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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멜산에서 (왕상 18: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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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산’입니다. 해발 8848미터나 되는 이 높은 산을 정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했습니다. 최초로 도전하여 성공한 사람은 ‘에드몬드 힐라리’라는 영국사람입니다. 에베레스트는 영국이 오래 동안 지배한 곳입니다. 영국은 1919년 에베레스트위원회를 조직하여 원정을 주관하여 많은 정복을 시도했지만 빈번히 실패하다가 1953년에 아홉 번의 도전 끝에 드디어 정상에 올라선 것입니다. 그 뒤부터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77년 9월 고상돈이란 사람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정상에 올랐고, 그 뒤에도 박영석, 허영호, 엄홍길과 같은 산악인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과감히 도전해 성공했지만, 이 산에 올라가다가 사람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성공한 사람보다 죽은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등정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정복되지 않은 산을 찾아 위험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들은 평생 산에서 살다가 인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다가 죽은 ‘조지 말로리’라는 사람은 ‘산이 거기 있어 산에 오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산을 찾는 사람들은 산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산악인은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기를 쓰고 산에 오르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산은 결코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늘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산은 나에게 인생의 목표를 세우게 해주는 삶의 스승입니다. 산은 내 삶이요, 인생입니다.”

  본문은 ‘엘리야’라는 선지자 때에 ‘갈멜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갈멜산은 해발 540미터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산입니다. 에베레스트에 비하면 산 같지도 않는 곳이지만 성경에서 ‘산’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곳입니다. 그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배웁니다. 특히 2005년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받습니다. 홍해에 이어서, 갈멜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갈멜산은 무엇이고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요?

  첫째, 싸움의 현장입니다. 본문을 포함한 열왕기상 18장은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합은 이세벨이란 왕비를 맞아 드리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숭배하는 나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엘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더 이상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온 나라 구석구석에 바알 산당을 만들고 그곳에 절하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이세벨에게 도전장을 내어 바알의 선지자와의 대결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으로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엘리야는 누가 참 신인지 가리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제단을 만들어 송아지를 제물로 놓고 불을 놓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단을 향하여 기도하여 불로서 응답하는 신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고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가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엘리야는 혼자였고,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는 모두 850명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외롭게 그들과 투쟁을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싸움과 투쟁의 현장, 바로 그곳이 갈멜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싸움은 감정의 싸움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면서 종종 감정이 뒤틀려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먹질하고, 몸을 던지고, 욕하면서 평생 안볼 사람처럼 싸우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의 싸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싸움은 이익을 위하여 뭔가를 얻으려는 싸움도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런 싸움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개인과 개인사이에, 국가와 국가, 나라와 나라사이에 이런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여 힘을 구축하려는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옛날만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도권을 잡고, 자국의 이익을 얻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여기의 싸움은 그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싸움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를 결정짓는 싸움입니다. 이런 싸움을 가리켜 영적 싸움,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쟁입니다. 외부가 아니라 속의 싸움입니다. 이런 싸움의 현장이 갈멜산이요, 이런 전투의 현장이 우리의 인생이요, 신앙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성경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우리의 씨름(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적 싸움의 현장에 서게 됩니다. 지금도 그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한해도 하고,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영적 전투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가 싸워야 하는 영적 싸움의 대상은 3가지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는 ‘죄와의 싸움’입니다. 로마서 7장 2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자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죄와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대상은 ‘세상’입니다. 주님이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에게는 세상과의 싸움도 있습니다. 그 싸움을 하다보면 환난도 당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승리했기에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대상은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정신을 차려서 마귀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적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사탄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영적 전투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싸움은 힘들지만 일단 싸우면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전투의 현장에 있습니다. 이 한해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은혜가 임한 곳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이런 영적 싸움이 시작되자 바알의 선지자가 온 힘을 다해 부르짖었습니다. 하루 종일,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라고 소리쳤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깨닫도록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얼마나 애타게,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야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38절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는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기적으로 임했습니다. 이것이 갈멜산입니다. 갈멜산은 하나님의 은혜가 기적과 능력으로 임한 곳입니다. 이것이 갈멜산 사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은혜가 다양한 형태로 내 마음을 두드립니다. 능력이 필요하면 불로서 오십니다. 힘이 필요하면 용기와 소망으로 임합니다. 위로가 필요하면 평안으로 다가오십니다. 바른 삶이 필요하면 깨달음으로 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한 방법, 다양한 형태로 찾아옵니다. 어떤 형태든지 은혜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은혜로 삽니다. 우리는 은혜를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은혜가 살 맛나게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살고, 받지 못하면 건조하여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마른땅이 비를 받지 못해 추악하게 갈라지는 것처럼, 우리 영혼이 은혜를 받지 못하면 추해지는 것입니다. 은혜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이 은혜를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제가 영국에 처음 유학을 갔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은혜의 고갈’이었습니다. 영국의 생활은 한국과 같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겨우 한번, 두 번 교회에 갑니다. 한국에 있을 때, 매일 교회에 살다시피 한 저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은혜가 새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은혜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저의 생활이 점점 건조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당시 교회에 없던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어떤 집사님과 둘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매일 딱딱한 의자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루의 문을 열었습니다. 거리가 멀어 쉽지 않았지만 기도하고 나오면서 그날의 힘을 얻었습니다. 은혜가 이처럼 중요한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거기에서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한 사역은 주일학교였습니다. 30여명 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어른예배와 동시에 모이니까 저를 포함한 선생님들이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모두 봉사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작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계속되다보니 점점 선생님들이 메말라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사소한 일에도 아주 민감합니다. 교사회의를 하다가 도 다툼이 많았습니다. 자꾸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하다가 결론은 은혜의 고갈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예배에 참여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먼저 분반공부를 시키고 예배에 참여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만 혼자 남아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기를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젠 저에게도 고갈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언제나 퍼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정말 예배가 그리웠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싶었고, 말씀이 듣고 싶었습니다.

  제가 목회 할 때, 어떤 자매가 저희 교회를 처음 찾아오면서 저에게 첫 번째 건넨 말이 ‘목사님 예배가 고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배가 고픈 사람들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것처럼, 우리는 은혜가 고픈 자들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삽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주시려고 오늘도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날마다 갈멜산에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해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며, 날마다 촉촉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결단이 촉구된 장소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이런 용기 있는 행동을 보이게 된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한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아합왕과 이세벨로 인해 판단이 흐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세벨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갈멜산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주요내용입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무엇이라 말하는가를 보십시오. 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머뭇머뭇하지 말고 하나님이냐 바알이냐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뜨겁든지 차갑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멜산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갈멜산은 결단이 촉구된 장소입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한 주간의 문을 열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결단을 요구합니다. 머뭇머뭇하지 말고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어에 ‘선택’이란 말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choice'이고, 다른 하나는 ’decision'입니다. 전자는 많은 것 중에 하나를 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많은 것을 다 버리고 하나만을 결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결단하면서 나머지를 버릴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결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결단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결단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감성의 지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의 인격이 지, 정, 의로 되어 있는데 감성이 지성과 의지를 모두 장악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감정의 터치에만 급급합니다. 감성만 자극합니다. 드라마도 일단 감성만 자극하면 성공합니다. 시청자를 눈물나게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감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그냥 대충 쉽게 넘어갑니다. 기복이 아주 심합니다. 그래서 의지가 약합니다. 이것이 결단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심지어는 신앙생활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눈물로 찬송하고,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눈물과 감격은 내 의지와 삶의 결단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눈물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닙니다. 그렇게 감격적인 예배와 흥분이 있으면서도 교회 문만 나서면 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성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감성이 정말 필요하지만 감성만큼 더 중요한 것이 의지입니다. 어떤 학자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라고 말하는데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래, 거짓말하지 마래...’ 그 말씀을 하고 싶은데, 이미 다 기절해서 다음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잘못을 우리가 종종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철저하게 인격적인 것입니다. 예배는 전인격적인 치유입니다. 이제 감성에서 결단까지, 의지의 행동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변화가 있고, 성숙이 있고, 신앙의 귀한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멜산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인생을 배웁니다. 오늘도 영적 전투가 계속됩니다. 잘 싸워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의지의 결단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한 주간도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향해 힘차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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