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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고전 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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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10년을 준비하는 교회가 됩시다"라면서 전화를 받는데, 전화기에서 "목사님, 접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그래 보소"라고 했더니 "아 예, 10년을 준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뭘 준비해"라고 했더니 "열심히 준비합시다"라고 하시더라구요. 이 시간 좌우를 돌아보시면서 "10년을 준비하는 교회가 됩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덧붙여서 "열심히 준비합시다"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어떤 목사님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여보, 미안하지만 우리 형편이 좀 나아질 때까지 가정의 모든 비용들을 절감합시다. 특히 옷이라든가 이런 데 드는 비용들 말이요."
며칠 후 시내에 나갔던 사모님이 아름다운 새 옷을 사 입고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묘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목사님이 한마디를 합니다. "아주 멋있구려. 그런데 여보, 내가 당신더러 당분간은 옷을 사지 말자고 부탁한 것 기억나시오?" "그럼요, 그런데 이 아름다운 옷을 보는 순간 사탄이 저를 유혹하지 뭐예요" "아니, 여보,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소. 성경 말씀대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소리쳤어야지" 그러자 사모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대꾸를 했습니다. "그렇게 했지요. 그런데 사탄이 내 뒤로 가더니 이렇게 말하지 뭐예요." "뭐라고 말하던데" 그러자 사모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뒤에서 봐도 아름다운걸!"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비전과 열정을 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비전과 뜨거운 열정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해를 살아가면서 하나님 안에서 비전과 열정을 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열정이 식어버린 사람은 그의 삶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감동도 아름다움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는 각양의 은사와 달란트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그의 학벌과 기술이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지만, 그래서 남들에게 무엇 하나 드러내 놓을 수 있는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감동하고 흥분하는 이유는 그의 열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영신교회 가족 모두가 비전과 열정을 품고 이 한해를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었던 그 비전과 열정을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통치를 받았던 그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강제노동 수용소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 의사가 배치되어 왔습니다. 자신이 죄수이면서 동시에 다른 죄수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배치가 되었습니다. 그의 중요한 임무는 아무리 심한 병에 걸린 환자라도 "일할 수 있음. 건강함"이라는 도장을 찍어서 노동장으로 내보내야한다는 지령을 받고 있었고 만약 이 지령을 어기면 그는 사형 당할 수 있다 라는 경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같은 동료 죄수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한 생명의 소중한 가치, 한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총명해 보이는 젊은 죄수 환자 한 사람을 진단하다가 그가 장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됩니다. 초기 장암이어서 치료의 희망이 있다고 판단한 이 의사는 수용소에 지령된 수칙을 어기고 정성을 다해서 이 환자를 치료하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가 회복되어 가기 시작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의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의사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알면서 도대체 왜 나를 살리느냐?" 그 때 이 의사는 예수님 사랑 때문이라고, 그리고 내가 성경을 보니까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가 예수란 도대체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자기 방에 다가왔던 한 간수에게서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방금 전에 자기를 살린 의사가 그 사건이 탈로가 나서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처형당한 의사가 살렸던 청년이 바로 그 유명한 노벨상 수상 작가였던 알렉산더 슐제니친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영혼을 살리고자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던 것은 비단 이 의사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왔던 발자취였습니다. 그들은 한 영혼이 주 앞으로 돌아와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전존재를 던지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중요하고도 궁극적인 이유였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이 목자의 가슴앓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자 몸부림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앓이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자 애쓰는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한국 교회에는 영혼을 찾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게 하신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전도의 열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전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언제나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그들이 결신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몸부림을 쳤던 사도 바울의 열정을 본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그대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이 소중한 영혼을 건져내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을 품고 이 한해를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후 50년대,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소위 제2차 선교 여행 중에 약 1년 반 동안 한 곳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며 세웠던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바로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가 에베소라는 곳에서 편지를 쓰면서 그는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전도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몇 사람이라도 정말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되겠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한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구원받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고, 그 보다 더 고귀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이 소중한 영혼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한 영혼이라도 주 앞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전도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자기에게 한 일은 자기에게 주어졌던 자유를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종으로 살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19절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종이 되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자유를 포기해야 합니다.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종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한 그는 종살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나의 나됨을 주장하는 한 그는 주님의 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원해서 종이 되겠다고 선포합니다. 왜, 무엇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아니면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그는 자유의 자리를 반납하고 종의 자리에 서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특별히 이러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에게 주어진 특권과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고린도전서 9장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바울이 포기하기로 한 권리들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9장 4절에 보면, 내가 먹고 마시는 권한이 있지만 이 권리도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더 먹을 수 있고, 더 마실 수 있는 권한을 말합니다. 그는 내가 더 많이 먹을 수 있고, 더 많이 마실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전도를 위해서라면 스스로 이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5절에서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사도들처럼, 혹은 베드로처럼 나도 아내를 데리고 전도 여행을 다닐 수 있지만 이 권리도 포기한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9절 이하에서 11절에 보면 그가 복음 전도자로서 당연히 받을 수 있는 사례, 혹은 봉급 받을 수 있는 권리조차도 포기한다고 말합니다. 혹시 행여나 내가 돈 때문에 일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오직 한 가지 그는 복음을 위해서만, 그 목적 앞에서만 자신의 생애를 드리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그리고 복음이 좀더 자유롭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이런 권리들을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는 한 영혼의 전도를 위해서 종처럼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행한 [일곱집사 전도행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유명한 대중 음악가 조운파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운파를 모르시는 분들은 옥경이, 철갑산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그래도 모르신다면 이러면 아실 겁니다. "콩밭메는 아낙네야 /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그래도 모르면 어쩔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곡을 작사 작곡한 조운파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분이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도를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가지 실천한 것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타고 다니던 캐딜락을 포기하는 일이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캐딜락을 샀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시속 150, 심지어 180㎞를 달려도 차 안에 있는 컵의 물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승차감, 그래서 역시 차는 좋은 차가 좋다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일이 안되어서 자기 마음에 찔림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너, 예수 믿고 사람들 앞에서 전도하겠다고 결심했지? 큰 소리쳤잖아? 그런데 이렇게 고급차만 타고 다니면 전도할 사람은 언제 찾아다니나?"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포기하기로 결심합니다. 캐딜락을 하나님 앞에 반납하고 버스 카드를 사고, 전철 표를 사서 그는 버스와 전철을 타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생이 없이, 그리고 섬김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싶다, 전도의 명령 앞에 순종하려면 먼저 섬기기로 결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섬기기 위해서는 내가 붙들고 있었던 어떤 권리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중한 내 시간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좀더 먹고, 좀더 마시고, 좀더 입고 입은 유혹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종으로서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꺼이 나 자신을 드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종으로 살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우리가 종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기쁜 마음으로 종된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참된 즐거움은 보살핌을 받을 때 보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섬길 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도자로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서 이 한해에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를 원한다면 두 번째로, 우리는 전도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수도가 각 가정마다 보편화되기 전에는 우물을 파던가, 아니면 파이프를 박아서 펌프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잘 파야 하는데, 잘못 파면 그냥 허탕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어디에 땅을 파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한 번 잘못 파면 그 동안의 수고와 비용이 다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장로님은 땅을 파기만 하면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땅을 파기만 하면 물이 나오니까 이것이 너무 신기해서 어떤 사람이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물줄기를 그렇게 잘 찾습니까?" 그랬더니 장로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예, 저는 물이 나올 때까지 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 장로님과 같은 끈기, 내지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에 있습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없으면 전도하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에게 전도의 열정이 불같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데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은 그 심령에 전도의 열정이 뜨겁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불신자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전도하지 않으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심령에 이 복음의 열정이 불같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서울 일산의 한소망교회에 어느 권사님은 1년에 900명 가까이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이 분이 처음에 서울에서 일산으로 이사를 와서 한소망교회에 등록한 후에 담임목사님이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 집사님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도대체 누가 목사고, 누가 교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 이 사람은 구역장을 시키면 잘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구역장 하시면 잘 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전에 다녔던 교회에서는 너무 전통을 중요시하는 교회라서 구역 권찰을 4년 했는데도 구역장을 시켜주지 않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구역장을 해 보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러면 오늘부터 당신이 우리 교회에서 구역장을 맡으라고 했습니다. 구역장을 맡으라는 말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제가 맡아야 할 구역 식구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집사님이 구역장이고, 구역원입니다. 이제부터 이 아파트를 전도해서 구역을 만드세요" 그런데 몇 달만에 그 아파트의 대부분을 전도해서 자기 구역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분이 그렇게 전도를 하는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일산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노동자들을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하고,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면 이것보다 더 확실한 선교는 없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외국인 노등자들에게 전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은 외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일산의 이마트에 갔는데 보니까 외국인 노동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한쪽 구석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성경에 보니까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 나라 말로 동시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도 방언을 주옵소서. 제가 방언으로 말을 하면 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기 나라 말로 다 알아듣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4마디의 세계적인 방언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권사님이 카운트 앞에서 외치는 겁니다. "hello", "Jesus O.K", "church", "Come on"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런 전도의 열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10년 동안에 이 땅에서 교회를 떠난 영혼이 1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들은 정말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까?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전도의 열정이 회복되지 않는 한 우리는 더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떠나갈 것이며, 그들은 결국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싱가폴에서 1만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를 섬기고 있는 라치드 옹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1만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라고 해서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1만명의 교인이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싱가폴에 단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이 있는 한 저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불신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전도의 열정을 품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전도는 결코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감당해야 할 소명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거룩한 섬김이 전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마음이 이웃에게로 전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 이웃에게로 전염시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전도하고자 하는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처지를 이해하지 않고서 우리는 그들을 주 앞으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저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지나쳐서 잘못된 불신의 문화나 죄와 타협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도할 때 먼저 전도 대상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그들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십시오. 여러분의 복음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아픔의 이야기, 상처받은 이야기 속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격인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히 여겨 주십시오. 저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의 대상자들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전도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20절부터 22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이 성경은 직역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의역한 것입니다. "나는 유대인과 같이 있을 때는 유대인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교의 관습과 의식을 따르는 이들과 같이 있을 때는 그들의 의식에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논쟁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 같이 있을 때도 될 수 있는 한 그들과 잘 어울리려 노력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당한 일은 반드시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들의 신뢰를 얻게 되어 결국 그들을 돕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려고 애쓰는 것은 그들이 자진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를 청하게 해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마지막 22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결론 부분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바울은 철저하게 전도하기를 원하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그들을 이해하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내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해서 그리스도 앞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웃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할 일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으로서 그들을 섬기고 돌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정을 품고 그들을 이해하고 그 상황 속에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종이 되고, 또 열정을 품고, 이웃들의 상황이나 처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이해 자체가, 그 노력 자체가 전도를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이웃들을 잘 이해하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에게 접근하면 이웃들이 좋아하고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러나 그것은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종된 자세로 이웃을 이해하거나 섬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직접적으로 입술을 열어 복음을 전하고 설명하지 않는 한 그들은 아직도 구원된 존재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결정적으로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구체적인 복음 제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대상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나는 유대인들에게 가서는 유대인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저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다시 한번 본문 2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을 위하여 내가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현대어 역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결정적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이 무엇인가를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나누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복음 전도를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엄숙한 의무로 받아들였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얼마나 복음 전도를 절박한 자신의 영적인 의무와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여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가 그렇게 전하기를 열망했던 복음의 정의를 고린도전서 15장 1절에서 4까지의 말씀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말합니다. 나는 이 복음을 너희들에게 알게 하고 싶다. 1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알기를 소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절에서 이 복음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 믿음의 결국은 구원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3절과 4절에서 한마디로 복음이란 성경의 예언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사신 것이 왜 복음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4장 25절에서 그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그가 죽으신 이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사신 이유는 죄 사함 받고 용서함 받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의 가운데, 새생명 가운데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 이제 살아 계신 주님이 되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자 그가 다시 사셨다고 했습니다. 죽으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사심으로 우리의 의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주님이 되시려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복음이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선포되는 그 순간,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한 영혼이 복음 앞에 응답하는 그 순간이 영혼들이 살아나는 순간이요, 구원받은 순간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입술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앞서 소개한 조운파 집사님이 캐딜락을 포기하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하기로 결심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전도할까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전도 전략을 이렇게 정했다고 합니다. 일단 버스나 전철에 타면 이 분의 표현을 빌리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재빨리 빈자리에 가서 앉는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누군가가 자기 앞에 서게 되면 다시 재빨리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혹시 내리는 줄을 알고 그냥 일어서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기 위하여 "피곤하신 것 같은데 여기에 앉으시지요" 그리고 그 분이 자리를 양보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마운 마음으로 상대방이 자리에 앉자마자 주머니에서 4영리 책자를 꺼냅니다. "선생님, 이 책은 내가 평생 읽은 책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는데 한 번 읽어보시지요?" 한 사람도 거절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4영리 책을 읽기 시작하면 옆으로 다가가서 설명을 해 주고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결신하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이런 우리의 복음의 전도, 복음의 증거는 우리들에게 섬김의 태도와 섬김의 정신이 함께 동반할 때에 비로소 효과적으로 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소개해 드린 조운파 집사님이 이런 정신으로 전도하게 된 것은 자기에게 전도한 분이 이런 섬김의 모본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라고 책에서 고백을 합니다. 이 분이 예수를 안 믿던 시절 1980년대 초에 개인 사정으로 가족들과 떨어져서 잠시 하숙 생활을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하숙을 했던 집주인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분은 언제나 조운파 집사님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셨는데, 놀라운 사실은 아침마다 일어나면 집주인이 자신의 구두를 아주 반들반들거리도록 깨끗하게 닦아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발 이 구두까지는 이러지 마시라고 감사하면서 만류를 했더니 그분이 빙그레 웃으면서 어느 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조 선생, 더러운 구두도 닦으니 반짝반짝 빛나지 않소.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그리고 우리가 입고 있는 옷도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겠지요. 그런데 조 선생, 만일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 이 말이 화살처럼 그의 가슴에 찔렸습니다.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 그날 밤 잠이 안 오더랍니다. 뒤척뒤척 거리는데 새벽녘 화장실을 가려고 화장실 곁으로 나가는데 안방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랍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집 주인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소리였다고 합니다. 조 선생이 예수 믿게 해 달라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새벽에 받았던 이 강렬한 충격 때문에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가게 되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도 빚진 자로서 이 사랑을 갚아야지. 그래서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 한해에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는 이웃이 없습니까? 우리의 사랑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이웃이 없습니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는 놀라운 선물을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금년에는 아무쪼록 다만 몇 사람이라도 내가 사랑하는 소중한 영혼들이 주님 앞에 나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교회의 모든 모임과 성도의 교제는 전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계모임이 되고 맙니다. 교회가, 성도가 계모임에 머물게 되면 결국에는 동맥경화증에 걸리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섬김과 헌신과 신앙은 결국 전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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