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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보를 빼내라 (마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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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기홍 목사

세상 진리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맞는 말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랑이 같고 다시 사랑과 오래 참음이 같으니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도 맞는다. 하지만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래 참음은 사랑이다." 맞지 않는다. 작은 진리는 큰 진리를 포함하지 못한다.

"사랑은 하나님이다." 역시 아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은 하나님이다." 훨씬 맞지 않는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 사랑, 오래 참음은 뒤로 갈수록 진리가 약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진리를 항상 추구해야 한다.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은 훌륭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랑은 아니다. 사랑이 더 높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보다 더 높은 다른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가장 높은 진리가 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무엇을 찾고 따라야 하는지 분명해 진다. 언제나 하나님을 추구해야 진리에 더 접근하는 것이다. 하나님 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존재하게 만들어 주신다.

같은 설명이 비진리에도 적용된다. 악한 비판은 죄성에서 나온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여기서 비판을 티로 죄성을 들보로 비유하신다. 사람들의 행위를 악하게 비판하려는 마음은 근본적인 죄성에서 나온다. 아무리 비판을 안 하려고 해도 비판은 자꾸만 나온다. 내 속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쁜 비판은 내 악을 설명한다.

개개의 악한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거짓말 안 하려고 하고 남에게 고통 주는 말 안 하려고 노력해도 여전히 나온다. 속의 문제 해결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형제를 비판해야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려면 완전히 본성이 바뀌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하시는 일이 그것이다.

생각해 보라. 내 마음이 은혜로 충만해 있다. 매사가 형통하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남을 비난하겠는가? 술 먹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그래서 가슴 아플 때 술을 먹는다. 그러나 이것은 신경을 마비시키는 일이다. 성령에 취하면 달라진다. 신경이 부드러워진다. 술처럼 몸 망치지도 않는다. 좋게 한다.

1. "그 비판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기독교의 방법이다. 본성은 그대로 두고 행동만 훌륭하게 하라는 가르침이 많다. 이것도 진리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에 비하면 훨씬 하등의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께서는 참 진리, 근본으로 가길 원하신다. 기독교는 행동을 강조한다. 그것도 굉장히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변해야 한다.

가장 귀한 것은 개나 돼지가 이해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저 먹을 것이나 주면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낮은 진리에나 만족하는 사람들을 개나 돼지로 비유하고 계신다. 그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구원과 영생의 귀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행동을 하기 전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형제를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의 본성이 속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죄성이 그런 방향으로 솟아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신도 그 죄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우리는 다 자신은 깨끗한 것으로 알고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그렇다면 알자. 그 비난이 눈에 보이고 거슬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 속에 그것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 있다. 그는 비판적인 사람이다. 매사가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남보다 비판력이 예리하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해결하는 방면으로 좋은 방향으로 머리가 예리하게 돌아가야 하는데 잘못된 것만 잘보인다. 그렇게 비판력을 키우다보면 온통 다 틀려보인다. 거꾸로 보이는 안경을 쓰고 사는 것 같다.

어른이고 아이고 남자고 여자고 상관이 없다. 정부이건 사회이건 단체이건 교회이건 모두가 다 틀렸다. 이 정도되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좀 범위를 좁여서 다른 것은 다 봐주는데 시어머니만은 또는 며느리만은 못봐주겠다. 아무개는 안된다. 사실 내 속에 짜증나는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이다. 그 괴로움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누구이건 무엇이건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문제이다. 늘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내 힘이 다 그리고 가고 마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의 눈의 티가 보이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은 점점 더 피곤해지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부정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죄성의 발로이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계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뱀은 이에 대해서 말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타락이 바로 선악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의 잘못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타락의 동기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다음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받을 것이 자기에게도 있다. 안 그런 사람 있으면 말해보라. 어떻게 좀 이것을 해결할 수 없을까!

2.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선악을 아는 그 마음은 밖으로 나가게 할 것이 아니다. 속으로 자신을 향해서 사용해야 한다. 자기 속을 들여다 보라. 탓할 것이 남에게 있지 않고 자신에게서만 발견되리라. 그때 가서야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된다. 자기의 죄를 잘 볼 수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다. 그가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신다.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보지만 네 속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 속에 죄가 그렇게 보이게 한다는 말씀이다. 마음이 기쁘고 행복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유심히 보겠는가? 사업이 잘 되 나가는 사람이 종업원의 잘못에 대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되겠는가?

무엇을 향해서건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된다면 속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누구를 향해서건 자꾸 비판적으로 된다면 지금 내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일이 잘 안되면 심지어 자기 자식들을 향해서도 신경질을 부리게 되어있는 것이다. 문제를 아는 것도 문제 해결하는 시작이 된다. 병 걸린 줄 알아야 병원에 간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에 대한 이해는 그대로 내 마음을 투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판단의 기준이 아주 날카롭게 되어 있다면 모든 것이 그렇게 보리리라. 스스로 지금 판단해 보라.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차 있는가? 그것이 들보인 셈이다.

주께서는 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하신다. 어떻게 들보를 제거하겠는가? 전혀 우리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타고난 모습이 그런데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열심히 수양을 하면 되는가? 그러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 이 들보는 우리 조상 때부터 대대로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죄의 바다에 가라앉는 것이다.

영혼 깊이 박혀있기에 아무도 그것을 제거할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을 제거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래 인간의 죄악은 영이신 하나님을 향해 지은 것이므로 어떠한 외형적인 행동으로만은 해결될 수 없다. 영적으로 그 죄악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일을 담당하셨다.

눈에 보이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또한 영적인 세상에서도 동시에 죄를 짊어지심으로 해결하셨다. 영적인 대 전쟁이 일어났다. (계12:7) 처참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적 세상에서 들보가 제거되었다. 이 사실은 믿음으로 현실 속에 경험이 된다. 신자들이여, 들보가 제거된 것을 믿으라. 마음으로 보고 느끼라. 감사로 마음이 충만하리라.

3.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개나 돼지에게는 그들에게나 해당되는 선물이 있다. 그들에게 진주를 주고 귀한 보석을 주어야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는 먹을 것과 아내를 주면 된다. 그들 가운데서 왕 노릇하게 하면 최고이다.

얼마나 사람과 같은가. 실제로 주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을 개와 돼지로 비유하고 계신다. 동물적인 삶은 그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사람이라도 그 속에 죄의 들보가 들어가 있다면 짐승과 같은 존재이다. 그 안의 죄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들이 변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면 달라진다. 귀하고 거룩한 것을 사모하리라.

세상의 물질보다 주의 뜻을 사모하리라. 그렇게 함으로서 진주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뭐가 좋은가? 앞부분에서 말했던 진리의 수준으로 설명해 보자. 하나님은 기쁨이시다. 기쁨이 곧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 속 많은 것 중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 다음으로 기쁨 속에는 풍요로움이 있다. 그러나 풍요롭다고 기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최상의 진리인 하나님을 모시라. 그러면 기쁨이 일어난다. 그리고 기쁠 이유 중에 하나로 풍요로움도 유명해짐도 다 주어진다. 하지만 유명해지고 부자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보다 나은 진리는 경험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경외함으로 부자되고 유명해지라. 만약 부와 명예만 가진다면 짐승과 같은 수준일 뿐이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였는가? 그래서 죄의 들보가 사라졌음을 보는가? 하나님의 진주를 받은 새로운 존재로 바뀌었음을 보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을 소망으로 그려 보라. 그리고 형제를 바라보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이것이 바른 방법이요 이것이 진주이다. 돼지의 본성을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언제든지 돼지의 본성이 일어나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라. 그러면 새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비판을 안 하려 하고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확인하라. 그러면 된다. 인간차원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 차원의 선행을 할 힘이 공급된다. 그를 따라서 아름답게 살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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