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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기본(3) : 아버지의 마음 알기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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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늘 날씨 때문에 감사하는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렇게 좋은 날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감사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하루는 굉장히 중요한 교회의 행사일 이었는데 비가 폭포수같이 쏟아졌습니다.
온 교인들이 긴장을 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폭우가 쏟아져서 교인들도 적게 오고 행사를 치르기가 참 어렵게 되었는데 오늘은 목사님께서 뭐라고 감사를 하실 것인가, 도저히 감사할 조건이 안 되는데 뭐라고 감사할 것인가 참 궁금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오셔서 “지금까지 우리가 예배드릴 때 오늘처럼 이렇게 날씨를 주지 않고 그동안 좋은 날씨를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부산에는 오늘처럼 이렇게 눈이 많이 와서 예배드리는데 지장된 적이 없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동안 눈 오지 않은 것 감사하면서 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부산에는 특별히 눈 오면 산복도로(山腹道路) 같은 데는 아무리 염화칼슘을 뿌리고 모래를 뿌린다고 해도 올라 갈 수 없는 길들이 너무 많은 데 하나님께서는 적당하게 눈을 조절해 주셔서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 눈만 좀 많이 와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경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어떤 책이라고 했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코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서 생령(生靈)이 되게 하신,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살아있는 말씀, 능력 있는 말씀, 생명 있는 말씀이 되게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말씀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가는 곳곳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야 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가장 기본적으로 먼저 잘 듣고, 많이 읽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는 방법이 많이 있겠지마는 그 가운데 하나가 2005년도에는 맥체인 식(M'Cheyne 式) 성경읽기를 한번 해보자, 그래서 맥체인 식(M'Cheyne 式)으로 성경을 읽는데 하루에 넉 장씩 성경을 읽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영혼의 양식인 성경을 읽기 전에는 육신의 양식인 밥을 먹지 않는다, 영혼의 양식인 성경을 읽기 전에는 마음과 생각의 양식인 신문이나 책을 읽지 않는다는 다짐을 해보자고 했는데 지난 한 주간동안 그렇게 살아보셨습니까? 이제 그렇게 살아보십시다. 앞으로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까지 계속 말씀을 그렇게 가까이 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1. 성경 전체의 이야기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주제가 뭔가, 성경이 뭘 이야기 하는 책인가 하는 것을 알고 읽으면 전체 줄거리를 알고 책을 읽으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어야 할 성경이 한마디로 뭘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주에도 성경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책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는 책이라고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 기록해 놓았습니다.
가인은 누구하고 결혼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안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얻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성경 속에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성경은 어떤 책이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죄인 것을 깨달아서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게 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을 통하여서  아담 안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축복을 에덴동산의 모든 축복을 회복시키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책은 우리를 구원시키는 책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성경을 배우는 곳이 여러 곳 있는데 대표적인 연구원을 들라고 하면 크로스웨이 성경연구원과 베델 성경연구원입니다.
크로스웨이 성경연구원의 총 주제가 무언가 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맥락에서 죽 꿰 나가는 것이 크로스웨이 성경연구원입니다. 베델성경은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입장에서 전개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게 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끼리는 사랑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 아래로는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축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죽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타락한 인간, 멸망에 처해 있는 인간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십니다.
여자의 후손 중에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약속이 타락한 다음에 바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모 판(板)으로 삼아서 그 백성 가운데 다윗의 자손, 그 가운데서 메시야를 보내서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아주 작은 나라지만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진정한 믿음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전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작은 아들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신데 다른 왕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왕을 줍니다. 그 왕의 지도를 받다 보니까 우상숭배하고 잘못되어집니다. 그래서 마치 집나간 자식처럼 나가서 이제는 바벨론과 앗수르의 압제를 받게 됩니다. 죽을 판이 다 되어서 마치 아, 내가 아버지 밑에 있었으면 하는 작은 아들처럼 아,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겼으면 이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인데 하고 후회하는 이들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살찐 소를 잡았듯이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잔치를 해서 잡으시고 사람들이 돌아와서 영의 양식으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져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서 생활하면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의 축복을 다 받아 누리게 하고 거기서 계시록에 나와 있는 아름다운 축복의 나라에 살게 되는 이것이 성경전체의 흐름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하여 잃어버렸던 한 생명을, 아담 안에서 잃어버렸던 행복을,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아서 회복시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주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의 주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러한 성경 전체의 말씀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루터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성경이 다 없어지고 모든 교회가 다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오늘의 이 말씀만 남아 있으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있다’라고 할 만큼 오늘의 말씀은 정말 귀하고 값진 말씀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성경이야기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눠 줄 재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살찐 송아지도 있고, 좋은 옷도 있고, 신도 있고, 가락지도 있고, 굉장히 유복한 가정인데 거기서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야기 합니다. “아버지, 나에게 상속할 재산, 돌아 올 재산을 미리 줄 수 없습니까?” 본래 유산(遺産)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떠날 때 주는 것인데 이 못난 자식이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유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 줍니다. 유대인의 상속법(相續法)은 큰 아들에게는 3분의 2를 주고 작은 아들에게는 3분의 1을 줍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돌아갈 몫을 주었더니 며칠이 못되어서 작은 아들은 그 재산을 다 챙겨서 먼 나라로 가서 그 재산을 허랑방탕하며 다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때마침 그 지방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 치는 집에 가서 돼지를 치면서 밥을 얻어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흉년이 들었던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쥐엄열매는 콩과 비슷한데 그 콩의 알이 아니고 콩 껍질, 콩깍지를 돼지와 함께 서로 먹으려고 했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깨닫습니다. 아,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겠구나. 내가 이렇게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나는 아버지에게서 받을 몫을 다 받았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시면 품꾼이 되겠습니다.” 하리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이제나 저제나 돌아 올 아들을 늘 기다리다가 멀리서 아들의 모습만 보고도 뛰어 나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잔치를 베풀어서 즐거워하며 기뻐했다, 이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성경 전체의 이야기와 꼭 맞아 떨어집니다.

이 말씀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 우리는 이 바버지의 관점에서, 아들의 태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 가정에 벌어졌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우리 집에 자녀가 둘 있는데 막내 자식이 아버지의 돈 얼마를 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다든지, 혹은 어린애가 집을 나가서 길을 잃어 버렸다면 우리 집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뭐겠습니까? 우리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 나간 자식을 찾는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식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부모가 있습니까? 자식을 찾기까지는 완전히 정신이 나갑니다. 보이는 게 없습니다. 전부가 자기 자식처럼 보입니다. 그것  해결하기 전에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것 해결하기 전에는 밥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뭔가 하면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도록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냅니다. 때로는 작은 아들이 만난 흉년을 만나게 해서라도 돌아오게 하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에게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해서 살게 하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입니다.

2. 아버지의 마음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집나간 자식이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자식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뭐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에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뭐겠습니까?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뭐겠습니까? 집나간 자식 찾는 것이 제일 큰 일일 것입니다.
이 일 해결하기 전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는 것입니다.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다른 자식이 “아버지,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아들 하나 나갔는데 뭐 그리 마음이 아파요? 아들 하나 찾는데 뭐 그렇게 전단(傳單)을 넣고 신문에 내고 돈을 쓸 필요가 있습니까?”한다면 그게 자식이겠습니까? 아버지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뺨을 한 대 때리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자식이 정말 자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의 모습이 마치 큰 아들과 같이 부각(浮刻)되고 있습니다. 지난 해 10월에 MBC에서 ‘참사(慘事) 그 후’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1994년 10월 21일에 무너졌던 성수대교, 그리고 1997년에 일어났던 괌(Guam) 비행기 추락사건, 그리고 2003년 2월 18일에 일어났던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이었습니다. 사고를 당했던 본인과 그 가정을 취재해서 방영을 했는데 제가 그것을 보면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녹화를 해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설교를 위해서 어제 다시 보았습니다.
성수대교 붕괴로 불과 0. 몇 초 사이에 생사(生死)가 갈리지 않았습니까? 2~3초라면 지나가는 차도 있었을 것이고, 또 그리로 안 갔으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0. 몇 초 사이에 마지막 차(車)는 잘려진 다리에 걸려 달랑달랑하는 차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중에 유성렬 씨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그만 성수대교 붕괴(崩壞)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동생도 충격을 받아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내가 지금 살아있긴 합니다만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심장이 뛰어서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내 되는 분이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10년 이란 세월이 가면 그 상처도 줄어들 줄 알았는데 줄어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죽어야만 잊어버릴 수 있지, 그전에는 상처가 작아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가족의 떠남이 한 가정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스스로 자신들을 약국이라고 합니다. 약 안 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무학여고 1학년이었던 황선영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등교하다가 많은 학생들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황인욱 씨가 환경미화원이었는데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살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10년 동안 술로만 살았습니다. 술을 너무 마셔서 미화원으로 일하다가 길바닥에 드러누워서 자는 것이 일쑤고 너무 술을 많이 마시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위암에 걸려서 지금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무학여고 3학년 이었던 장세미라는 학생도 참변을 당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몇 개월 후 졸업식에서 통곡하며 딸 대신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딸의 죽음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도저히 사회생활이 되지가 않습니다. 매일 술로 살다가 5년 뒤인 어느 날 딸의 위령비(慰靈碑) 앞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 때 192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146명이 극적으로 탈출했는데 탈출한 사람 중에도 살아있지만 산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억을 다 잃어버린 사람도 있고, 고함을 치고 때려 부수고하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도 다 같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1997년 괌 비행기 추락 때도 생존자(生存者)가 25명이었는데 이들을 보면 다 불에 탔기 때문에 어떤 가정은 소화기(消火器) 5개를 집안 구석구석에 갖다 놓고 날마다 만지며 불나면 이것 터뜨린다고 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문이란 문은 다 열어 놓아야만 잠이 온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도 켜 놓아야만 잠이 오지, 불 끄면 칠흑 같은 어둠이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 보아도 텔레비전을 켜 놓고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야만 잠을 잘 수가 있지 아무 소리도 안 들리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은 엄두도 못낸다고 했습니다. 그 화재 때 충격 받은 것 때문에, 타는 냄새 때문에 튀김은 먹을 수도 없고 매연(煤煙)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날의 일이 생각이 난다고 했습니다.
지하철 타는 곳의 계단은 아예 내려갈 생각도 못합니다. 그 중 좀 덜한 어느 청년은 지하철을 타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 돌아 왔지만 잃어버린 사람처럼 되어 버리니까 사고 전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온 가족이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집의 자식이 집을 나가서 생사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 집안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뭐겠습니까? 집나간 자식을 찾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집나간 자식을 아버지는 기다립니다. 날마다 동구 밖을 쳐다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올 것인가를 기다립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집나간 아들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돌아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지만 않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나간 자식의 운명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막내아들이 당했던 흉년, 인생의 흉년, 물질적인 흉년, 돼지하고 먼저 먹겠다고 뒹구는 짐승화(化), 냄새나는 인생, 결국은 절망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잠시라도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어떤 거지가 걸어옵니다. 아들은 아직도 아버지를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임을 알아봅니다. 옷이나 모습이 많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눈에 알아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있어도 그 속에서 자기 아이는 금방 찾아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나를 알아보고 내 말을 알아듣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나를 금방 알아보시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중국의 외교부장과 그 일행이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세계적인 관심을 모은 외교적인 방문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방송사들이 앞 다투어서 방영했습니다.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한 한국노인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저 사람, 내 아들이다!”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70세의 노파가 망령이 들었구나 하고 자제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노인의 아들이 맞았습니다. 노인의 가족은 일제시대 때 중국에 살다가 해방이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졸업반이었던 큰 아들만 중국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서울에 있던 가족은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중국의 공산화로 이산가족이 된 채 35년을 지났습니다. 중국에 있던 큰 아들도 중국에 동화되어지고 외교부의 고위직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일본 방문단에 끼어서 외교부 장관을 수행(隨行)하게 되었습니다. 이름도 나타나지 않아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노인만은 스쳐지나가는 화면만으로도 자기 아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단번에 알아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와도 아십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품을 떠나있어도 아십니다. 실패자로 돌아와도 아십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올지라도 다 아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아들은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 뛰어 달려갔습니다. 동방격언(東邦格言)에 ‘우리가 하나님께 1인치 다가서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5인치 가까이 오신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아들의 걸음걸이와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으로 걸어가면 하나님은 나를 맞이하기 위해서 달려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용서를 구하기 전에 하나님은 용서의 행동을 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 잘못 했습니다 하고 말하기 전에 아버지는 아들의 뉘우치는 마음을 아시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용서했다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이 몹쓸 녀석아! 내가 준 재산은 어떻게 하고 돌아왔느냐? 누구와 먹어치웠느냐? 도대체 어디 갔다 왔느냐? 아버지가 뭐라고 하더냐? 그렇게 나가면 이 꼴이 되어서 돌아온다고 하지 않더냐? 심은 대로 거두었구나”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저 목을 껴안고 감격할 뿐입니다. 그 안에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십자가를 붙들기만 하면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돼지 치던 그 옷, 그 냄새나는 옷을 입고 온다고 할지라도 묻지 않습니다. 더러운 누더기 그대로 입고와도 좋습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담배 피워도, 술 먹어도, 바람피워도, 도박해도, 행실이 나빠도 좋습니다. 있는 그대로 오기만하면 어떤 모습이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얼싸안고 기뻐하시고 잔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성경 전체가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했습니다. 옷은 신분을 말합니다. 아들의 신분으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가락지를 끼우라고 했습니다. 권세를 말합니다. 신발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신발이 없습니다. 자유인(自由人)만이 신발을 신습니다. 아들의 신분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집나간 자식이 돌아올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돌아오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고 용서하고 기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벌써 용서했으니 돌아만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까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게 된 것 아닙니까?

3. 큰 아들의 마음

그런데 문제는 큰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와 보니까 집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고 맛있는 음식냄새가 납니다. 종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집나간 당신의 동생이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좋아서 이렇게 잔치를 베풀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큰 아들이 노했습니다. 집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 일을 아버지가 알고 “얘야, 그러지 마라,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 왔으니 기뻐하자.”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불평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되 어김없이 섬겼고 한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염소새끼 한 마리라도 주어서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게 만들었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오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까?”
지금 누가 집을 나가있는 아들입니까? 작은 아들은 집 안에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큰 아들이 집 바깥에 있습니다. 진짜 탕자는 이 큰 아들입니다. 못난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아들입니다. 정말 큰 아들이 제대로 된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집나간 작은 아들 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항상 멍하니 동구 밖을 쳐다보면서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그 허전한 마음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한숨짓고 가슴아파하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수심에 싸여있는 아버지의 얼굴, 날마다 수척해 져 가는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정말 제대로 된 아들 같으면 “아버지, 아버지의 그 마음을 알겠습니다. 이제 내 동생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사람들을 동원해서라도, 일꾼을 데려서라도 동생을 찾아야겠습니다. 신문에 내십시다. 전단지도 뿌리고 현상금도 거십시다. 그렇게 동생을 찾아야만 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찾아야 할 동생이 돌아왔으면 기뻐서 환영하고 형이 잔치를 열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돌아 온 동생 때문에 불평합니다. 기뻐하는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도 모르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뭡니까? 집나간 자식이 있는 가정에 제일 큰 문제가 뭐냐? 여러분들 가정에 집을 나간 자식이 있다고 하면 제일 큰 문제가 뭐겠습니까? 집나간 자식을 찾는 것입니다. 집나간 자식을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힘쓰는 것이 최고의 일입니다.
그리고 집나간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그 마음, 집나간 자식이 돌아왔을 때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아들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 이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모를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이 아들 뿐만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이 아버지에게 때로는 억지를 부립니다. “내게도 주세요. 내 소원 들어 주세요.내게 물질 주세요. 안 그러면 집 나가 버릴 거예요.” 이런 짓들을 하는 아들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억지를 부리는 그런 아들이 혹시 내가 아닙니까?
큰 아들이 누굽니까? 큰 아들이 목사입니다. 큰 아들이 장로입니다. 큰 아들이 집사요, 권사요, 오늘 여기 앉아있는 먼저 믿은 우리들이 큰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잔치집입니다. 아들 돌아왔다고 잔치하는 집이 교회입니다. 잔치 집은 열기(熱氣)가 있습니다. 시끄럽습니다. 잔치 집은 떠듭니다. 웃음이 있습니다. 한 그릇 더 먹자고 해도 더 줍니다. 인심이 후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아들이 너무 많습니다.
집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가장 큰 문제, 가장 큰 고민, 가장 큰 소원을 모르는 큰 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집나간 자식이 있는 가정에 가장 힘써야 할 부분이 집나간 자식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외면하는 큰 아들이 너무 많습니다.

4.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가장 힘쓸 일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큰 일이 뭔가 하면 집나간 자식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힘써야 할 부분이 집나간 하나님의 자녀를 찾는 것이고, 그들이 돌아오게 하는 것이고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대신 우리가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집나간 자식을 돌아오게 하여서 저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모든 축복을 이 땅에서 맛보게 하고 저 천국에서 누리게 하는 이것이 성경전체의 맥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경이 쓰여 졌고 이것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고 이것을 위해서 목사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큰 아들로 살아갈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자식이 집을 나가면 그 가정에 가장 큰 문제가 집나간 자식을 찾는 것입니다. 집나간 자식이 있는 하나님의 집인데도 그런 아픔이 없습니다. 그런 열기(熱氣)가 없습니다. 찾는데 가장 우선순위(優先順位)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믿는 자가 1,200만 이라고 하는데, 4분의 1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800만 밖에 안 됩니다. 800만 중에서도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만이 아시지 않겠습니까? 800만 이라고 치십시다. 그래도 숫자로 치면 아들 6명이 있는데 한 아들만 하나님의 집에 있고 나머지 5명은 집나간 아들입니다.
6명의 아들이 있는 그 가정에 5명이 남아있고 한 명만 집을 나가도 부모의 마음은 집나간 자식 때문에 견딜 수가 없는데 한 명이 나간 것이 아니라 5명이 집을 나간 것이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부산은 더 합니다. 10명의 자식을 키우고 있는데 1명 만 집에 남아있고 9명이 집을 다 나갔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터지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집이 무엇을 해야 될지를 알지 않겠습니까? 집나간 하나님의 자녀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요, 가장 급한 일이요, 가장 먼저 할 일이요, 가장 힘써야 할 일들입니다.
아버지의 이 마음을 알고 집나간 자식 찾아서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쁨에 동참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주옵소서. 아버지의 마음을 가집시다. 내 가정에 자식이 집을 나갔다가 찾았다고 하면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꼭 당하고서만이, 경험하고서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을 따라서 자식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좀 이해하자고요. 주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목자(牧者) 없는 양들을 보시면서 민망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민망히는 창자가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단장(斷腸)의 슬픔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집나간 자식을 바라보는 예수님 마음은 창자가 끊어지는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성경에 뭐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맏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맏아들은 예수님인데 그 맏아들은 동생이 나간 것 때문에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가졌어요. 맏아들 된 예수님을 본받는 맏아들들이 되십시다.
오늘 우리가 정말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집나간 자식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자고요.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만났을 때에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너를 통해서 내 뜻을 이루겠다고 하신 줄 아십니까? 다윗은 자기가 키우는 양 떼를 너무너무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장차 임금 삼아 놓으면 이렇게 백성을 아끼겠구나 생각하고 백성을 맡겼습니다. 여러분들, 성경을 보세요. 얼마나 다윗이 백성의 생명을 아끼는지 모릅니다. 여러 차례 나옵니다. 원수의 생명도 아낍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쓰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이 마음 주님의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도 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아, 떠내려가고 있구나, 지옥 가는 사람을 보면서 아, 지옥 가는구먼, 잘 가. 하는 우리라고 하면 어떻게 큰 아들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나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심장을 나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자식 잃은 가정에서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뭔가, 큰 아들로서, 장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먼저 하고, 가장 힘써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찾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자식 잃은 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일에 헌신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전체의 흐름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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