으러 왔다는 사실에 놀라 그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아이들까지 세 사람인데 우동 한 그릇이라니.... 순간 주인 여자의 얼굴에 의미 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주방에 있는 남편을 향하여 소리쳤다.
“우동 한 그릇!”
밖을 내다보던 남편도 얼른 눈치를 채고 커다란 그릇에 우동을 하나 가득 담아서 내보냈다. 세 사람은 한 그릇의 우동을 앞에 놓고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다. 그 가족은 순식간에 우동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몹시 고마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인 여자는 밖까지 따라 나가 그들을 전송해 주었다. 주인 여자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요.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또 한 해가 지나고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북해정 우동집은 이 날도 역시 하루 종일 부산했다. 그리고 밤 10시. 가게 문을 닫으려는 순간에 작년에 왔던 그 중년여인이 아이들을 앞세우고 급하게 들어섰다. 그들은 이번에도 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다. 그들을 기억해낸 주인 여자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주방에 있는 남편을 향해 소리쳤다.
“우동 한 그릇!”
주방에서 밖을 내다보던 그녀의 남편이 빙긋 웃으며 큰 그릇에 우동을 넘치도록 담아 주었다. 맛있게 우동을 먹은 그들 가족은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도 주인 여자가 밖까지 따라 나가서 그들을 전송해 주었다.
“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요,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났다. 섣달 그믐날 밤 10시. 북해정 우동집에 또 그 가족이 찾아왔다. 우동집 주인 내외도 이제는 은근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의 표정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그 중년여인이 두 개의 손가락을 펴 보이며 우동을 주문한 것이다. 어쩐지 목소리에도 힘이 있어 보인다.
“아주머니, 우동 두 그릇이요!”
가득 담긴 두 그릇의 우동을 아이들과 함께 먹던 중년여인과 두 아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주인 내외는 우연히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방의 남편도 주인아줌마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가족은 사업 실패와 가장의 사망으로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래서 그 가족은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이 들었다. 그런데 섣달 그믐날만 되면 아이들이 우동 먹기를 소원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는 가난한 살림에 보태려고 방과 후에는 저녁 내내 신문을 돌리곤 했다. 그런 아이들의 소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섣달 그믐날에도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무리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우동 사 먹을 여유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날을 위해 일 년 내내 푼푼이 돈을 모았다. 그런데도 그 돈은 겨우 우동 한 그릇 값밖에는 되지 못했다. 또한 밤이 늦어서야 각자의 일을 끝낸 그들 가족이 다 모일 수 있었다.
그런 처지인지라, 그들은 밤 늦게서야 우동집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밤거리를 달려오면서 그녀는 우동집이 벌써 문을 닫았으면 어쩌나, 혹시 한 그릇이라고 팔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이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동집 주인 내외는 너무나 친절했다. 한 그릇 값에도 세 사람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우동을 듬뿍 담아 내 주는 주인아저씨와, 밖까지 따라 나와 전송해 주는 안주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다음과 같은 글짓기를 했다고 했다.

“우리는 외로웠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가족뿐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아픔이나 가난에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우동집 아주머니가 우리를 내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너무나 친절했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 세상엔 너희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나도 이다음에 우동집 주인이 되겠습니다. 우동집을 하면서 우리 집에 오는 가난한 손님들을 그 아주머니처럼 반갑게 맞아 주겠습니다.”

이 소년의 글은 일본 열도를 울렸고, 일본 국회를 감동시켰다.

그 다음 해 섣달 그믐날이었다.
우동집 주인은 오전부터 이 식구들이 올 것을 기대했다. 식탁 한 자리에 예약석이라고 써 붙여놓고 기다렸지만 문 닫을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 섣달 그믐날도 주인 내외는 하루 종일 예약석을 비워둔 채 이들을 기다리다 문을 닫았다. 그 다음 해도 또 그 다음 해도 십년이 가깝도록 북해정 우동집에 세 모자를 기다리는 예약석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들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어느 눈 오는 겨울 북해정 우동집에 청년 신사 두 사람과 초로의 여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우동집 주인에게 예전에 베풀어준 우동 한 그릇에 대한 고마움과 주인의 친절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두 아들은 장성해 큰아들은 의사가, 둘째는 은행원이 되어 있었다.

오늘이 세밑이라 이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평가할 때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한 줄 압니다. 하나는 평가의 기준입니다.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어야 거기에 맞게 평가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평가 시점입니다. 어느 정도 기간을 정해 두고 그 기간이 끝났을 때 평가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압니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평가시기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라고 봅니다. 2004년이라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점에서 이 마지막이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큰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2004년도의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까?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평가의 기준과 평가의 시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평가의 시점은 언제입니까? 그것은 “마지막”이라는 의미라고만 볼 수 있는 어느 때입니다. 31-32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이는 낮 동안에 초장에서 풀을 뜯던 양과 염소가 이제 밤이 되어 각각 우리에 들어가서 서로 갈라지게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염소는 양보다도 밤에 더 따뜻한 잠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12월 마지막 날을 제야(除夜)라고 하여 “한 해의 밤”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바로 그러합니다. 이날은 우리들에게 마지막을 의식하게 해 주는 그러한 날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이러한 평가의 시간을 의식해 볼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평가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평가의 기준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이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행한 일들이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오른편에 서 있는 양떼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귀한 평가를 받는 사실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37절에,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뿐만 아니라, 이들의 행동들은 특별한 대상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에 띠는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심판하시는 자는 분명히 말씀해 줍니다.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렇게 평가의 기준은 우리들의 날마다의 평범한 삶에서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의 기준은 양에게 뿐 아니라, 염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평가의 기준은 하나님의 공의에 기준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날마다의 일상생활에서의 무의식적 삶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자 하였을까요? 제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런 뜻에서가 아닐까요? 두 가지 기준에서라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의 평범한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의 영과의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지니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일날만 하나님을 의식한다든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만 하나님을 떠올린다든지 하는 모습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순간순간의 삶을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하는가에 대한 모습이 바로 이러한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일상생활에서의 매일 매일의 무의식적 삶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우리 주위의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식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염소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이들은 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병에 든 사람이 주님이었다면 분명 가 뵈었을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44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세와 믿음과 사랑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적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일상생활에서의 매일 매일의 무의식적 삶에 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신시내티 한인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지난 1년의 여러분들의 매일 매일의 무의식적 삶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은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질문의 예상 문제입니다. 아마 오른편의 양의 모습에 속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다가오는 새해에도 이러한 모습이 더욱 확대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바로 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저희들에게 2004년도를 허락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2004년도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머리 숙였습니다.
저희들의 삶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신 사실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의 저희들의 삶을 평가하시어, 저희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이
더 나은 모습으로 새해를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지난 1년을 살아오면서 날마다의 삶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모든 모습들이 하나님의 귀하신 손길을 통하여 아름답고 선한 열매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들이 미처 행하지 못한 모습들을 깨우쳐 주셔서, 새해에는 더욱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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