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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원하는 심령의 회복 (시 5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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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재신 목사
 
  전에 교회가 전북대 앞에 있을 때 ROTC라고 하는 장교 후보생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대학생이지만 학교 생활하면서 나중에 장교로 가기 위해 군사훈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멋있는 제복을 입고 반짝반짝 빛나도록 구두를 닦고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길을 가다가 고참을 만나면 차렸 자세를 하고 큰소리로 구령을 붙이며 깍듯이 경례를 합니다. 멋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예절이 바르고 신사 같다 할지라도, 전쟁터에 나가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없는 한 그는 군인이 아니요, 장교가 아닙니다
  문제는 군인으로서 예절도 중요하고 절도 있는 몸가짐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전쟁이 났을 때에 얼마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군인 정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복만 입었다고 군인이 아니라 군인에게는 군인 정신이 있어야 진정한 군인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만 다닌다고 교인이 아닙니다. 진정한 교인 정신 즉 성도 정신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로 2:28-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렇습니다.
  진정한 성도의 정신이 있어야 참 성도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참 된 정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정신입니다. 

  성도의 정신은 주님께 향한 헌신의 정신입니다. 
  시 110: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이란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 권능의 홀을 우리에게 베풀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만왕의 왕으로 통치에 오르신 날입니다. 이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한다고 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성령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 거룩한 옷을 입은 주의 백성들은 즐거이 헌신하는 백성입니다.

  헌신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헌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물질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물질을 드리든 제물을 드리든 그것은 자원하는 것이여야 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도 마음이 감동 된 자와 자원하는 자가 성막을 짓기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그리고 성막에서 쓸 기물들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출35:21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 ”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예물이었고 자원하는 헌신이었다.
  나중에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일하던 일군들이 감당치 못하게 되어 모세가 그만 가져오라고 광고했을 정도였습니다. 출36:3-6에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정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원하는 헌신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16: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칠칠절에 헌물을 드리라고 명령하면서 어디까지나 자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못 박는 것입니다. 명령 앞에 자원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헌신은 자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원한 헌신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자원하는 헌신이 왜 없어질까요?

  ① 죄가 있으면 자원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왜 쫓겨나야 했습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성도들이 남모르는 죄를 범하면 믿음이 병듭니다. 교회가 등한이 되어집니다. 출석률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리고 짜증스럽고 말씀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 누구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 업드려져서 회개하여야합니다.
  죄가 있으면 은혜가 떨어지고 믿음이 식어지고 주를 향한 사랑이 식어지며 헌신하는 마음도 식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노래를 부르는 중에 시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면 자원하는 심령이 생깁니다.

  ② 주님과 멀어지면 자원하는 심령이 없어집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 라고 했습니다.
  주님께 쫓겨나는 것은 주님과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간적으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집니다. 결국 자원하는 심령도 식어집니다.
  성도는 생활 전체가 주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만 주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중에도 우리가 주의 백성이지만 내가 잠잘 때에 주님의 백성이며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얼마나 주님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곰곰이 눈을 감고 생각해 봅시다. 나의 오늘 삶에서 주님의 비중이 얼마나 차지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주님은 안중에도 없이 안하무인격으로 나 혼자 판단하고 생각하며 주님의 비위를 거스리며 살지는 아니했습니까?
 
  옛날 헬라의 도시 국가에 아주 부강한 왕이 하나 있었습니다. 많은 처첩들이 거느리고 있었고 그 처첩들은 모두 자기가 왕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왕이 여인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아 놓고 “나라와 왕권만 빼놓고 내게 있는 아름답고 진기한 보물들을 원하는 대로 모두 선물로 주겠다” 고 했습니다.
  그랬던 여인들의 눈이 다 뒤집혔습니다.
  왕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서로 갖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야단이었습니다.
  왕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좋이에 적어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아무것도 달라는 것이 없었읍니다. 왕은 그 여인에게 “너는 왜 원하는 것이 없느냐? 욕심도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인은 “아니, 있습니다. 저는 이 나라의 금, 은 보석이 아무리 귀하고 값지다 할지라도 그것들 보다 더 값지고 아름다운 것을 갖고 싶습니다. 왕이 궁금해 하면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인은 “페하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주님을 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너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원하고 그분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생활 속에서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세요. 그것이 바로 헌신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③ 성령 떠나면 자원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성령은 신앙생활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성령으로 해야 합니다.  갈 5:2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모든 일에 열심이 생기고 자원하는 열심이 생깁니다. 
  성령이 없으면 마음도 메말라지고 인색해지며 옹졸해집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알콜 중독자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술집 앞을 지나가면서 윈도우에 진열된 술병들을 보았을 때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반대편 윈도우에 간판 글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25센트만 내고 마음 대로 마실 수 있는 우유
  즉시 그 우유상점에 뛰어들어가 양껏 마셨습니다. 그가 밀크 집을 나와 술집을 지나쳤을 때 더 이상 유혹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유를 실켯 마셨기 때문에 술이 따로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령과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진다면 세상의 것들이 당신의 마음과 생활에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됩니다. 당신의 생활에 빈 자리가 없게 하여 사탄이 그 자신의 목적대로 사용할수 없게 하십싣오.
  여러분의 속은 무엇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성령으로 가득차 있으면 자원하는 심령이 생깁니다.

  2. 자원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원하는 헌신에 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에게 헌금 드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없어서 여러분을 불러 일군으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는 여러분이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앉히지 않고 나보고 그곳에 서서 헌신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응답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헌신자에게 주시는 복은 인간이 셀 수 없는 정도의 것이였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헌신을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드렸던 소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한 인도의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구걸그릇에 사람들이 지나며 쌀 얼마를 놓아주고 가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겨우 연명해 나갔습니다. 가끔 동전을 쥐어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거지는 큰 행렬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꼭 왕자님의 행렬 같은데 그거 참 잘 됐다. 틀림없이 내게 금화를 주실 거야” 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행렬의 주인공은 거지가 생각했던 대로 왕자였고, 왕자는 빈 그릇을 들고 서 있는 거지 앞에 오자 멈추었습니다. 
  뜻 밖에도 왕자는 “네 그릇에 있는 그 쌀을 나에게 다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지는 실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어떻게 왕자가 거지에게 도와달라고 한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고는 마지못해서 깡통에서 쌀 세 톨을 꺼내어 왕자에게 주었습니다.
  왕자는 쌀 세 톨을 신하가 들고 있는 긴 자루 속에 손을 넣고 그 자루에서 금으로 만든 동전 세 개를 꺼내 그 거지의 깡통에 던져주었습니다. 거지는 이 금화를 보자 금방 후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왜 깡통에 있는 쌀 전체를 드리지 않았담!” 하고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향해 헌신합시다. 헌신하는 사람을 이같이 도우십니다.
 
  젊은 부인 한 사람이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 부인은 자기의 생활을 완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인 그녀는 하나님께 헌신하길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지에 선교사로 보내실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사도행전 10:14을 펴서 읽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리고 목사님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라는 베드로의 말이 얼마나 모순 되는 말인지를 설명했습니다.
  주님 향해 주여라는 말을 하지 말던지 주님을 주인이라고 불렀으면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럴 수 없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속마음은 아직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일수밖에 아닌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녀에게  “그럴 수 없나이다”를 지우든지 또는 “주여”를 지우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주님”이란 말을 제외하고 다른 글을 지웠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이라고 고백을 말든지 헌신을 하든지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몸이든 마음이든 물질이든 온전히 헌신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 참다운 헌신을 드리지 못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대의 영리한 설교가는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건드리지 않는다. 호주머니를 건드리면 스트레스를 받고 갈등이 생기면서 인상을 찌푸리므로 그 얼굴을 보기 싫거들랑 호주머니를 건들지 말라”
  침례교단에서는 물속에 몸 전체를 잠그는 침례를 행합니다.
  한 목사님이 교인들을 데리고 강에 가서 침례를 하는데 어느 여성도 한 분이 갑자기 “아이고 목사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는 거예요. 목사님은 왜그러느냐고 했더니 그 여성도가 말하기를 “제 호주머니에 돈 지갑이 있는데 돈 지갑을 내놓고 오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뭐라고 했게요?
  저 같으면 그러시라고 하고 지갑을 꺼내놓고 올때 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안됩니다. 당신은 몸만 침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침례를 받아야 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물 흘리며 사랑을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인색한 사람은 결국 마음의 헌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 6: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로 예배를 드리는 자는 물질을 아낌없이 바치는 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어린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부모를 의존하여 살아갑니다. 모든 앉고 일어서고 먹고 잠자는 것 까지 엄마나 아빠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도 또 용돈을 타갑니다. 마치 직장에서 월급을 받듯이 꼬박 꼬박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장성하여 제가 직장생활을 하면 이제는 부모에게 용돈을 드립니다.
  부모가 늙으면 장성한 자식은 부모의 보호자가 됩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효도를 다합니다. 이것이 장성한 자식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전히 똥 싸놓고 앉아서 엄마를 부르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작은 문제에만 하나님을 부르는 어린아이 신자가 되렵니까? 아니면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안고 있는 문제를 내 문제로 알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도구가 되시렵니까? 주의 일에 즐거이 헌신하는 백성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많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불신자들에 어떻게 하면 칭송들을 수 있는 자신이 되고 교회가 될까를 생각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인 땅 끝까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까 고민해 봅시다. 우리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헌신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삿 5:2절과 5:9절에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영광받으신 하나님께서 즐거이 자원하는 심령이 되어 즐거이 헌신한 자에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시 110:3절의 말씀처럼  주님의 날에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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