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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벧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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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동규 목사

새해가 되자 서른 이상의 처녀 총각들은 슬슬 나이에 부담을 느끼고, 마흔을 넘어선 분들은 한 살을 더할수록 삶에 대한 자세가 보다 진지해지는 것 같습니다. 반면 어린아이들은 한 살 더 먹는 일을 한 계급 진급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새해 첫 날, 요한이는 한살 더 먹었다고 일어나면서부터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참! 이제 8살이니까’라며 행동을 바로잡곤 합니다. 은수도 이제 5살이 되었다고 그 동안 애지중지하던 우유병을 내려놓고, 우유를 컵에 부어 달라고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한 살 더 먹었으니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을 믿은 지 또 한해가 지났는데, 얼마나 성장했나?’ 생각해봅니다. 천박한 인격의 변함없음에 가슴만 아픕니다. 지난 한해 ‘하나님 백성답게’ 살자고 부지런히 설교했으나, 여전히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내 모습이 애통합니다. 한 살 더 먹은 아이에게는 나이에 합당한 행동을 강하게 요구하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한해를 더할수록 더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강하게 요청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합니다.

오늘날 ‘교회 성장 운동’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성장을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었고, 세미나들이 개최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사실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하다가 질적인 하락현상을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예배당 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성장했고, 교인 숫자도 성장했습니다. 1993년에 미국의 ‘크리스챤 월드'지는 세계 50대 대형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으며, 또 세계 10대 교회 중 5교회가 한국 교회들이라고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전 국민의 25%이상이 기독교인이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새벽기도를 드리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외적 성장에 비해서 신앙 윤리는 걸맞게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상실하고 ‘맛 잃은 소금’이 되었습니다. 사회의 부패를 막기보다는 오히려 부패의 온상이 되어 사회와 대중매체의 지탄을 받는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교회의 성장은 분명 중요하지만, ‘일단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보자’는 생각은 옳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된 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장해야 합니까? 성경은 유년시절의 예수님에 대해서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성장과 함께 정신도 성장하셨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성장하셨습니다. 신성은 변함없는 것이므로 자랄 리 없지만, 인성적인 측면에서는 예수님도 자라셨습니다.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있는 성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예수님이 자라신 것처럼 균형 있는 ‘자라남’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성경이 어떻게 자라도록 요청하고 있는지를 살피보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 3:18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지난 성탄예배 때, ‘예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명제는 신앙의 초기부터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묵상할수록 깊어집니다. 똑 같이 십자가를 믿어도 해가 거듭되고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깊어지고 저를 아는 지식도 풍성해져야 바르게 성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저께나 오늘이나 동일하다면 심각한 장애가 있는 것이지요. 성경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고 말합니다. 어제 알았던 하나님의 사랑보다 오늘 아는 하나님의 사랑이 좀 더 넓어지든지 길어지든지 높아지든지 깊어지든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장에 있어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저를 아는 지식’의 성장도 중요합니다. 몸은 자라지만 지적요소가 자라지 않는다면 건강하게 성장한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신령하게 자란 것이 아닙니다. 물론 바르게 안다고 해서 반드시 바르게 행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는 바르게 행할 수도 없습니다. 지식이 바른 행동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무시하고, 체험만 강조하면 결코 바른 신앙인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또한 성장함에 따라 부드러운 이유식에서 단단한 음식으로 바뀌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늘 소화하기 쉬운 말씀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난해하고 어려운 말씀, 혹은 사회적인 여러 문제들(복제, 낙태, 아동 학대, 전쟁 등)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은 어떤 것인지 분별하기 위해서 애써 연구하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4)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성장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안타까워합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응석받이로 남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이 먹어도 응석부리로 있으면 꼴불견입니다. 해가 거듭할수록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자로, 육신에 속한 자에서 신령한 사람으로, 말씀의 초보를 배우던 자에서 마땅히 가르칠 수 있는 선생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사실 이처럼 자라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중생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처럼, 자라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중생한 자를 반드시 자라게 하십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주님께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은 ‘성장’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의 무책임과 무관심을 변명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심고 물주는’ 일을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심고 물주는’ 일 자체가 필요 없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동학대와 그 영향에 대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학대를 받으며 자란 아동은 신체장애나 정서장애, 혹은 행동장애가 생긴다고 합니다. 2001년 6월 13일 경, 로런 캘호운이라는 8살 난 미국 소녀가 쓰레기와 오줌과 인분이 있고 이가 들끓는 좁은 벽장에서 구조된 일이 있었습니다. 친엄마인 바바라 캐서린 앳킨스(30세)와 양아버지인 케니스 레이 앳킨스(33세)가 4년 동안 그 속에 가두어 두고 학대했습니다. 원래 건강한 아이였다고 하는데, 구조당시에는 몸무게가 고작 11.3kg이었고,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30cm가량이나 작았으며, 의사소통은 세 살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 예로 들기조차 마음이 아픕니다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실지라도 사람이 사랑으로 돌봐주느냐 학대하느냐에 따라 성장의 정도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고 해서 성장을 위해 사랑으로 돌보지 않으면 영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 되기 쉬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부지런히 심고 물을 주는 일이 무엇인지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을 사모하는 일입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말씀은 영적 성장을 위한 영양분과 같아서 갓난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말씀을 사모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9-12)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바쁘면 가장 빨리 무시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가 무시되면 해를 거듭할수록 필경 심각한 영적 장애가 나타나게 됩니다. 평상시에도 규칙적으로 말씀을 심고 기도의 물을 공급할 때에야, 비로소 건강한 자라남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모가 영적으로 튼튼해지면, 자녀도 튼튼하게 자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올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라기 위해서, 다음 주부터 산상보훈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삶과 인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라는 말보다 ‘하나님의 백성답게’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자라남이 단지 개인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 2:19)고 했고,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하나님의 몸입니다. 몸은 여러 지체를 가진 유기체이므로 한 지체의 자라남은 다른 지체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유기체라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어도 건강하면 기본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몸일수록 균형 있고 보기 좋게 자랍니다. 때로 그러한 균형을 잃고 특정 지체만 비대해 질 때는 아마 다이어트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 도움으로 균형을 잡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성장만을 위해 도모할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가 전도한 양떼들이 자라는 것이 감사 제목이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살후 1:3). 올해는 이러한 자라남으로 인한 감사가 우리 교회에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라남’을 위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해서 우리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딤전 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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