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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⑩ -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약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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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재 목사

우리들 개인의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하여 야고보가 또 하나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판단과 비방을 중지하라는 멧세지입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신약 성경에 누누이 강조되어 나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고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사도 바울도 명확하게 선포했고 판단이라는 단어를 조회하면 신약성경에만 144번이나 나옵니다.

이렇게 성경에 많이 언급된 것을 보면, 판단과 비방은 사람이 갖는 고질병이라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도 습관적인 죄악임을 반증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판단은 뭐고 비방은 무엇입니까? 언어로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아도 마음에 대충 알고 있겠지만, 판단하지 말라는 멧세지가 아무런 분별도 하려고 하지 마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마라, 맹하니 살아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판단은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단정하는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비방은 그 판단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된 것, 그래서 다른 사람을 헐뜯고 정죄하는 말을 말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방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아래로(down)’라는 단어와 ‘말하다’라는 단어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비방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에서 아래서 내려보듯이 말하는 것이고 판단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듯이 생각하는 것이 판단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단정적 생각

예) “목사님은 B형 남자야, 쟤는 소양인야,”  왜 애들이 한 두 번 그런 것을 가지고 “너는 왜 항상 그 모양이니?” 이렇게 부분적인 부정을 가지고 전체를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판단이라고 합니다. 

예) 내가 그냥 “척 하면 삼천리 아니냐” “야 야 뻔하다 뻔해. 하나를 보면 열을 알아야지” 이렇게 쉽게 단정하는 태도가 판단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26:22>.

다른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 그를 판단하는 말을 할 때에 여러분도 귀가 쫑긋하지요? 말이 끝나는 것을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맞장구를 쳐야 할 지경이지요?

인간이 간사한 것은 다른 사람 판단하기는 무척이나 좋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판단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비방하는 혀를 '삼중의 혀'(three tongue), 삼겹살이 아니라  ‘삼겹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비방의 말은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삼중의 혀라고 합니다. 비방의 대상을 죽이고, 비방의 말을 하는 사람을 죽이고, 비방의 말을 듣는 사람을 죽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하여, 남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습관을 버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덕목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하여 또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속한 공동체, 교회, 직장, 가정를 살만한, 살맛나는 사회를 세우기 위하여는 남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안됩니까?  또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습니까? 오늘 제가 다섯 가지 지혜의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당신 자신에게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기를 좋아합니까? 단순히 별식을 먹는 것같은 묘한 쾌감이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뿌리가 깊습니다. 판단과 비방을 밥먹듯 일삼는 정치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경우, 자기 방어적이거나 자기 PR적일 때 사람은 남을 판단, 비방합니다. 사람은 판단의 근원은 내 중심으로 구분하는, 선악과의 죄에 있습니다.

  사람이 남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경멸함으로써, 헐뜯음으로써 자신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말함으로써, 내 자신이 옳다고 여겨지는 느낌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기억해 보십시오. 바리새인이 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저 세리는...뭐도 안하고 뭐도 안하고...등등” 세리를 마구 깍아 내립니까? “나는 이만큼 괜찮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제가 옳지 않습니까? 제 손을 들어 주십시오” 이 마음 때문이지요?

학교에 가면, 학생들 중에 꼭 교수를 달아보는 학생들이 한 두 명 있습니다. 이상한 질문을 만들어서 교수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있곤 합니다. 여러분 이 학생들이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 좀 봐 달라는 것이지요? 자기 똑똑한 것 좀 알아주라고 그러는 것이지요? 자기 좀 인정해 달라고 그러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학생이 이렇게 나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어리석은 동료 학생들은 저 친구가 대단한 녀석인 것처럼 잘못 알지만, 금방 뾰록나고 그래서 동료들에게 왕따 당하고 교수에게는 찍힙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그 바리새인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자신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께 찍혔습니다. “저러면 안된다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자신의 옳음을 인정해 주고, 자신을 치켜 세워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리어 자신의 인격의 개떡같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방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누워서 침뱉기라는 속담처럼 당신 자신에게 욕이 돌아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에는 전봇대를 길게 달고서는 다른 사람의 눈에 톱밥이 있는 것을 보고 “이리 와 봐, 내가 톱밥 빼줄게. 넌 어떻게 얘가 칠칠맞지 못하게 눈에다 이런 것을 넣고 다니니?”하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스꽝스럽겠습니까?

예) 덩샤오핑 평전 - 어떻게 마오쩌둥의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는 마오쩌둥의 사상과 정 반대의 사상, 정책을 내세울 때에도 절대로 마오쩌둥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입버릇처럼 마오쩌둥을 칭찬하고 높이고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여러분 그 개판같은 정치판에서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을 백성들이 다 싫어하잖아요? 그치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당신 자신에게 백해무익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판단과 비방하는 못된 습관을 버리기 위하여 둘째로, 당신이 헤아리는 그 판단으로 당신 자신이 헤아림을 받을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제목만 말해도 예수님의 말씀 기억나시지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판단이 오늘의 현실에서도 사람들을 통하여서 나타나기도 하지요? 말이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대화의 도마 위에 자주 오르고,
남을 미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잘 당하고,
원망하고 탓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많이 듣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잘 하는 사람이 곧잘 평가되고,
욕을 잘하는 사람이 욕도 많이 먹고 그러지요?

사람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오랫동안 이 사실을 연구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죄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일반적으로 그의 마음은 그 죄에 붙잡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죄를 지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잇습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의 약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투영입니다. 자꾸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성향도  인간이 심판받을 존재임을 나타내 주는 암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깨우쳤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롬14:10-13>

아무리 저 사람이 나에게 못되게 하였어도, 저 사람의 잘못 때문에 내 잘못이 보상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 죄는 하나님께서 저 사람에게 맞게 보응하시고 내 죄는 하나님께서 다루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각각 다루심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 판단하기를 그치십시오. 당신의 일만 말하십시오.

아시(Assi)라는 유대인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이다”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가만히 놔 두시겠습니까?

판단과 비방의 죄를 버리기 위하여 셋째로, 올바르게 분별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원리를 아십시오. 사람이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판단과 분별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극단에 치우치기 잘하는 존재인지라, ‘판단하지 말라’면 아무런 분별도 하지 말아야 될 것으로 여기고 ‘잘 분별하십시오’ 하면 마구 판단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분별하는 원리를 명확히 아는 것이 판단하지 않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올바르게 분별하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성경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몇 말씀을 함께 찾아보면서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요7: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예수님을 향하여 바리새인들이 비방할 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기를 배우십시오.

외모가 뭐고 공의가 뭡니까? 저희가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많이 읽고 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외식을 벗고 공의, 옳은 것을 중요시여기는 것을 보고 알고 익히기 위함입니다.

어제의 최춘선 할아버지, 우리 모두는 쉽게 미친 사람,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지하철의 모든 전도자를 최춘선 할아버지와 같다고 치우쳐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사연이 있겠지... 쉽게 단정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고 바른 마음가짐입니다.

2. <요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이 말은 다같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자는 유대 종교인들의 분위기 가운데, 전에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했던 말입니다.

중요하지요? 당사자의 말도 들어보지도 않고 판단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잠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쉽게 단정하지 마십시오. 순간의 느낌으로 마음의 생각을 고착시키지 마십시오. 잘 듣고 사실과 진실을 정확히 알기를 먼저 하십시오. 때려 잡지 말고 뚜드려 맞추지 마십시오.

진화론자들이 주장했던 자바원인, 그리고 폐지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부분을 가지고 때려잡고 뚜드려 맞추어서 문제가 된 대표적인 경우들입니다.

3. <잠18:17>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한 사람의 말만 듣고 판단을 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말이라면, 구체적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도 들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말만 들어가지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많이 있지요? 그래서 성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원망, 비방, 탓, 판단하는 이야기는 일단 잘 안듣습니다.

4.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폄론은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외형적인 것 때문에 비방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고 절기를 지킬 수도 있고 안 지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외적인 형식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연 실상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외적인 형식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5. <고전4:5> “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마음의 동기를 끊임없이 도전받고 의심받았습니다. 바울이 사실은 돈벌기 위해서 저렇게 열심이라고, 자존심을 위해서 저렇게 열심이라고 마음의 동기를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사도 바울이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의 동기를 판단하는 것은 미성숙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추측은 할 수 있어도 분별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판단과 비방의 죄악을 버리는 제일의 지혜는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아니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영어 속담에 "They will never be the same man." 사람은 항상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쉽게 단정하는 태도를 버리십시오.

이런 겸손한 분별의 태도, 바른 마음가짐을 갖을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올무에서 더 많이 벗어납니다.

판단과 비방의 죄악을 버리기 위하여 넷째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셨는가를 잊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대표적인 성경 본문이 <롬2:1-5>입니다. 한번 보실까요? 거기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제일 중요한 이유로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자하게 하셨으며, 오래도록 용납하셨으며,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셨는가를 너는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 고 깨우쳐 줍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일만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종, 백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해 주지 않아서 주인의 진노를 사는 이야기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20억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20만원 빚을 탕감해 주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큰 용서와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용서받은, 은혜를 입은 사람인 것을 잊어 버리지 마십시오.

  은혜를 잊어 버리면, 적반하장이 됩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안해주신다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공격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 은혜를 기억하면,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도 훨씬 더 많이 이해하고 훨씬 더 많이 용납하며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그리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 은혜를 기억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올무에서 더욱 더 자유하게 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못된 습관을 버리기 위하여, 당신의 주제를 파악하십시오. 오늘 야고보가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논거가 이것입니다.

“판단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곧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 되는데, 율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율법을 판단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 율법을 세우고 판단하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신데, 네가 율법을 판단하려고 하다니 네가 하나님이냐? 네가 도대체 누구관데 이웃을 판단하느냐? 그 다음에 한 마디 덧붙인다면, 뭘 덧붙이겠습니까? “사람이 주제를 파악해야지... 인간의 탈을 쓰고 하나님 행세하려고 하다니...에끼 한대 맞고 정신차려라!” 뭐 이런 뉘앙스이지요?

사람이 자기 꼬라지를 알면 다른 사람을 헐뜯고 경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빗나간 사람일수록 맨먼저 남을 중상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먼저 판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비판하지 말라 라고 가르쳐 주면서 어떤 예를 들었습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마7:3-5>

무슨 이야기입니까? “다른 사람 판단하기 앞서서 네 자신을 알라. 네 주제 파악을 먼저 해라 자기 주제도 모르는 주제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하는게 얼마나 꼴불견,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눈에 전봇대를 넣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 눈의 톱밥을 빼려고 하는 모양이다” 이 말씀이지요?

주제를 파악해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주제를 파악하면 인생이 평안해집니다. 내 주제를 파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크게 느껴집니다. 내 주제를 파악하면 다른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내 주제를 파악해야 다른 사람들도 나를 사랑합니다.

어떻게 내 주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하나님 앞에 서기를 힘쓰십시오. 신앙의 성숙은 다른 사람의 관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이라는 소설에서 항상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자기는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그 판단의 습관 때문에 마구 부딪히고 갈등을 겪고 다투고 하다가 결국 그 아픈 경험을 통해서 맨 나중에 깨달은 결론이 이것입니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까맣게 몰랐다.” 다른 사람 판단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성찰하기를 힘쓰십시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마음눈의 방향을 바꾸어 내 자신에게로 향해 보십시오. 그러면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참 꼴불견인 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게 못된 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죄인인 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나는 피해자인 줄 로만 알았었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바로 가해자였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발견하는 진리는, 그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원망스럽고 불공평하고 무섭고 화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옥에 가도 싼 나를 품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 아들아,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너를 치유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었노라” 부르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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