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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세상의 소망(벧전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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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결정은 포기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공부와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이나 사업을 포기하는 기업인이나 결혼이나 가정을 포기하는 부부나 아버지이기를 포기하거나 자식이기를 포기하는 가족들이나 믿음이나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포기하고 구원을 포기하고 은혜 받기를 포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사탄의 치명적인 공격력은 절망입니다. 절망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망은 힘을 주고 단결시키며 가진 능력을 몇 배로 증가시킵니다. 소망이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지 뒤를 돌아보며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강철을 만들려면 뜨거운 용광로의 공정을 거쳐야 하며 좋은 포도주가 되기 위하여 포도송이들은 여지없이 짓밟혀야 합니다. 좋은 강철이 된다는 희망을 가질 때 용광로는 두려운 대상이 아닙니다. 좋은 포도주가 된다는 희망이 확실할 때 보기 좋은 포도송이가 부서지는 것에서도 의미를 찾게 됩니다. 소망은 모든 고통을 이깁니다. 그래서 어두움을 광명이 되게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부활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날마다 낳고 죽고 결혼하고 헤어지고 먹고 싸우고,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만 여기에만 붙들려 사는 인간은 머지않아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사는 인간은 멀리 내다보고 넓게 바라봅니다. 적어도 백년쯤은 내다보고 삽니다. 내일 이사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가 꿈을 갖는 삶의 원칙이고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이 인류 복지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히 12:28)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큰 어려움과 고난이 오면 직면하지 않고 피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 결혼 생활, 직장생활,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며 절망합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는 '성공의 비결은 전 생애를 통해서 소망을 잃지 않는 데에 있다'고 했습니다. 절망하지 않고 반드시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끝까지 소망을 붙든 사람은 성공하지만, 도중에 소망을 놓친 사람은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요 사상가인 파스칼은 선천적으로 허약한 몸과 과도한 연구로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는 종종 심한 복통과 두통이 있었고 결핵성 복막염 환자였습니다. 파스칼의 39년 인생 중 건강을 제대로 유지한 것은 2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적인 과학자요 수학자요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찾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육체의 병이 영혼의 약이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지식은 단 하나,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선이요 주님을 거역하는 것은 악입니다." 라고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파스칼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생각이 떠오를 때면 메모를 해두었는데 그는 5년 간 9백 24개의 주옥같은 짧은 글을 남겼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그의 작품인『팡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과 절망의 상황 중에 소망을 환경이나 사람에게 두지 않고 소망을 하나님께 둔 사람들입니다. 소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과 질이 달라집니다.

이 시대는 소망이 필요한 시대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가리켜 특별히"믿음의 사도"라고 하고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하고 또 베드로는"소망의 사도"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소망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풍요로움이 있지만 그러나 꿈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때문에 소망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사람들은 현실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쾌락과 육신의 욕망에 빠져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복중 하나가"소망"입니다. 믿는 자에게 참 소망이야 말로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힘의 근원이 됩니다. 단테는 작품 "신곡"에서 "이곳에서는 일체 희망을 버려라"는 말로 지옥을 표현합니다. 희망이 없는 삶이야말로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 같은 삶은 고난이 있는 삶이 아니라 소망이 없는 삶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고난은 우리를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닥쳐왔을 때 절망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것은 악한 세력에게 패배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니라 내일입니다. 내일! 즉 그것은 미래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그가 아는 만큼 사는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진 만큼 사는 것도 아니라 그가 바라는 만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가졌느냐에 행복이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어떠한 소망을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서 행복은 좌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깊고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두고두고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이 세상의 소망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잘 표현하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교회에 주어진 이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할 사명은 취소되지 않았고 변경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갈수록 더 부패하고 암울해가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은 더욱 절실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심을 받고 다시 이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세상 속으로 소망의 메시지를 안고 보내심을 받으며 이 세상 가운데 흩어져 소망을 잃은 심령들에게 소망의 불을 지펴야 하는 교회입니다. 요즈음 급변하는 세상으로 인해 이 땅의 백성은 많이 절망하고 크게 불안해하며 깊이 상심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로 거듭나 이 사회로부터 잃어버린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되찾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망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표지로 준 생명의 언어

소망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아직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표지로 준 생명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은 절망적인 삶의 정황을 넘어서는 새로운 현실과 미래를 기대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현실에 의미를 심어주며, 다가올 미래가 확실하게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인지를 누가, 그리고 어떻게 보증하는가요?

우리의 현실과 미래가 우연을 넘어선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를 보증해주는 누군가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언어에도 현실을 넘어설 미래를 향한 기대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진 약속은 곧 인간의 연약함과 허무함처럼 그냥 무너집니다. 인간은 단지 피조물이며 한정된 시간에 머무르는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현실이 새로운 의미로 부딪쳐 오며, 미래까지 연결해 줄 그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지며 그 약속은 단지 미래에 있을 수도 있는 희망 사항이 아니라, 미래를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여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이 약속은 세상을 도피하기 보다는 세상을 넘어서서 새로운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의 현실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창출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일까요? 교회가 세상의 소망인 것은 교회가 바로 세상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현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만이 세상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갖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건설하기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선취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복음을 전하는 교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증언하고,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공동체는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존귀한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세상에 빛을 밝히고, 세상에 소망을 주는 가장 결정적인 교회의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소망과 세상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와 운명적으로 깊이 묶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인간과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비참하고 망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시 살 수 있고 희망을 얻을 수 있고, 기쁨과 생명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희망의 미래를 여시는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고, 세상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요 산성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교회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봉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도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세상 속에서의 교회의 과제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교회의 책임

교회가 세상 속에 행해야 할 세상적 책임의 첫째 번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고 있는 이웃사랑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 참으로 실현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시금석입니다. 잘 살고 화려한 아름다운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자기들끼리 사랑하고 문안하는 이방인들의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가난하고 소회된 이웃을 사랑하고 이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살리는 기쁨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는 이 나눔의 정신이 참으로 구현 될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리는 교회의 기도

교회가 세상의 소망인 이유는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꾼을 길러내고, 세상 속에서 악과 어두움을 몰아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 외에도, 교회가 세상을 살리기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칼 바르트(K. Barth)에 의하면 교회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는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국가가 무신적 사상에 사로잡히고, 흑암의 힘에 의해 지배당해 악마적 국가가 되는 것을 방지하는 가장 큰 힘은 국가를 향한 교회의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역사를 바꾸고 민족의 운명을 바꿉니다.

교회는 세상을 살리는 것이 교회의 기도라는 것을 유념하고 깨어 기도하는 공동체로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테러와 전쟁과 환경의 재난과 경제위기와 마약과 수많은 악으로 세계의 생명과 지구의 생명이 크게 위협 당하는 21c에 교회가 참으로 세상의 빛과 소망으로 존재하려면 교회의 깨어 있는 기도는 절대적입니다. 세상 속에 기도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세상의 빛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살리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자비의 하나님만이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말 중에 '어제’와‘오늘’과‘내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와 오늘은 우리말인데 반하여 내일(來日)은 한자어입니다. 來日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없어진 셈입니다. 기독교의 중심 개념에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개념 중에서도 믿음이나 사랑은 우리말인데 반하여 소망(所望)은 한자어입니다. 所望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설상가상으로 내일(未來)과 더불어 소망(所望)도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내일’이 없고‘소망’도 없는 민족!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판에 내일이 보이지 않고 경제의 앞날에 내일은 불투명하고 교육계에 스승과 제자의 질서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 사회에 내일이 없고 이 땅에 사는 자부심도 없습니다. 농촌에도 내일이 없고 도시에도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낙오된 자의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드디어 세계 1위에 올라섰다는 소식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자살율도 덩달아 오르며 이 또한 세계 최고를 육박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아동학대가 심각한 상태에 와있습니다. 우리의 내일(未來)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이제 이 민족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야 할 곳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마지막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소망을 잃어버리면 이 민족의 앞날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지금 기독교는 재력도 있고 인력도 있고 아이디어도 있고 훌륭한 지도자도 많이 있습니다. 모든 힘을 결집하여 내일이 없는 사회를 향하여 내일의 꿈을 심어주고 소망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그리스도 안의 소망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민족과 사회에 교회는 소망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현 상황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하며 새로운 각오로 교회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 위에 덮인 구름이 아무리 검고 부는 바람이 아무리 억세어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승리의 날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인생이 아무리 짧아 보이고 허무해 보여도 자포자기 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달려가지 말고, 사는 것이 고생스럽고 되어지는 성과가 너무 적게 생각되어도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내 육체가 시들어 가고 죽는 날이 가까워 옴을 실감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변하지 말고 훈장을 달고 싶고 갈채를 듣고 싶어도 조금만 참고 말없이 걸어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활동무대가 좁게 느껴지고 숨이 막히며 속한 땅이 비록 돌작밭이라 할지라라도 움츠리지 말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소망이란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에 부딪히고,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 부딪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부딪히고, 아브라함이 광야에 도전하는 것은 절망적인 몸부림이 아니라 확실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불꽃같이 고요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자녀 때문에 낙심하고 생활 수입이 적다고 낙심하고 직장을 잃었다고, 사업에 실패했다고 소망을 잃고 절망하며 산다면 그 절망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14장 32절에'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언제나 주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삶에 은총과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주께 소망을 두고 주님만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어려움과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주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같이 걸어가십시오. 우리의 길을 진리로, 생명으로, 의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주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주께 소망을 두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삶의 사막에서 강을, 반석에서 물을 하나님께서 내실 것입니다. 언제나 소망을 주께 두고 주님을 전하십시오. 우리의 영혼에 생명의 충만한 능력이 흘러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심으로 지금까지 여기까지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이제 한국의 교회는 말씀에 굳게 서서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대로 택함 받은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보다 더 정의로워야 하고 더 정직해야 하고 더 깨끗해야 합니다. 교회는 돈에 눈이 멀어서도 안 되고 권력에 아부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어야 하고 부패한 것을 치유하는 소금이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많은 이 세상에서 참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의 착한 행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 안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고 세상을 향하여서는 예전의 종교적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족이 교회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교회는 민족을 사랑하고 바르게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민족지도자들이 배출되며 민족지도자들이 교회를 어머니로 생각하는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하여 함께 기도하며 뜻을 모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창립 50주년을 기쁨과 함께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 새로운 50년을 향해 나아가야 할 우리교회가‘교회, 세상의 소망’이란 주제로 이어가도록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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