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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13)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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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혁 목사

  어제 토요일 아침 성혜진 어린이가 저에게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성혜진 이에요. 목사님이 지난 주일 설교 말씀 중에, 목사님의 어머니께서 목사님을 남한으로 보내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초등부 전도사님의 설교 말씀이 생각 났어요. 예수님도 놀라실 만한 믿음이 있다라는 말씀이 생각이 났는데, 백부장이 로마인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와서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고쳐진다고 하자, 예수님은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목사님의 어머니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목사님을 남한으로 보내셨고, 목사님은 하나님이 목사님을 지켜주실 거라 믿고 남한으로 무사히 오셨을 거에요. 그래서 목사님의 어머니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주 놀라게 하셨을 것 같아요. 저는 아직 하나님을 놀라게 할만한 믿음은 없지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고 저와 함께 하실 것을 믿어요. 왜냐하면 제가 무섭거나 두려울 때, 저에게 용기를 주시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하나님께서 놀라 만한 믿음을 가지고 싶어요. 목사님 안녕히 계세요. 2005/1/15/토요일 성혜진 올림♡” 얼마나 예쁜 글인지 모릅니다. 초등부 어린이가 어른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는 일이 예쁘고 설교 말씀을 잘 듣고 깨닫고 가슴에 새긴다는 것이 예쁘지요. 성혜진 어린이 여기 나오세요. 내가 예쁜 양 인형을 선물로 주겠습니다. 격려의 박수 한번 쳐 주세요.

  사탄 마귀가 하는 중요한 일은 평화를 깨트리는 일입니다. 사탄 마귀가 행복하게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 뱀의 모습으로 다가와서 저들을 유혹하므로 저들이 누리고 있던 평화를 깨트려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트려버렸습니다. 부부간의 평화를 깨트려버렸습니다. 자녀들간의 평화를 깨트려버렸습니다. 맏아들이 둘째 아들을 쳐 죽이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사회적인 평화도 깨트려버렸습니다. 가인의 자손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4:23).

  예수님이 하시는 중요한 일은 평화를 이루시는 일입니다.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사9:6). 여기 ‘평강의 왕’을 영어 성경은 ‘Prince of Peace’ 즉 ‘평화의 왕자’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평화의 왕자’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아침 천군 천사는 이렇게 찬양을 했습니다.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Peace on earth among men!
 
오늘 아침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제를 가지고 13번 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입니다. 평화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화평]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9). 평화는 행복의 조건이고 불화는 불행의 요건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불화했고 에서와 야곱이 불화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이 불화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불화의 역사로 이어져왔습니다. 전쟁과 불화와 불행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평화의 왕자’로 찾아오셨습니다. 평화가 없는 이 땅에 평화를 이루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평화의 왕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오늘 아침 ‘평화의 왕자’가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평화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하셨고, 둘째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루게 하셨고, 셋째 평화케 하는 사명과 직책을 맡기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던 미친 여자였습니다.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졌던 길거리의 창녀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도  없었던 버림받은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았던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절망의 수렁에 빠졌던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뿐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 마리아”란 뮤지컬에 등장하는 군중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구해줘요 메시아 미친 미친 미친 미친 이 세상 미친 세상.”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미친 사람들이었고 모두가 버림 받은 절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거부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예수님에게 간청했습니다. “랍비여 위험합니다. 그들이 당신을 감시하고 있는데 랍비여 위험합니다. 그들이 당신을 모함하고 있는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막달라 마리아만은 안돼요. 랍비여 위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받아주셨습니다. 자신과 가깝게 지낼 수 있게 만들어주셨고 하나님과 가깝게 지낼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평화의 왕자 메시야와 평화를 이루게 되었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게 되었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꼭 붙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수가성 여자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들로부터 버림 받았고 수가성 이웃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성전에 가까이 가서 예배도 드릴 수 없었던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았던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자를 받아주셨습니다. 그가 사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가서 그를 만나주셨고 그녀와 친절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녀로 하여금 모든 것을 털어놓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여자는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소 사람 사울은 종교적 위선과 교만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훼방하고 예수님을 핍박하던 하나님의 원수였고 반역자였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살인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없는 저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사울 만나기를 꺼리고 있었습니다. 제자 아나니아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고 핍박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 사람을 만나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반역자 사울을 만나주셨고 받아 주셨습니다. 사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해주셨고 예수님과 평화를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사울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하며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그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2:12-14). 사울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왕자가 오셔서 이루신 평화의 첫째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둘째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평화를 이룬 후 자기를 멸시하고 꺼리고 거부하던 예수님의 제자들과도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경건한 다른 여자들과도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눅8:1-3을 읽어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평화의 왕자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여자들도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들을 따라 다니면서 저희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버림 받았던 여자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주님의 제자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실 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막달라인라 하는 마리아와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니라.” 그 다음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나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와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수가성 여인도 평화의 왕자을 만난 후 수가성으로 뛰어가서 수가성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자기를 돌로 치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자기를 멸시하고 무시하고 정죄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간증을 했습니다. “날 좀 보십시오. 날 좀 보십시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십시오. 그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많은 수가성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버림 받았던 수가성 여인은 이제 수가성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고 은인이 되었습니다. 수가성 사람들과 완전환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사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들과의 관계가 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아나니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은 후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메섹에 있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유하며 그들과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제하며 그들과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안디옥에 가서 그곳에 있던 이방인들과 함께 지냈고 그 후에는 소아시아과 마게도냐와 유럽 곳곳을 두루 찾아다시면서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등 모든 이방인들과 친교를 나누며 그들과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인생관의 변화요 세계관의 변화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셋째 평화하게 하는 사명과 직책을 맡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화의 왕자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이룬 평화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2,1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과 직책이 세상과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헌장인 로마서 12장에서 구원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사도 바울은 이 화목과 평화의 사명을 수행하기위해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의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습니다.

  이 사명과 직책은 오늘 구원 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사명과 직책입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는 사명은 수행하기 힘든 사명이지만 가장 고귀한 사명입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사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귀한 사명을 우리들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아마 이 화목과 평화의 사명을 가장 잘 감당한 사람이 성 프랜시스였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한경직 목사님은 성 프랜시스를 따라서 한국교회 안에 평화를 이루는 일을 힘쓰신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한국교회를 위하여 일하면서 제일 애쓰신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이렇게 대답하신 일이 있습니다. “화평이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일 교회가 화평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지요.”

  저는 너무너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혜와 사명 중 하나를 지적하면 이땅에 조그만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싫어하고 비판하고 미워하던 사람들과 화목과 평화를 이루게 된 일입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일본 교회 지도자들과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고 일본교회 지도자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들도 저를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본래 북한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북한 사람들과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고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돕고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 사람들과 그곳에 사는 조선족들에 대해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던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그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교류하는 가운데 그곳에 사는 일부 우리 조선족 동포들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상조회 회장인 연길의 이영숙 회장이 최근에 저에게 이런 과찬의 글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김목사님! 한해 너무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목사님이 중국 조선족 연변 고아에 닿기까지 [베푼]사랑의 손길은 우리들의 뼈 속까지 숨겨져 참된 몸과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김목사님은 연변 고아들의 명줄입니다. 만약 그 고아들이 김명혁 목사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산 송장일 뿐입니다.” 그저 감사한 것뿐입니다. 저는 급진주의 신학자들을 너무 비판하며 싫어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급진적 교단인 기장 교단의 지도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그들과 평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고 박종화 목사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전병금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지역 감정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주의 이동휘 목사님과 사돈을 맺게 되었지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오태순 신부와 친하게 되었고 불교의 법륜 스님을 너무 존경하게 되었고 천도교의 박남수님과 친하게 되었고 원불교의 박청수 교무와도 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과 평화하라고 분부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지 말고 그저 평화하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평화하게 지내라! 이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명령입니다. 사탄 마귀는 평화를 깨트리는 일을 합니다. 사탄이 제자들을 공격했을 때 제자들은 서로 다투고 싸웠다고 했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다툼이 난지라”(눅22:24). 베드로는 다투다가 그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 마귀가 공격하면 어느 순간에 넘어질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화를 내며 다투게 될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게 될지 모릅니다. 사탄 마귀의 공격을 회개의 기도로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평화를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성도들과의 친밀한 평화를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신 고귀한 사명과 직책을 수행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멀리 있는 사람은 고사하고 우선 가족과 평화하고 사돈과 평화하고 친척과 평화하고 성도들과 평화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서와 평화하고 남북과 평화하고 외국인들과 평화하고 모슬렘을 비롯한 타 종교인들과도 평화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명령이고 축복의 명령입니다. 다시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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