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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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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광일 목사 (벧엘감리교회)

헨리 콤 스톡이란 부자가 있었습니다.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쓸모가 없는 나무가 많은 작은 산을 만 달러에 매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몇 개월도 안되어 그가 매매한 산에서 최대규모의 금광이 발견되어 무려 5억달러이상 금이 매장된 사실을 알고는 땅을 치면서 후회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한탄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똑같은 시대에 연구실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200만달러의 재산이 화재로 타버려 허망해 하는 67세 노인이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힘을 잃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낡은 건물과 시설에 연연하는 내 좁은 소견을 깨우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청소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새것을 주시기 위한 방법이랍니다." 그는 바로 토마스 에디슨 이였습니다. 결국 에디슨은 이 화재로 인해 더 훌륭한 연구실을 가지게 되었고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나 경험을 보나 부딪치는 문제보다 사람 자체가 훨씬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일을 할 때에는 좋은 동역자를 만나야 일하기 쉽습니다. 준비가 다 되어 있어도 함께 일할 사람과 손발이 맞지 않으면 그 일은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본문에서 자신들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라고 말합니다. '함께 일하는 자' 의 헬라어 원어는 '쉬네르 군테스' 로서 '하나님의 일에 관계된 사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이라는 현재분사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현재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동역자를 의미합니다. 오늘 세워지는 임원들은 현재 하나님의 일에 관계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임명받는 임원들은 이후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사람과 관계된 일꾼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나치정권 당시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인 디트리히 본훼퍼는 '제자의 대가' 라는 그의 저서에서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노점상의 물건들처럼 아무 데서나 마구 남용되는 은혜를 말합니다. 현대 교회의 값싼 은혜는 회개가 없는 용서의 설교요, 교회의 교육이 없는 세례요, 참회가 없는 성찬식이요, 개인적인 고백이 없는 사면과도 같습니다. 값싼 은혜는 사도 정신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값진 은혜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습니다. 값진 은혜를 얻기 위해 자기가 지닌 세상적인 많은 것들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것은 상인이 자기에게 있는 모든 물건을 다 팔아 엄청난 값의 진주를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는 값싼 물건으로 무상으로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 은혜의 대가를 예수께서 죽음으로 대신 지불해 주셨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값비싸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간직하기 위해 반드시 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받는 은혜는 헛된 은혜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소아시아 성지순례하며 들은 이야기입니다. 중동의 회교도들은 일년 중에 '라마단' 이라는 특별한 금식 기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해 뜨고 부터 해질 때까지 일체 금식합니다. 그런데 해가 지면 밤새도록 먹고 마시기 때문에 이 기간에 가장 살이 많이 찐다고 합니다. 낮과 밤만 바꾼 것뿐이지 실제로 금식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주일날 한 시간 예배드리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서는 언제 은혜 받았느냐는 식으로 여전히 옛사람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면 헛된 라마단 금식을 하는 회교도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헛되이' 의 원어는 '에이스 케논'으로 '비어있는, 공허한' 의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도무지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공허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언제나 파당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음행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받은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공허한 신앙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은헤 받은 사람은 반드시 구별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나 중심이라면 은혜를 헛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지금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나의 성공이라면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바 은혜를 끝까지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함으로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일해나가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누구에게도 거리끼지 말아야 합니다

무적 군함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불빛이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군함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무적함대를 몰라보고 정면도전하는 상대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무전을 칩니다. "만일 계속 돌진하면 받아버리겠다". 상대편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당신들이 피하라". 어이없는 군함은 "너는 어디 소속이며 무슨 배냐?" 고 물었습니다. 상대편에서 "나는 등대다. 그러니 네가 피하라"고 답신이 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군함은 등대를 피해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정면돌파가 항상 능사만은 아닙니다. 상대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바뀌면 됩니다. 환경을 변화 시키려하지 말고 나를 변화 시켜야 합니다. 실천신학자 투루나이젠은 젊은 시절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세계를 바꾸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세계가 전혀 변화되지 않더랍니다. 그런데 나이 마흔이 넘어서 "하나님 저를 바꿔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고 자신을 바꾸었더니 세상이 달라지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후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세계를 바꾸려하지 말고 나를 바꾸려고 했다면 나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꾸려고 합니다. 내 목표를 먼저 세우고 하나님보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나를 바꾸려하지 않고 말씀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잘 안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씀을 부인합니다. 마치 군함이 등대를 향해 비키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거리끼는 존재가 됩니다. 남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누구에게나 거리끼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거리끼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코펜'은 거슬려 부딪히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격적인 문제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헛되이 받은 사람은 마귀에게 쓰임을 받아 거리끼는 자가 되고 만듭니다. 사람이 보기 싫어서 교회 나오고 싶지 않게 만듭니다. 그 사람만 보면 은혜가 되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은 다른 사람도 바로 세우게 됩니다.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당신 때문에 힘을 얻고, 당신 때문에 위로 받고, 당신 때문에 용기 얻으며, 당신 때문에 신바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거리끼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세무서원이 어느 목사님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세금을 매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무서원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목사님은 선뜻 대답하셨습니다. "예, 우리는 엄청 나게 부유합니다." 세무서원은 잔뜩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되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 저는 우선 하늘 나라에 영원토록 살아갈 좋은 스카이 맨션 한 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자상한 아내가 있고, 의좋게 살아가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거기다 오늘밤에 아무 걱정 없이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는 장소도 있습니다." 세무세원은 더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이 목사님의 말씀을 가로막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엄청난 부자네요. 그러나 세금은 매길 것이 없겠습니다." 고 말하면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가졌는지 적게 가졌는지 거기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비록 내가 적게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만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깨달음이 있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영적인 것에 모든 사고와 행동의 초점을 맞춘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고 살았던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후에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를 떠받쳐 주던 세상의 모든 지위와 명예와 재물을 다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노라고 역설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주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문제는 가치관의 문제이며, 결단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붙잡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잡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치 판단이 분명해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임원들이 하나님 앞에 취임하는 주일입니다. 부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임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판단에 예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지에 관심을 가지고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한결같은 믿음으로 사람과 함께 일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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