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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의 디딤돌 (삼상 22:6-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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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울을 통해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혼자던지, 혹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있던지,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사울은 이제 다윗을 향해 던졌던 단창을 늘 손에 들고 살아야 하는 참으로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아있었다고 그랬습니다. 그 자리는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라 신하들과 함께 있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단창을 들고, 다윗을 향해 던졌던 그러한 마음을 그는 가지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7- 8절은 자신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하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사울왕의 출신 지파가 베냐민 지파입니다. 왕을 탄생시킨 지파, 사실 사울은 처음에 하나님 앞에 우리 같이 제일 모자라는, 베냐민 지파라고 하는 것은 12지파 중에 12번째 지파이기 때문에, 언제나 서열에 있어서 맨 마지막 이었습니다. 그런 우리 지파에서 어찌 왕이 날 수 있습니까? 라고 자신이 베냐민지파로서 왕이 될 수 없음을, 왕의 재목으로 부족함을 고백했던 겸손의 시절도 있었습니다.

왕을 배출한 가문으로써 베냐민 지파는 조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측근들이 베냐민 지파에서 세워졌습니다. 그 신하들, 그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향해서 사울왕이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 해서 다윗을 고발하지 않느냐?

오늘 본문말씀은 6절에서 23절까지 무려 3번이나 아무도 내게 다윗을 고발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그는 불평하고 있습니다. 신하들을 그는 불신합니다. 너희들이 다 공모해서 나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심지어는 자기 아들 요나단을 향하여 ‘내 아들이 신하들과 공모해서 나를 공격할 것은 아닌지, 매복했다가 나를 치는 것은 아닌지, 그는 이제 신하들도 믿을 수 없었고, 자기 가족도 믿을 수 없는 극한적인 불신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사울의 심리적 상태는 완전히 불균형 상태입니다. 이런 사울의 상태를 경계선 인격장애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에는 감동을 받습니다. 아둘람 굴에 발을 가리러 들어왔다가 다윗이 옷자락만 밴 것만 보고, 다윗이 골짜기에 내려가는 왕을 향해서 이 옷자락이 왕의 것이 아닙니까? 그랬을 때, 자기 옷 자락이 베인 것을 보면서 충분히 자기를 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옷 자락만 베었던 다윗을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다윗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데, 어찌하여 내가 이런 일을 하는가?’ 눈물로 회개하고 다시는 내가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것도 잠깐이고, 곧 군대를 동원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산으로, 광야로 다가오고는 했었습니다. 어느 날은 일기가 맑음입니다.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얘기해도, 무슨 이야기도 다 됩니다. 은혜롭습니다. 편안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또 어느 날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냉랭합니다. 쌀쌀합니다. 오늘처럼 영하 9도는 될 것 같아요. 교인들이 이렇게 수시로 심리적인, 영적인 상태가 바뀐다고 하면 아마 우리는 피곤해서 그런 사람을 대하기 어려울 거예요. 지금 이 사울의 상태가 그런 상태입니다. 경계선을 드나들고 있어요. 정상과 비정상을 드나들고, 인격과 비인격의 경계를 드나들고 있습니다.

아무도 다윗을 고백하는 사람이 없다고 역정을 내고 있는 그 상황에서 에돔 출신의 도엑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실은 내가 놉이라고 하는 땅에 갔을 때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돕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그렇게 기도해 줍디다. 배고프다고 그에게 먹을 것을 줍디다. 위험해서 자신을 지키라고 골리앗, 엘라 골짜기 전투에서 과거에 골리앗을 베었을 때에 칼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칼까지 다윗에게 주는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아마 도엑은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도 다윗을 고발하는 사람이 없다고 역정을 내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지금 다윗을 고발함으로써 사울왕에게 환심을 얻고, 점수를 따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금요일부터 오늘저녁까지 속회지도자 훈련세미나를 받고 있습니다. 2005년도에 지역장, 속장, 강사로 부름 받은 우리 평안의교회에 속회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훈련되고 준비된 모습으로 쓰임 받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일 중에 이틀 이상 참석하지 않으면 저 강사님이 강의하는 곳에 가셔서 강의를 듣고 싸인을 받고 오셔야 합니다.

훈련되지 않고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것은 그 속도원에 대한 모욕입니다. 만약 제가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이 자리에 서서 시간만 때운다고 하면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모욕입니다. 훈련되지 않는 속회지도자가 속회를 이끌어 간다고 하면, 그것은 속회원에 대해서 정말 하지 못 할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농부는 연초부터, 찬바람 불 때부터 우수경칩에 논을 갈고. 밭을 갈면서 그는 농사를 위해서 수고의 땀을 흘리듯이, 우리가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주님 나로 하여금 당신의 나라에 일꾼이 되게 하시고, 이왕 일꾼으로 세우셨으면 충성된 일꾼이 되게 하시고, 지혜로운 일꾼이 되게 하시고, 능력의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이름만 걸고 일년 속장으로 세월만 보내는 분은 일년 지나면 뭐가 되요? 겉장이 되는 거예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자기 속회 회원들도 그거 관리하기도 급급한, 과거 속회 지도자들은 관리자처럼 생각 했어요. 5가정 맡기면 그 5가정 잃어버리지 않게 급급한 거예요. 이제 속회지도자는 관리자의 차원이 아니라 양육자의 차원입니다.

그들을 섬기면서 그들이 점점 신앙이 향상되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헌신자로 또다른 속회 지도자로써, 예비 지도자로까지 그렇게 번식 되어갈 수 있는 그것을 지금 훈련받고 있지 않습니까?

도엑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때 사울에게 정말 자신이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도엑은 불행한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이 도엑의 말을 듣고, 제사장 아히멜렉을 불렀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에게 떡을 주고, 칼을 주고, 그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까지 해 주었느냐? 그러면서 사울은 그 행위가 바로 나를 대적하는 행위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이 피곤하고, 많은 피난생활에서 지치고, 육신의 양식도 필요하지만, 정말 위로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 아히멜렉 놉 땅에 가서 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위로를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고 지금 고단하지만, 피곤하지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말씀으로 위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제단에 쓰이는 그 진설병을 그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이렇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비상계엄령 긴급조치가 사울왕으로부터 전국에 내려져있어요. 누구든지 다윗을 돕는 자는 죽는다. 다윗이 어디 있는 것을 알리지 않으면, 고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는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울은 다윗을 고발하지 않았던 아히멜렉에게 너와 너의 집안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미 아히멜렉 제사장이 자신이 다윗을 돕고, 다윗을 위해서 위로하고 기도한다는 자체가 생명을 거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헌신하고 봉사를 해도 모르고 하는 것이 알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히멜렉은 이렇게 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지금 주변에 많은 신하들이 있지만, 다윗 같이 충성되고, 진실된 신하가 또 있습니까? 왕의 사위가 되는 다윗 아닙니까? 왕의 지혜와 명철을 나누었던 왕의 모신이 아닙니까? 모든 왕실에서 존귀하게 여기는 다윗 아닙니까? 그런데 왜 다윗을 미워하십니까?

풍전등화와 같은 그 위기의 상황에서도 아히멜렉 제사장은 진실을 왕에게 고했습니다. 자신의 위협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곧 자신의 목은 사울로 인해서 떨어질 것이라고 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 요즘 경제가 어려우시지요? 사업하는 분들 사업이 잘 안 되시지요? 이런 마음 들고, 이런 마음 가지고, 사업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죽기를 작정하시고, 사업하는 분들, 사업이 안 된다고 하기 이전에 죽기를 작정하고 해 보신 적이 있느냐고 저는 묻고 싶습니다.

식당에 가끔씩 손님접대를 가면 요즘 불황기에도 손님이 많아서 번호표를 나누어주고, 30분씩 기다려야 차례가 오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텅 비어있는 집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인가요? 보면 인테리어도 다 현대식으로 되어 있고, 주차장도 다 갖추어 놓았고, 그 조건이 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쪽은 사람이 모이고, 한 쪽은 사람이 모이지 않아요. 여러 가지 요건을 컨설팅 해 봐야 되겠지만, 일차적으로 가장 사람들이 느끼는 차이는 다름 아니라 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맛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만약에 내 가게에 사람이 없다면 건너편에 사람이 많다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가서 그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도대체 이 집에는 음식에 무엇이 들어가길래, 도대체 음식을 만들어 내길래 여기는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고 식사를 기다리는 걸까? 고민해야 될 것 아닙니까? 거기 가서 추가를 해야할 것 아닙니까? 밤을 새면서 연구해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어제도 우리 젊은이교회 임원들은 오늘 새벽 3시까지 사무실에서 젊은이교회를 위해서 고민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무엇 하나 거저 대강대강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딸들도 잠을 못 자가지고, 또 오늘 교회학교 9시 예배 경배찬양단을 도와주러 간대요. 그렇게 잠을 못 자가지고, 힘들어 해요. 불쌍해요.

그러면서 또 세수하고, 차려입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 편으로는 안타깝지만, 저렇게 하는데 부흥이 안 되는 것이 이상하잖아요? 교회를 하면서 많은 개척 목회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이번에도 교회 구역회들을 거의다 했습니다. 몇 군데만 남았는데, 미자립교회들 조금 부흥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마찬가지예요. 왜 부흥이 안 되었지요? 사람들이 안 와요. 개척교회가 되어서 사람이 안 와요.

여러분, 얼핏 들으면 괜찮은 이유 같지요? 그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요. 그것은 핑계만 되고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우리 속회 지도자 세미나를 하고 있는 이재현목사님과 다과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22년 전에 개척을 하면서 목사집도 지하실, 교회도 지하실, 등록한 가정을 보면 성도의 집도 지하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루에 200가정씩, 한 달에 4,000가정을 전도를 했습니다.

4,000가정 전도를 다니니까 한 달에 한 가정에서 두 가정이 전도가 됩디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부흥한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각오 하고, 제 인생관에 3번째가 뭐지요? 주를 위해 목숨을 걸자. 죽을 각오를 하면 사업이 안 되겠습니까? 죽을 각오를 하면 목회가 안 되겠습니까? 죽을 각오를 하면 여러분의 부서가 부흥이 안 되겠습니까?

속회시간에 9시가 되었는데, 속회원들이 안 온다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 수 있도록 여러분이 일주일동안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전화 한 번 보냈어요? 문자 메시지 한 번 보냈습니까? 일 주일동안에 그들과 만나서 차 한 잔 해 보셨습니까? 금요일 9시가 되도 올 리가 만무하지요. 내가 기대하는 그 사람들은 이미 그 시간에 속회 시간이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어요. 정말 섬김이 없으면, 희생이 없으면 부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이 왕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는 배경은 이미 죽을 각오로 내가 다윗을 위해서 진실을 고하고, 내가 다윗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내가 입으로 그를 위로하고, 먹을 떡을 주고, 물을 주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생명을 걸고, 진실을 고할 수 있다고 하면 내가 그 일을 해야 되겠다고 그는 결심한 것입니다.

나를 그 사람을 원치 않았는데, 그 사람이 내게 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노라고 그렇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일을 위해서도 생명을 건다면 안 될 일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명을 건다고 하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다른 사람의 삶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지도자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심령들을 위한다고 하면 그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우리는 소그룹 리더자의 자격을 들었습니다.

우리 지방 구역회를 어느 작은 교회 구역회를 하다가 참으로 감동적인 그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집사 부부인데, 남편은 손가락 2개가 잘려서 부부가 같이 무슨 일을 못하고, 아내가 직장에 나가는데, 한 달에 60만원을 받습니다. 몇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수입인데, 어느 날 그 교회 목사님이 광고합니다. 우리 교회가 빚이 삼천만원이 있는데, 삼천만원의 이자나 이런 것 때문에 너무 힘이 든데, 이 빚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 당시의 교인의 숫자가 30명이 되는, 자립과 미자립이 막 왔다갔다하는 수준의 교회입니다.

삼십명 되는 교회에 삼천만원의 빚이라면 그것도 부담스러운 빚이지요. 여러 성도들이 의논하다가 결국은 이렇게 결론은 내렸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조금씩 빚을 덜읍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십만원, 어떤 사람은 빚을 안았는데, 이 집사님 부부가 무려 2천만원을 빚을 감당하겠노라고 빚을 안았습니다. 한 달 수입이 60만원 밖에 안 되는데, 삼천만원의 빚을 갚는 일이 다 해결이 되었어요. 집사님 가정 하나가 2천만원을 갚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얼마나 고마우면서도 마음에 염려가 되는지 넉넉한 사람도 아니고, 한 달에 60만원을 버는 사람, 몇 달이 지났습니다.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한 달에 60만원을 벌고서는 이 빚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조금 지혜가 없을까요? 목사님이 함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짜보자고 했어요. 그리고 목사님이 제안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이 아무래도 그 직장 가지고는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으니 사업을 해 보시지요. 사업이 말이 사업이지, 조그만한 좌판을 시작했습니다. 자리가 없어서 자기 동네의 수퍼마켓 열 다섯 평 하는 그 슈퍼마켓의 가게 앞에다가 과일을 받아가지고, 좌판을 놓고서 과일 장사를 시작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슈퍼마켓의 주인에게 내가 장사를 시작하려고 그러는데, 이 앞에 자리를 써도 되겠느냐고 어렵게 어렵게 물었는데 아주 흔쾌히 승낙을 해 주더라는 거예요. 하시라고, 괜찮다고, 그래서 그 슈퍼마켓에 없는 내용을 보니까 과일이 없어서 과일로 좌판을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났는데, 어느 날 그 슈퍼마켓 주인이 그 집사님에게 ‘아주머니, 그러지말고 우리 슈퍼를 인수하지 그래?’ ‘우리가 돈이 있어야지요.’ ‘그러지말고 내가 좋은 조건으로 권리금도 많이 안 받고 할 테니까 우리 가게를 인수하지. 내가 가만 보니까 아주머니 너무 열심히 사는데, 내가 조금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냥 슈퍼 인수해.’

그래서 여러 친척들과 가족들이 도와서 그 슈퍼를 인수를 했어요. 인수 할 때 그 주인과 인수인계 할 때 물어보니까 하루에 매출이 40만원이었어요. 거기는 상품의 원가, 여러 가지 비용이 포함이 된 거지요. 하루에 매출이 40만원, 15평 되는 슈퍼마켓을 인수를 했어요.

그랬는데 이 분이 이것을 인수하고 나서 목사님을 또 찾아 왔어요. ‘목사님, 제가 슈퍼마켓을 인수했는데요. 내가 이제 십일조를 해야 하는데, 십일조를 어떻게 해야할지, 내가 직장을 다닐 때는 60만원 받아서 6만원 하면 되는데, 이것은 가게를 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목사님, 지혜를 구합니다.’ ‘아, 그거 어떻게 하지? 하루에 얼마나 번대요?’ ‘제가 알기로는 하루에 40만원매상이 생긴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목사님과 집사님이 의논하다가 이렇게 해 봅시다. ‘하루 매상액을 십일조로 하면 어떨까요?’ ‘그거 괜찮겠네요, 목사님.’

그렇게 해서 하루 매상액을 십일조로 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30일이니까 1/30이지요. 십일조는 아닌데, 목사님과 집사님이 하루 매상액을 십일조로 하기를 작정을 했어요. 그리고 사업을 시작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집사님 부부가 열심히 하는데, 그 동네에는 슈퍼마켓 건너건너 큰 마트가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차를 타고, 소방도로인데 지나가다가 서서 물건을 사며 그 큰 마트로 안 가고, 자기 슈퍼 앞에서 내려서 물건을 사고 갑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지켜봐도 어쩌면 사람들이 그 슈퍼로만 사람들이 들어가는지, 하루 매상이 60만원이 되고, 점점 올라서, 지난주에 제가 구역회를 할 때 지금은 매출이 얼마입니까? 바꾸어 말하면 요즘에는 십일조를 얼마하십니까? 180만원이랍니다.

큰 대형마트가 있는데, 하루에 15평짜리 두칸짜리 슈퍼가지고, 하루 매상이 180만원이래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2천만원 빚 갚는거 다 해결하고, 교회에서 가장 헌신되게 충성하고, 제가 그 간증을 듣고 나니까 가만 있을수가 없더라구요. 제가 다 구역회 하고 그 시간에 그 사람 불러내가지고, 감리사의 권한으로 오늘 부로 권사로 임명합니다. 권사 시키고 왔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권사가 안되면 누가 권사가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죽고자 한다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희생을 한다면 될 일이지만,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겠냐구요.

아히멜렉 그는 생명을 걸고 다윗을 변호하고, 그는 생명을 걸고 옳은 것을 위해서 진실을 고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아히멜렉의 진실을 사울은 들었지만, 사울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가 나서 옆 방에 아히멜렉과 그의 그룹들, 소위 제사장 그룹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명령을 했는데, 신하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종을 어떻게 죽입니까? 아무도 신하들이 제사장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엑이 나섭니다. ‘왕이 네가 한번 죽여볼래?’ ‘제가 죽이겠습니다. 저는 합니다.’ 무려 85명이나 되는 제사장을 칼로 죽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고향에 어른과 어린아이들까지 소와 모든 나귀와 양떼까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칼로 쳤다고 그랬습니다. 역사상 제사장을 이렇게 집단적으로 학살한 예가 없습니다.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인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범죄를 지금 사울이 저지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와중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중에 하나가 피신을 했어요. 다윗에게 달려갑니다. 지금 우리 동네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섬기고 위로한 것 때문에 지금 85명의 제사장이 죽었고, 모든 생명 있는 동물까지 모두 죽였습니다. 바로 그 일을 도엑이라는 사람이 했습니다.

다윗이 이야기 합니다. 그래, 난 이미 알고 있어. 내가 너의 아버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찾아갔을 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그가 나에게 물과 떡을 줄 때 그 옆에 도엑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 내가 그 때 내 마음에 걸리더라.

여러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마음의 오고 가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어떤 모임에 가보면 그 사람 얼굴만 봐도 이 사람 아주 상태가 안 좋은지, 삐쳐있는 건지, 기분이 안 좋은건지, 기분이 좋은건지, 금방 알거든요.

다윗이 제사장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환대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 도엑이 있었는데, 이미 다윗은 그 때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고할 때,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아비의 집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나의 연고로다.

여러분, 공동체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고 그랬지요? 속회지도자 훈련받은 분들은 귀가 따갑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는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공동체다. 두 번째는 서로 책임을 져줄수 있는 곳이 공동체다. 그것이 당신 책임이냐, 내 책임이냐 하는 것을 따지는 곳이면 이미 공동체가 아닙니다.

여러분, 길거리 가다가 자동차가 서로 충돌하거나 추돌하고 나면 서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옳으냐, 니가 옳으냐 싸우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 모습은 공동체 모습은 아니잖아요. 서로 책임을 지어 줄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된 것은 제 책임입니다. 우리 속회가 부흥되지 않은 것은 제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우리 선교회가 부흥하지 않은 것은, 우리 속회가 잘 모이지 않은 것은 제가 준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책임을 자기에게로 돌립니다.

아니예요, 회장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저희들이 그냥 성의없어서 그랬지요. 회원들은 또 자기 책임을 돌리는 거예요. 이게 천국이예요. 서로 책임을 전가하면 이것은 지옥입니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들의 공동체가 성장하지 못했을 때, 여러분들은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시간을 보냈습니까? 아니면 무릎꿇고 이것은 나의 연고라고 책임을 서로 지려고 하셨습니까? 다윗은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연고입니다. 두려워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에게 자기와 함께 있기를 전했습니다. 그랬는데 이 사건이 지금까지 22장에서 내려오는 이 사건은 사실은 불행한 사건이요, 가슴 아픈 사건들만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말씀 속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들을 새롭게 사용하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다윗이 왕으로 섰을 때, 그 왕권이 합법적인 왕권이고, 정당한 왕권이고, 그의 왕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권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셨어요. 과거에는 모든 선지자들이 다윗을 지지하는 그룹들이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서 모든 제사장그룹까지 다윗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환란과 실패와 좌절이 하나님 앞에 든든하게 서는 승리의 디딤돌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때때로 나의 연약함, 때때로 나의 부족함, 때때로 나의 실패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온전케 하시는 디딤돌로 사용하게 하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실패 속에서, 좌절 속에서, 때때로 고통 속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새해를 시작하시는 사랑의 평안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 지금 견디기 어려운 역경과 고통 속에서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성도들이라 할 지라도 그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 남은 자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도우시는 선한 손길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역경 속에서도 진실을 고할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주의 세우신 일꾼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진실을 고할 수 있는 저희들의 삶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여 주님 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이제 나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들을 돌아보게 우리의 삶을 다하여 전심을 다하여 우리의 이웃의 필요를 아버지, 우리 이웃의 삶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투자할 수 있는 희생적인 지도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저희들을 삼아주시옵소서. 승리의 디딤돌은 세속적인 어떤 바탕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주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오늘 모든 성도들 삶 속에 구체적으로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라. 그 분명한 고백이 오늘 성도들에게도 오늘 임할 수 있도록, 고백되어질 수 있도록, 주님,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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