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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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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문 : 최동규 목사

마태복음은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진 복음서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서론(1-2장)과 결론(26-28장) 사이에 다섯 개의 이야기들[3-4장, 8-9장, 11-12장, 14-17장, 19-22(3)장]과 다섯 개의 가르침들[5-7장, 10장, 13장, 18장, 22(3)-25장]이 교대로 진행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산상보훈(5-7장)은 첫 번째 가르침 단락에 속합니다. 산상설교의 도입부인 팔복(3-8)과 결론부의 마지막 단락(7:21-23)은 ‘천국’에 대해 언급합니다. 마태는 이러한 인클루지오 구조를 통해서 산상설교 전체 주제가 ‘천국’임을 밝혀놓았습니다. 산상설교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에게 마침내 천국에 들어갈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팔복 단락도 첫 복을 언급한 3절과 여덟 번째 복을 언급한 10절이 ‘천국’ 이라는 단어로 감싸여 있습니다. 팔복의 주제 역시 ‘천국’이라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어떤 사람인가를 밝혀놓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 땅에 살면서도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 기준과는 전혀 다른 복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팔복을 묵상할 때 주의해야 할 세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태도는 우리 신앙의 전반에 걸쳐서도 매우 경계해야할 태도입니다. 첫 번째가 ‘율법주의’적 태도입니다. ‘이렇게 살아라, 그러면 너희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면 천국 입장권이 부여된다는 것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산상설교는 율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윤리 규범도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은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서, 마땅히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적주의’적 태도를 주의해야 합니다. 정적주의란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실 것이니까 자기는 가만히 있겠다는 태도를 말합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주로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았을 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합심해서 열심히 기도드렸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도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전심전력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산상설교를 듣다보면, 너무 이상적인 윤리로 생각되어 귀로만 즐기고 실천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미 구원은 받아놓았고, 어차피 내 힘으로 성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등등의 핑계 속에서 나태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변화시켜 주시겠지’하며 정적주의적 태도를 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만 즐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의해야 할 것은 ‘형성주의’적 태도입니다. 형성주의는 구원받은 은혜에 근거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떤 상급을 자꾸 형성해 가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상급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 획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을 형성주의적인 태도로 접근하면, ‘이렇게 살아라, 그러면 너희가 복을 받을 것이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산상설교는 복을 획득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 받을 수 있는 비결을 얻으려는 얄팍한 동기로 성경에 접근하는 자세가 한국 기독교를 매우 천박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에 합당한 적절한 반응을 그의 삶 속에 나타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어떤 반응들을 그의 삶 속에 나타내고 있어야 하는 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수준만큼 결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어떻게 우리가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장차 그렇게 될 것을 소망하면서, 그 기대감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좀 더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후서 3:13-14절이 요청하고 있는 바입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오늘날 한국적 상황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소수공동체가 아닙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할 다수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신반포중앙교회 김성봉 목사님은 ‘책임져야할 다수’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고난 받는 소수’의 자세로 살고 있으면, 스스로는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책임감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인 윤리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않는다면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말했던 가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비율이 25%가 넘어섰지만, 사회의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오늘날 교회가 보다 힘써야 할 일은 외적인 전도운동보다, 내적인 성숙운동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 속에서 올 한해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라기 위해 전심전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첫 단계로 하나님 백성답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산상보훈을 통해 배우려고 합니다. 팔복은 하나님 백성들의 심령상의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8가지의 특성들은 각각 독립적이지 않고 동일한 것의 다양한 측면들입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 백성이라면 기본적으로 8가지의 특성들이 모두 그 삶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 간다는 것은 이러한 특성들이 점차 더 뚜렷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런 특성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도무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팔복에 나타난 특성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자연적인 성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라갈수록 그 삶이 본질적으로 비기독교인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3절만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의 의미가 잘 살아나도록 번역하자면 ‘오! 심령이 가난한 자들아 너희는 축복을 받은 자로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가 될 것입니다. 즉,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면 이다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도 아니고,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 하셨고, 그들은 이미 축복을 받은 사람들인데, 왜냐하면 천국을 지금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오스’는 지고의 복을 의미합니다. 이 최고의 복은 외부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성품이 나타남으로서 그가 축복을 받은 존재이며, 천국에 이미 속한 사람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축복을 받은 사람은 ‘심령의 가난’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가난은 무엇인가 결핍되었다는 것인데, 심령이 가난하다고 했으므로, 경제적인 궁핍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영적 지각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영적 지각이 가장 결핍되어 있는 사람은 불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코 불신자를 보고 축복받았다고 하거나, 천국을 소유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욕심이나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목표나 신념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성경을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으로 정죄하며, 그런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살후 3:6, 11).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은 영적인 파산 상태에 있는 자신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를 절대적으로 인식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절절히 체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축복 받은 사람이며,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세상에는 경제적으로 풍족하든 궁핍하든 심령이 부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물질이 많을수록 심령이 가난하기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에 재물을 쌓아두고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질이 풍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필요를 절절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삶의 많은 영역을 물질로 커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부자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오히려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의지할 재물이 없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게 될 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가난하다고 해서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더 자존심이 강하고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필요를 거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재물에 더 집착하고, 속히 부자가 되어 재물을 의지하며 살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무소유로 살아야 한다거나, 돈만 생기면 저축하지 말고 남에게 줘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 없이는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심령의 가난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필요 또한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만하면 됐다’ 혹은 ‘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령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항상 구걸하는 자세가 됩니다. 사람에게 의존하고 사람에 매여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하나님의 나라는 독불장군의 나라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으나 이 세상 백성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땅에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이 세상 백성들과는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정신없이 세상을 좇아갈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는 특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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