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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활이 곧 찬양입니다 (엡 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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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어느 전도사가 주일에 골프장에 갔습니다. 이것은 본 천사들이 하나님께 혼을 내주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혼 재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전도사가 쳤을  때 놀랍게도 홀인원이 되었습니다. 골프하는 사람들에게 평생 한번 있을까 싶은 기쁨이 홀인원. 그러나 이 전도사의 경우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기뻐할 수 없습니다. 자랑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전도사가 주일 날 골프장에 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홀인원이 나왔으니 이거 자랑해야겠는데, 자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소리 내서 감사한다는 것은 쉬운 거 아닙니다. 소리 내서 찬양한다는 것도 쉬운 것 아닙니다.
시편은 대부분 찬양입니다.
그 찬양을 살펴보면 감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과 대대에 이르는 성실하심에 감사하는 겁니다.
송축하는 겁니다. “송축하라” 특히 시103편에서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송축하라는 것은 곧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에는 찬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족하게 하셨다.” 등등
이러한 감사와 찬양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왜, 누구를 찬양하느냐 하는 겁니다.
누구를 찬양하느냐?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누구에게 감사하느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 왜 하나님을 찬양하며, 왜 하나님께 감사 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하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민족, 당신의 나라, 당신의 백성에 대해 하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나온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장막을 친 곳이 바알스볼 맞는 편 바닷가 입니다. 그들 앞에는 바다가 있어 건너갈 수 없기에, 그들이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고 바로가 말할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이 백성을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게 됩니다. 앞에는 바다이기에 뒤쫓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꼼짝도 못하고 잡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과 원망 소리가 커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세는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셔서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도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이스라엘자손을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세가 손을 바다위로 내밀자, 물이 이집트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흘러 이스라엘 자손을 뒤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는 하나도 남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5장. 모세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그 크신 일을 찬송합니다.
그러자 아론의 누이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니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면서 소고를 잡고 춤을 춥니다.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에게 그들에게 하신 일들을 찬송합니다.

시편도 온통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광야 40년을 인도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요단강을 육지 같이 건너고 여리고성을 얻게 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순간순간마다 그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을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제 구시, 우리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세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거기에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날마다 미문, 아름다운 문이라고 부르는 성전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이 구걸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봅니다. 베드로가 말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앞에 홍해와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문제가 갈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붙잡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더 이상 문제가 문제 아니라 그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마음껏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선포하십시오. 자랑하십시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네 번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첫 번째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 5천명을 먹이실 때 입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초라한 음식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한 끼 식사인 그 최소한의 양식을 놓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그 자리가 바로 기적의 출발이었던 겁니다.
아마, 우리의 감사는 언제이겠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아닙니다. 우리는 5000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 남을 수 있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게 될 때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그 초라한 음식을 놓고도 감사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흡족하지 않지만 그러나 작은 거라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은요, 행복해서 감사하고 행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한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기에 행복한 겁니다.
늘 불행하여 사는 사람은 불평만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무얼 한다는 거냐 불평합니다. 이건 나 혼자 먹어도 시원치 않겠다고 불평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 나타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5000명 먹고도 남을 정도로 주지 않으시냐고 화를 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기적은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그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5000명 먹일 수 있는 빵으로 5000명 먹였는데 그게 기적입니까?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겠습니까? 돈 주고 5000명 먹을 수 있는 빵을 사다 먹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돈의 능력이 더 크다고 생각하며 사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감사하고 돈이 없으면 불평하고…….
지금 가진 것 지금의 형편과 처지 그 모든 것이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주님께 감사 하십시오. 그래도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여 됩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하나의 감사가 마태복음 11장 25절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때 “감사합니다.”는 “찬양합니다.”와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개정판에 보면 “감사합니다.” 그 왼쪽에 ㄷ으로 표시하고, 아래쪽에 보면 ㄷ표시에 “또는 찬양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앞 20절부터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고라신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화가 있다. 너 가버나움아”
왜 그러셨습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들려 주셨는데 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나타내는 기적들을 보여 주셨는데 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짜증나셨던 것 같습니다. 화가 나셨던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은 정성을 드려 전도한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여기 어린아이는 글자 그대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부모를 의지해야만 살아가는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아는 게 없고, 능력이 없어,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냉수 한 그릇도 마음껏 먹을 수 없는 작은 소자들 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곳곳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노라 하는 사람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정성을 들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니다.
때로 내가 정성을 다하고 심혈을 다 기울였음에도 실패 할 때 있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하십시오. 그럼에도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2차 대전 때, 유럽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군의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병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가시철망 병’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극도로 우울해지고, 먹어도 살이 찌지 않고, 전신이 쇠약해져서 누워만 있으려는 증세입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의 방법도 없습니다. 다만 철망 속에 갇혀 사는 상황에서 온 병이라고 해서 가시철망 병(Barbed-wire Sick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들의 형상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거의 하루 종일 투덜대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가시철망이 그들의 희망을 앗아가고 감사할 수 있는 여유를 박탈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짜증만 나는 겁니다. 사사건건 불평만 늘어놓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 이런 병에 걸린 것 아닙니다. 하루 종일 가시철망만 보고 있는 사람은 이런 병에 걸렸고, 철망을 넘어서서 푸른 하늘을 보고, 철망 아래 핀 작은 꽃을 보며, 고향도 그려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은 가시철망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성을 다하였지만 결과가 시원치 않은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 그리고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을 보고 감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어렵습니까? 힘듭니까? 불평하기보다 감사하십시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려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불평 하십니까? 왜 절망하십니까?

또 하나, 예수님의 감사는 요한복음 11장 41절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게 하시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고 하는 슬픔과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 때문에 감사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기 보다는 슬퍼하고 짜증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는 겁니다.
지나친 예 같습니다만, 감사헌금들 하십니다. 대부분 좋은 상황, 좋아진 상황 때문에 하는 감사들입니다. 대부분 감사할 기쁜 일이 생겼기에 하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적습니다.
만약, 어떤 상황에서도, 이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도,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해매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그래서 이 상황이 변하여 복이 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은 나사로가 살아 나온 뒤에 감사하신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분명하게 믿으신 겁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어떻게 해 주세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감사하고 안 되면 불평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이렇게 해 주세요” 하시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고 감사합니다.
상황은 힘들고 어렵지만, 어려울 정도가 아니라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끝장난 상태지만, 그러나 전지전능 하나님 때문에 감사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앙입니다.

또 하나의 감사는 누가복음 22장 17. 19절에 나옵니다.
최후의 만찬 그 자리에서, 17절 “잔을 받아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이것을 받아서 나누어 마셔라.” 19절,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때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 빵을 예수님의 몸이며, 그 잔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런 상항에서도 감사할 수 있겠어요?
만약 예수님이 우리와 같다면 늘 화내고 불평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뒤로 하고 세상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것도 영광을 받으려 보낸 것이 아니라 죽으러 보낸 겁니다. 그것도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대신 죽으려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같으면 화 내셨을 겁니다.
능력을 행하셨어요.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사람 살리셨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이런 상황이면 우리들 같으면 벌컥 화를 냈을 거고, “내 다시는 너희를 고치고 살리고 도와주나 봐라” 그랬을 겁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셨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뭐 죄지은 있어야지요. 내가 죄를 지어 십자가에 달렸다면 덜 억울할 텐데 아무 죄도 없는데, 그것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니…….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요. 생각해 보면 화 날만 하지요. 짜증정도가 아니라 화가 나서 모든 것 다 뒤집어 버리고 싶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죽음을 앞두고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영생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감사가 곧 여러분의 감사가 되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찬양이 곧 여러분의 찬양이 되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주변을 돌아다보십시오.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과 그 감사와 찬양을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주님의 사랑이 있어,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합니다. 동시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양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는 감사하면서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하고 원망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는 찬양하면서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서는 화내고 저주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찬양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그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겁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룰 것이고 그의 이름은 크게 떨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에 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그를 축복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만에 하나 아브라함이 사람들의 저주 받을 짖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저주했기에 하나님에게 또한 저주하는 그들을 저주하셨다면 그 사람들에 받는 저주에 대한 책임을 아브라함이 져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말씀하신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마10:12-13)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평화를 빌면 그 평화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고 우리가 축복하면 축복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겁니다. 만약 그 집이 우리를 영접하지 않는다고 화내며 저주하면 그 저주가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때 저주 합니까? 영접해서 먹을 것도 주고 그러는데 저주합니까? 아닙니다. 영접하지 않을 때 입니다. 문전 박해 할 때 입니다. “그러냐? 그래 어디 너 그래서 잘 사나보자” 그럴 때 저주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저주하는 그 저주는 되돌아온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3장 9-12절에,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습니까?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가 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짠 샘은 단 물을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사람은 저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상이나 사람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주하지 마십시오. 축복만 하십시오. 특히 화내지 마십시오.
그런 말들 합니다. “화가 나면 무슨 말인들 못하느냐?”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화나면 무슨 말인들 해도 괜찮은 겁니까?

세월이 지나 모세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가 동족에게로 갔다가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어때요? 성깔 있지 않습니까? 내 동족을 때린다고 그 사람을 죽여서 모래에 묻을 수 있습니까?
그 일로 하여 그는 광야로 쫓겨나게 되고,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칩니다. 그러면서 못된 그 성질을 많이 자제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다닐 때, 숫한 불평과 원망을 들으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다 해줍니다. 이집트에서의 모세 같았으면 수도 없이 화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 투정하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만나를 내려 내주었습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투정하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메추라기를 내주었습니다. 그런 것 한  두 번 아닙니다. 그래도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했고, 그래도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 다 주었습니다. 화난다고 사람 쳐 죽이던 모세가 아닙니다.
그런데 르비딤이라는 곳에 진을 쳤을 때,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마실 물 달라고 대들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 사건을 반석에서 물이 나와 모든 사람이 마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민수기 20장에서 이야기 하는 이 사건은 왜 모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수 없는 지를 말해 줍니다.
그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늘 그리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너와 너의 형 아론은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에게 명령하여라. 그러면 그 바위가 그 속에 있는 물을 밖으로 흘릴 것이다. 너는 바위에서 물을 내어 회중과 그들의 가축 떼에 마시게 하여라.”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하신대로 주님 앞에 지팡이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바위 앞에 불러 모았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반역자들은 들으시오. 우리가 이 바위에서 당신들이 내실 물을 나오게 하리오?”
그리곤 팔을 높이 들고, 그의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물이 솟아나았고 회중과 그들의 가축 떼가 마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네가 이 총회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모세도 사람인데 왜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왜 짜증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그렇게 잘 해주었는데 불구하고 그걸 다 잊고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드는 그들에 대해 왜 마음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화를 낸 겁니다.
“반역자들은 들으시오”
그리곤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쳤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20장 에는 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바위에서 명령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모세가 팔을 높이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감정을 드려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성질부리지 마십시오.
이럴 때 저주하게 되고 그 저주는 결국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조카 롯 하고 목초지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화낼 만도 하지요. 조카 녀석이 말입니다. 그것도 그렇게 가축이 번성하여 많이 소유하게 된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아브라함 때문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으로서는 롯을 불러 화 낼만 합니다. 야단 칠만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 그 너른 땅을 보게 하고, 롯에게 원하는 땅을 먼저 고르라고 합니다. 그래서 롯이 먼저 마음에 드는 땅을 골라 갑니다. 아저씨 되는 아브라함에게 양보하는 빈말 한 마디 없이 말입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화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동서남북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 하십시오
기왕에 하는 것 축복하십시오.
그 사람이 잘 되는 것 배 아파하지 마십시오.
그를 축복하면 그 복이 나에게로 임하게 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답하십시오. 거기에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고 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감사와 찬양은 어느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 사는 삶이 곧 감사요 찬양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와 찬양은 내 뜻이 이루어졌기에 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의 뜻, 여러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것 만족하고 감사하려면, 그것 다 채우고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평생 못 하고 죽을 겁니다.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기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기에 하는 겁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찬양 “다 이루었다.” 이 한 말씀은 그 어느 찬양보다 위대합니다. 전 언제나 이런 찬양하기를 소원합니다. 언제 어느 때고, “주님 다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찬양하길 소원 합니다. 어느 때든 주님 부르시면, “다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찬양하며 주님 앞에 서기를 소원합니다. 이 보다 멋진 찬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찬양은 이 다음이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삶과 생활이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찰 때 할 수 있는 찬양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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