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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행(善行)의 기준(基準)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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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봉원 목사

I. 나의 선행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계명,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이 율법의 완성적인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항상 사람과 상대하면서 주님을 상대하는 연습을 하면서 우리의 인격이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자라가도록 그렇게 하나님은 만들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잊어 버리고 사람을 사람으로만 상대하다 보니 많은 실수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지 못하고 죄를 지을 때가 많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섭섭하게 만드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나는 많은 각도로 살펴볼 내용이 있지만 이 시간에는 선행의 기준에 대해서만 살펴 봄으로 우리의 선행의 기준이 바로 되었다면 계속 인내로서 실행해야 할 것이며, 그 기준이 잘못되었다면 그 기준을 고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정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행을 베푸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선행의 기준에 있어서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겠지만 세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선행을 하는 것, 그 다음은 상대방과 상관 없이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하여 선행을 베푸는 것, 마지막으로는 상대방과 나와의 의사와 상관 없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믿음으로 선행을 베푸는 것 이 세단계로 살펴 보고자 한다.

II. 삼단계의 선행의 기준

i.  상대방에 따른 선행

먼저 이 기준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많은 선행의 기준이 아닌가 생각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한 행동의 모습이 달라 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이 나에게 잘 해 주면 나도 잘 해 주고 상대방이 나에게 해를 끼치면(사기를 쳤거나, 물심양면으로 괴롭혔을 때) 나도 그에게 우리 말에 “너는 국물도 없어”라는 말처럼 아주 냉정하게 선을 그어서 대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또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 주면 나도 그에게 잘 해 줌으로 서로 장단이 맞아서 잘 어울리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끼리끼리 모이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은 가장 초보적인 선행의 기준이며 하나님의 기준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쉽게 발 견할 수 있다. 선악간에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잘 놀고 있네”라고 평가를 내리시게 될 것이다.

ii.  자기 중심적인 기준

앞의 예보다 조금 나은 것은 이제 상대방의 여하에 상관 없이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하여서 선해을 베푸는 것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의 대표적인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상대하는 모습이며, 스승이 제자들에게 상대하는 모습에서 발견 할 수 있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들의 증거를 반대하고 욕하는 자들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고 웃음으로 상대하는 모습 등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기준에 따라서 선행을 베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을 보는 자의 시선은 상당히 좋게 평가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준도 곰곰히 따져 보면 이것은 아주 고등악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책망 하셨는데 선악의 기준이 자기가 되어 있는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났던 기준의 선행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 중심적인, 성령의 인도를 따른 믿음의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더라도, 얼마나 많은 기간 동안 선행을 베풀었더라도 우리 하나님께는 책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심판을 통과 하지 못하는 것이다.

iii.  믿음으로 하는 선행

그러면 마지막으로 살펴 볼 기준은 앞의 두 가지 예와 같은 기준이 아니라 이제는 어떤 사람, 어떤 형편을 만나든지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믿음으로 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의 대표자는 예수님이며, 다니엘이 왕에게 대해서 상대한 것,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한 것, 아브라함이 롯을 상대할 때 선택한 기준이었으며, 스데반이 사울을 상대한 기준이었고, 바울이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에게 대한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 기준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눈물을 하염 없이 흘리면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상대방 구원을 위해서 물질적인 손해를 많이 보고도 용서와 사랑으로 용납하며 가야 하는 길이며, 목숨까지도 내어 놓지 않고는 걸어 갈 수 없는 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대속을 생각하고 그 분이 우리를 최종적으로 주님을 닮은 모습의 사람으로 양육시키고자 하는 그 훈련 과정, 연단 과정이라면 상대방을 사랑하는 그 일을 위해서는 물질, 일, 시간, 몸, 마음만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도 마땅하다 하고 즐거운 마음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길이며, 능히 갈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목표는 여기까지 성장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이 시간도 걸어 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이 걸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길이며, 외부적으로는 십자가의 길처럼 보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형통한 길인 것이다. 요셉이 이 걸음을 걸었을 때에 요셉 때문에 보디발 집, 감옥, 애굽 전체, 야곱의 가정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지 않은가?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천하 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누릴 것이라는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포기 하고 간다면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외치라 할 때(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요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대리 사랑) 그길을 외면하고 자기 갈 길로 갔을 때 요나 때문에 그 배에 탔던 물건을 다 바다에 집어 던지게 되었고, 그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 믿음의 길을 걷지 않으면 그 성도 때문에 그와 함께 배를 타고 가는 모든 자들이 물질적인 손해, 신앙적인 손해, 생명의 손해를 보게 될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III. 믿음의 기준을 가지자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시간 이후로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지 상관 하지 말고, 나에게 찾아 오셔서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성령이 우리의 능동이 되고, 우리는 그게 피동이 되는 이 믿음의 길을 즉 믿음의 선행 기준을 가지고 마음, 힘, 뜻, 목숨까지 기울여서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을 실천하다 나그네 인생을 순생과 순교로 마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악의 기준으로 살아 가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끊임 없이 성경 읽고, 기도하여 자세히 주의하여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순종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머지 의식주와 모든 우리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더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승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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