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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14) “서로 용서하라 (마 18:21-35, 엡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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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혁 목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 동시에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마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을 세밀하게 분석하면 가장 독특하고 가장 진한 색깔은 용서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의 색깔은 용서가 아닙니다. 연인들간의 사랑의 색깔도 용서는 아닙니다. 형제 자매들간의 사랑의 색깔도 용서는 아닙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들간의 사랑의 색깔도 용서는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의 색깔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해 타산적이며 조건적이고 감정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은 자기 중심적이지도 않고 이해 타산적이지도 않고 조건적이지도 않고 감정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은 죄인들을 그저 받아주시고 그저 품어주시는 용서의 색깔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본래 ‘용서’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인 이후 우리 인간들에게는 용서 대신 ‘원수 갚음’ 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원수 갚음’의 역사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 안에도 ‘용서’ 보다는 ‘원수 갚음’이 더 만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의와 자유를 빙자한 '원수 갚음'이 만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소리보다는 분노와 정죄의 소리가 더 요란한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정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용서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구약 시대에도 나타났지만,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도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용서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준비와 예표에 불과했습니다. 각종 잡다한 살인죄와 각종 잡다한 간음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기 시작한 것은 그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세상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왔노라”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온 중풍병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그리고 이 말씀에 항의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0,17).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본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사랑은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푸신 사랑의 색깔도 용서의 사랑이었고, 수가성 여인에게 베푸신 사랑의 색깔도 용서의 사랑이었으며, 베드로에게 베푸신 사랑의 색깔도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의 색깔들처럼 로맨틱한 사랑의 색깔도 아니었고 황홀한 사랑의 색깔도 아니었고 행복한 사랑의 색깔도 아니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한 주님의 사랑에, 배반하고 저주하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무슨 로맨스가 있었으며 무슨 황홀함이 있었으며 무슨 행복감이 있었겠습니까? 용서의 사랑뿐이었습니다.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신 용서의 사랑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용서의 사랑을 베푸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자기 옆에서 죽어가는 행악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저들을 위해서 하늘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24). 그의 입에서는 저들을 향한 원망이나 불평이나 정죄의 말은 한 마디도 튀어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용서, 용서 뿐이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흉악범 한 사람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흉악범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까지 부여하셨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에는 용서뿐이었습니다. 로맨스도 황홀함도 행복감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용서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비극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가장 악독한 죄인이 누구였을까요? 베드로였을까요? 저는 주님께서 용서하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가장 악독한 죄인은 사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예수님을 핍박한 반역의 죄에다가 추가해서 자기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주장한 교만과 위선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기를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주장하던 교만한 위선자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악독한 죄는 자기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의 교만과 위선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라는 무서운 저주의 말씀을 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악독한 죄인이었던 사울의 죄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을 예수님께서 붙잡으셨고 만나주셨습니다. 사울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를 받게 하시므로 그의 모든 악독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세상의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하신 일입니다.

  물론 한 가지 조건은 있었습니다.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죄인들이 가슴에 지녔던 조그만 뉘우침이 그 조건이었습니다. 그 보잘 것 없는 조그만 뉘우침을 보시고 주님께서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하신 것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수가성 여인에게도, 베드로에게도, 간음현장에서 집힌 여자에게도,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도, 하나님을 훼방하던 사울에게도, 별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의 가슴에 조그만 뉘우침들을 지녔었습니다. 베드로는 울면서 통곡까지 했지요. 예수님은 그것들을 보시고 저들의 모든 죄악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 그라이더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 받아야 할 사람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회개입니다.” 놀만 스나이스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는 언제나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지만 언제나 진정한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추악한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용서를 받을 줄 알고 사랑을 받을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을 줄 아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교만한 바리새인이 되면 용서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뉘우침이 있는 죄인이 되면 용서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보잘 것 없는 조그만 뉘우침과 회개를 가슴에 품고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나타내 보이므로 모두 죄 사함의 사랑과 죄 사함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용서 받은 죄인들 안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추악한 죄들을 용서하시고 나서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서로 용서할 수는 없느냐? 너희들도 나를 좀 닮을 수는 없느냐?”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용서의 마음을 넣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용서 받은 죄인들 안에 나타납니다.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들 안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해지고 뻣뻣하던 사람이 부드러워지며 무정하던 사람이 따뜻해집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자기가 연약하고 허물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과 건방짐이 사라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꼭 같이 연약함을 지닌 허물진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비판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대신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품으시는 인자와 긍휼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용서를 베푸는 사람으로 바뀌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용서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사울이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바뀌어졌고 용서와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자기 마음에 부은바 되었을 때 자기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만하고 자만하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정하고 냉정하던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용서의 마음으로 바뀌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라는 말과 용서하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서로 용서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2-14).

  신약시대와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죄를 범한 형제들에게는 물론 자기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원수들을 향해서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분노를 품은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용서하되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마18:22). 저들은 자기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그래서 우리는 저들의 신앙전통을 기리며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성도의 신앙 본 받아 원수도 사랑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손양원 목사님도 자기를 총살한 인민군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린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강변교회 초기의 신자였던 조춘국 집사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후 죽이고 싶어하던 원수 같은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이와 같이 용서 받은 죄인들의 가슴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서로 용서할 수는 없느냐? 너희들도 나를 좀 닮을 수는 없느냐?” 사도 바울은 지금도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셋째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용서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용서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그리고 용서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용서는 용서를 낳고 용서는 또 용서를 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하나님은 또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 중요한 진리를 예수님께서 여러 번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분부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하게 강조해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5).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아야 할 존재들인데 만약 하나님께서 나중에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강조해서 하셨습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마6:12).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때 우리들의 기도는 보다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용서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용서가 무슨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일종의 공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 같은 용서는 주님 앞에 설 때에 그의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종의 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사랑의 원자탄 같은 용서도 주님 앞에 섰을 때 그의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종의 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서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살 때 우리는 용서를 많이 하여야 할 줄 압니다. 여러분들의 용서의 예금 통장에 얼마나 용서가 저축이 되어 있습니까? 빈 통장입니까? 아무 날 아무 곳에서 누구를 용서했다 아무 날 아무 곳에서 누구를 용서했다 라는 용서의 저축이 많이 되어 있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용서의 예금 통장에 용서를 많이 저축하도록 하십시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사랑을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용서의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은 그의 인격이 용서의 인격으로 바뀌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와 겸손과 불쌍히 여김과 동정과 용서와 사랑의 인격으로 바뀌어지고 있는 사람이 가장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용서를 많이 베푸는 사람은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게 될 것이고 많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러분들이 모두 용서를 받을 줄 아는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줄 아는 더욱 더 축복 받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를 받을 줄도 알아야 하고 용서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용서를 받으며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 하시기를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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