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 희망을 이야기 합시다 (합 3:17~18)

  • 잡초 잡초
  • 290
  • 0

첨부 1


- 설교자 : 박봉수 목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상자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이 희망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판도라는 저 하늘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여자입니다. 그 이름 그대로 모든 선물을 다 받아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지상으로 보내져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남편 에피메테우스는 신들에게 받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들은 절대로 그 상자를 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판도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때 상자 속에서 질병, 고통, 슬픔, 재난, 가난, 전쟁...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놀라서 재빨리 상자를 닫았습니다. 이미 이런 것들은 다 지상 곳곳으로 흩어져 버리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질병, 고통, 슬픔, 전쟁... 이런 것들로 넘쳐나고 희망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간사에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기에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질병, 전쟁, 가난, 재난, 각종 사고... 이런 것들 하나하나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희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희망만 있다면 다른 것은 다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리고 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1. 희망을 이야기 합시다

  오늘 우리 현실은 사실 암담합니다. 특히 경제적 측면이 그렇습니다. 최악의 내수침체, 유가 급등, 환율 하락, 수출 둔화, 등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악재들이 겹치면서 정말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청년 실업자가 넘쳐나고 있고, 극심한 경제난 속에 소규모 식당 주인들이 ‘솥뚜껑’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모습까지 연출됐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치는 끝없는 갈등과 대립 속에 마치 식물인간처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는 북한 핵문제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공전만 거듭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노사 갈등과 각 이익단체들의 제 몫 챙기기에 볼모로 잡혀 생산적인 상생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2005년 경제 전망도 “시계 0”라는 것입니다. 경제 성장률이 작년보다 더 낮아져서 자칫 실업 대란이 올 가능성도 있고, 경제 활력이 떨어져 빈부격차는 더욱 커져만 가게 될 것이랍니다. 얼마 전 대구에서 영세민 부부의 5살짜리 아들이 영양실조로 숨진 채 발견되는 딱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디 희망을 찾아볼 구석이 한 곳도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둘러 봐도 염려하는 소리만 들리고, 한숨소리만 땅이 꺼져라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절망의 노래를 불러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 한 토막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지금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합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 소출이 없고, 밭에 있어야 할 작물들이 없고, 우리와 외양간에 가축이 없습니다. 농부에게 절망 바로 그것입니다. 한숨과 절망의 노래를 불러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3: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믿음이고, 둘째가 희망이고, 그리고 셋째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희망을 꼽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주목해야 할 말씀은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세 가지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항상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있어야 하고, 희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본문 속에 하박국 선지자가 그렇습니다. 과수원에 열매가 달리지 않아 소출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희망 때문이죠. 밭에 거둬들일 작물이 없는데도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희망 때문이죠. 우리에 있어야 할 가축이 없는데도 노래를 부릅니다. 희망 때문이죠.

  우리에게 희망이 항상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 희망이 습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하게 되었답니다.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사막은 불덩어리같이 뜨거웠고 갈 길은 멀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아버지, 목이 마르고 지쳐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애야, 그렇지만 끝까지 가보아야 하지 않겠니? 얼마 안 가서 사람이 사는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타고 가던 낙타도 허덕이며 곧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 두 사람은 무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저것 보세요! 저 사람도 우리처럼 지쳐서 마침내 죽고 말았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니란다,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곧 희망이 있다는 거란다.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곳에는 무덤도 없는 거니까.”

과연 두 사람은 가까운 곳에서 마을을 발견하여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습관처럼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늘 빛을 좋아하고, 밝은 곳을 보고, 빛을 노래합니다.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 사고를 갖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있습니다. 밝은 곳에서는 물론 밝은 곳을 봅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곳을 보려고 애씁니다.

  둘째로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전에 제인 구달이라는 분이 쓴 [희망의 이유]라는 책을 본 일이 있습니다. 동물 행동학의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그러나 생물학 분야보다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다양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영웅 없는 시대의 진정한 영웅”,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열 명의 여성 중 한 명” 등 높이 평가를 받는 분입니다.

  이분은 이 [희망의 이유]라는 책에서 환경 파괴, 불평등, 대량학살, 전쟁, 테러, 천재지변... 등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나름대로 연구한 내용을 기초로 우리가 아직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를 네 가지로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명석한 두뇌가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둘째, 적절한 도움을 주면 되살아나는 자연의 놀라운 회복력 때문에 희망이 있다. 셋째, 전 세계 젊은이들의 새로운 시각과 열정, 그리고 에너지 때문에 희망이 있다. 그리고 넷째, 절망적 상황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이 있어서 희망이 있다.

  물론 저는 그 이유들에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이분의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명의 빛줄기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얼키고 설켜 있는 실타래 속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주 안에서 희망을 이야기합시다.

  오늘 본문 18절에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라고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걷던 베드로가 불어오는 바람과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절망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세상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봤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바라봐도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자신을 바라봤다면 그렇게 용감하게 골리앗 앞으로 달려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초라하고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에게 절망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호와를 바라봤을 때 그는 용감하게 달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 보다 훨씬 큰 능력의 주님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14:8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희망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인은 시 39:7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희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또 다른 시인은 시 146:5에서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주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만 진정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온다고 해도 우리가 주 안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희망이 주께 있다고 할 때 희망의 근거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롬 4: 17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아브라함이 도무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나이 100세에 자기 몸이 거의 죽은 자의 몸과 같은 상황이고 아내도 그 자궁이나 여성으로서의 기능이 다 죽은 것 같은 상황인데 아들을 주실 것을 희망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희망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속에서만 우리의 희망이 더욱 굳건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망을 잃어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십시오. 희망이 흔들립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둘째, 기도 때문입니다.

  대하 20장을 보면 남왕국 여호사밧 왕 때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들어온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당시 유다로서는 저들을 상대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이 먼저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백성들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 명을 따라 유다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여호사밧 왕과 함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립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사밧이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주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15절을 보면 회중 가운데 레위 사람 아하시엘을 통해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여호사밧 왕이 몸을 굽혀 그 말씀을 받고 경배하고 하나님께 크게 찬양을 드렸습니다. 저들이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 희망을 찾은 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희망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절망 중에 기도할 때 주님께서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적 상황이 여러분 앞으로 밀려옵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가닥 희망마저 희미해져갑니까?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기도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그 만남을 통해서 희망이 다시 굳건해 질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스웨덴의 가스펠 가수 레나 마리아의 찬양 My life라는 곡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1968년 두 팔도 없이 한 쪽 다리만 온전한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찬양으로 그의 고난을 딛고 살아가는 감동적인 삶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는 책을 보면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여긴 적인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장애가 믿음과 더불어 오늘날 자신을 있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희망을 찾게 되면 그 희망은 열악한 우리의 현실을 축복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주 안에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렵더라도 우리 희망을 이야기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