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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에서 가장 먼저 할 일 (마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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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2004년도는 벽두부터 국내외적으로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대통령이 탄핵된 일과 그로 인한 국민 갈등, 이라크 무장단체에 피납된 김선일 씨 참수사건,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IMF를 무색케 할 정도의 경제 불황, 그리고 연말에 일어난 인도네시아 지진과 쓰나미 해일로 인한 처참한 재앙 등, 지난해는 무척이나 소란하고 살벌한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이 횡횡하는 가운데서도 우리 모두 한 해를 무사히 보내고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날개 아래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새 해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무슨 말씀을 선포하면 좋을까 기도하던 중에 방금 봉독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의 이 말씀 속에는 “인생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지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신약의 계시록과 함께 묵시서에 속합니다. 이 책에는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 하나가,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는 것은 할 일이 많고 바쁘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더하리라는 것은 현대의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문명이 발달하면 생활에 여유가 생길 줄 알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문명의 이기가 발달할수록 생활은 더 바빠집니다.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바쁜 것이 현대의 특징입니다. 저마다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쉴 줄을 모릅니다. 아니, 쉴 틈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끝없는 경쟁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솔로몬의 말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은 밤에도 쉬지 못합니다(전 2:23). 할 일이 많고 바쁘다보니, 자칫 삶의 우선순위를 흐트러뜨릴 염려가 있습니다. 실재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나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각 사람이 제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삶의 원칙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바쁠수록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을 위한 일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육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이 가장 바람직한 순서입니다. 영혼은 은혜가 고갈되어 빈사 상태에 있는데 범사가 잘되고 육신에 힘이 넘치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축복은커녕 저주에 불과합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쾌락위주로 살았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고 하셨습니다. 육체가 되었다 함은, 이성이 없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난 한 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얼마나 관심을 가졌습니까? 하루 24시간 동안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는지 시분별로 종이에 적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열흘이나 한 달 동안 해 볼 것도 없이 하루나 이틀만 적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하루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 동안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사용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처럼 되면 안 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부요에 도취되어 자기들의 영혼의 실상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많다고 영적으로도 부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영적 부요를 살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경고하시기를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의 권면도 잊지 아니하셨습니다.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께서 새해에는 지난해 보다 한층 더 영적인 일에 힘쓰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재로 할 일이 많고 바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그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서 한적한 곳에 가사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주님을 본받아서 바쁠수록 기도생활에 힘쓰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영혼을 위한 것이 삶의 우선순위 가운데 첫 번째라는 사실을.

어떤 사람이 젊어서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하루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그날 이후로 그의 형편이 놀랄 정도로 펴졌습니다.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큰 집도 짓고 결혼도 해서 자식들도 낳았습니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편치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차라리 그 날부터 더 가난해 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터인데” 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떠났는데도 만사형통하다면 결코 축복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성경은 경제적인 부요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족장들은 하나같이 거부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요가 곧 우리의 부요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진리를 알았기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장)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축복에 대한 약속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누구나 성경에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조건은 하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뿐 아니라,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명령을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다 같은 신앙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차원은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면 왠지 벌 받을 것 같아서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참석합니다. 그러니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야말로 성전 마당만 밟고 다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다음은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는 이기적인 신앙행태로서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무속적 기복신앙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상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행동은 어느 것 하나 사랑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의 동기로 행하십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로 10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로마서 5장 7절로 8절에는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 받을 무슨 자격이나 아름다움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이와 같은 사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나 경험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무조건적이고 기이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놀랍게도 저와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간에도 사랑 이외의 방법으로 사랑을 갚으려는 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응답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사랑을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이는 빚을 갚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을 다 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새해에 무슨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여러분의 계획서의 맨 첫 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써넣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올 해 성도님들의 가장 큰 관심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께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리할 때 한 해의 단추를 바른 순서로 끼는 것이 됩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일개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끈질기게 쫓아다녔으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머리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8편에서 그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150편이나 되는 시편 가운데 다윗이 지은 것이 절반을 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셔서 모든 대적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는 이같이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 18:) 할렐루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을 누가 감히 해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 91편에 “14)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15)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우리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도의 가장 위대한 기능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사랑을 나타내는 최상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이르기를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힘씁니다. 만일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말씀은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의 사랑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상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군요.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지키겠습니다.” 이런 말이 합당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신 동기가 순전히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 고귀하신 생명을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나를 대신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줄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한 평생 살면서 농담으로라도 "당신을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치겠오“ 라고 말하기를 주저합니다. 절친한 친구에게도, 아내나 남편에게도 이런 말은 쉽게 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실지로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버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어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신 대로, 즐거이 그 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한다면 이는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상대적인 사랑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족보다, 취미보다, 재물보다, 명예보다, 심지어는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모든 신령한 은혜를 생각할 때 모든 것에 우선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지나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에 가족이나 이웃을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새해 첫날 첫 시간에, 우리가 다 같이 다짐할 것은 올해는 기필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많은 제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큰일을 이룩하기를 요구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피워 놓으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서 나누어 주시는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로 주님을 뵐 낯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말없이 조반을 먹었습니다.

조반 먹은 후에,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두 번째 질문도, 세 번째 질문도 똑같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질문에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대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나자 시몬 베드로의 상처 입었던 영혼이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날 아침, 주님께서는 시몬을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시며 새로이 사도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데 부족한 점이 있었음을 이 시간 솔직하게 주님께 고백합시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처럼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진실한 사랑을 주님께 고백하십시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먼저 할 일,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인정합시다.

세상 사람들은 해돋이를 하러 산으로 바다로 가지만, 성도님들께서는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뵙기 위해 이 자리에 참여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새해를 시작하는 것처럼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삶 속에 2005년 한 해 내내 하나님의 사랑과 복주심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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