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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소망의 이유 (벧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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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춘수 목사

최근에 한국사회에 큰 문제를 가져오고 대단히 심각한 질병이 하나있습니다. 이 질병은 유행병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도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 한강에 몸을 던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자살이라는 심각한 질병이 한국사회를 좀먹고 병들어 가게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자살의 문제가 너무 심각한 사회적 현상으로 대두됩니다. IMF보다 더 심각하다는 경기침체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비관하여 자살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한국사회의 심장이라 할 20-30대의 사망원인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살인적인 청년실업은 바로 자살이라는 극단의 처방을 가져왔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10대의 자살도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온 나라가 10대,2,30대를 뛰어넘어 이제 이 자살의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서 두드러진 생명경시 풍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국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OECD 국가들도 점차적으로 자살수치를 보아도 점차로 이 수치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통계를 통해 알수 있습니다. 불행한 것은 그중에 대한민국이 최고로 높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일간지는 자살을 생산하는 절망의 공장.-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선택할까요? 경기의 침체와 성적의 비관과 실직에 따른 불안감 등의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공동묘지에 가 보아도 웃는 이야기로 핑계 없는 무덤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기에 자살을 택한 것입니다.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과 상실감이 있기 때문에 자살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가 만연해 있고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소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앞날에 대한 밝은 청사진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고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소망이 없다면 아주 우울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간다면 얼마나 쓸쓸한 인생이겠습니까? 무언가 바라는 것과. 하고 싶은 것과 . 자신의 꿈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 있다면 자살은 살자로 바뀔 것입니다. 바로 소망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밝은 설계도가 있으면 충분히 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충분히 자살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소망이 있음을 알기에 역경이라는 어두운 바다에 소망이라는 보트를 타고 향해하고 있습니다. AD64년 7월경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네로 황제가 저지른 고의적인 방화였습니다. 네로는 불타는 로마의 도시를 보며 춤을추며 시를 지어 노래를 하게 하였습니다. 성난 군중들의 항의가 시작되자 이 책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떠 넘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방화의 주범이 되어 줄줄이 잡혀갔습니다. 십자가형으로 굶주린 사자의 밥으로 원형경기장에서 갈갈이 찢기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로 교회사의 10대 박해 중에 가장 극심한 박해였습니다. 더러는 이러한 박해를 피하여 지하로 들어갔고 여기서 카타콤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는 베드로 전서 1장 1절에 나오는 대로 “본도, 갈라디아,갑바도기아, 아시아 , 비두니아 까지” 피하였습니다. 이들을 가르켜 디아스포라(흩어진 자들)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모진 박해를 피해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말씀합니다. 핵심이 되는 단어는 산 소망입니다. Living Hope 희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저기로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살아야할 이유가 아직 충분히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살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산 소망의 이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 사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절에 예수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십자가의 믿음만은 아닙니다. 바로 부활의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암담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고전 15장에서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십자가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분명히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한 대속의 죽음이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메시야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원한 산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부활의 산 소망이 내게 있다. 라고 대답할 것 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에서 100세에 얻은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며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한다는 이 믿음이 있기에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 몰아쳐도 꿋꿋이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1세기의 디아스포라들에게 베드로는 바로 이 소망을 들려주길 원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복음 전도의 포기할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소망 때문이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영원한 영생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구원의 기쁜소식을 전해기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이 찾아와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3절을 시작하는 단어는 “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아니 지금 하루하루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고달프고 괴로운데 어떻게 입술에서 노래가 나올 수 있습니까?
바로 부활의 소망이 나를 힘들게 하는 괴로움을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노래 할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도 노래할수 있습니다. 어두운 먹구름이 온 하늘을 덮어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식으로 장례를 치루면 불신자들은 장례를 치루면서 노래를 한다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린 부활의 날에 다시 만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육신적인 슬픔을 이기고 찬송할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바울과 실라가 찬송과 기도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전도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갔고 실컷 맞고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혔는데 노래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긍정적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는 존재입니다. 유대인들은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답니다. 민족성이 그들은 그렇게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나치독일 치하에서 금방 가스실에서 죽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낙천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내세에 대한 강한 확신이 그들을 낙천적인 사고의 사람으로 결정지어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소식을 듣고 슬픈 기색으로 처량하게 걷고 있는 두 제자를 발견합니다. 이들은 길을 가면서 주님의 부활을 소식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실망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십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때 이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제자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역경의 바람이 몰아쳐도 소망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세상이 자살로 몰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영원한 소망의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을 다 살고 세상 근심 다 뒤집어 쓴 모양새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고 산소망의 사람답게 당당히 사시길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기업의 소망이 있습니다.

4절에 “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산소망의 이유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경제를 보면 침체에 침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경기가 최악의 상황에 와 있다고 말합니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지 운영이 되지 않아서 하루에도 문 닫는 기업들이 줄을 잇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기업의 도산소식, 부도소식. 생활고를 비관해 죽은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 세상의 기업은 흥망성쇠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영구한 기업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4절에 보면 “ 너희가 같은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고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고 말씀합니다. 지상의 기업이 다 무너지고 다 빼앗겨도 더 낫고 영구한 산업, 빼앗기도 않고 흔들릴 수 없는 기업, 영원한 기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산 소망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은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영원성을 말합니다. 더럽힐 수 없습니다-거룩한 기업임을 말합니다 쇠하지 아니합니다- 불멸의 기업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원한 기업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는 것 입니다. 하늘에 간직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하여도 하늘의 영원한 기업은 잃지 않습니다. 이 기업은 절대로 부도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은 절대 안전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기업을 소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아니 오늘 베드로의 편지를 읽는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시련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저기로 흩어져 방랑자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재산이 있습니까? 은행에 돈이 있습니까? 내일에 대한 찬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까? 그들은 이 땅의 것을 소유하지 못했어도 그들은 하늘의 기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장애를 가진 송명희 자매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지식 없으나 나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라고 노래하며 공펑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내안에 있으면 육신의 장막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이렇게 노래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한 부자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소출이 풍성하여 쌓아 둘 곡간을 염려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곡간을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이르되 내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이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스스로 자족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며 그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하고 재물에 대하여 부자인 사람에 대한 교훈입니다.

눅 18장에도 젊은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당당합니다. 율법의 말씀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 그리고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 젊은 관원은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되어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합니다. 영원한 재물을 소유하는 것보다 이 땅의 재물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늘의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는 이 땅의 재물도 중요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여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서 누려야합니다. 그렇지만 먼저 보물을 하늘에 쌓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원한 기업을 위해 저축하는 슬기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고 도적이 구멍도 못 둟고 도적질도 못하는 영원한 기업입니다.
세상의 것이 다 무너져도 하나님의 기업은 절대 안전합니다. 지금 현실의 암담한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풀리지 않는 경제로 인해 실의에 있지는 않습니까? 힘을 내십시오 영원한 기업이 우리 앞에 예비 되어 있습니다. 내 생계가 위협받고 있습니까? 세상의 것이 다 무너져도 영원한 기업에 투자하신 분은 충분한 보장이 됩니다.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으시고 소망의 끈을 튼튼히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5절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심은 영원합니다. 결코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자됨을 영원토록 보장하십니다. 간혹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잃어버려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28절에 보면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갈 때 까지 우리를 결코 놓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가고 계시면 우리는 절대 안전합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가르켜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우리를 견인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이 염려가 되고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 입니다.

두 번째는 시험과 시련을 이기도록 보호하십니다. 6-7절에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이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내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고난이 없는 믿음 생활은 없습니다. 시련과 고난의 음침한 골짜기가 반드시 있습니다.

성도는 시련을 통하여 믿음이 강화됩니다. 고난의 유익중의 하나는 믿음이 성장하고 강화되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신앙이 더 순수해 집니다. 더 영광스러워 집니다. 6절에 여러 가지 시험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것입니다. 형형색색의 시험을 우리는 이 땅에서 경험합니다. 육체의 질병, 인간관계, 경제적인 시련, 등 열거하기 힘든 다양한 시험이 있습니다. 성도는 이런 시련 앞에서 잠깐 근심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한층 자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시련을 통하여 주님 앞에서 서는 그날에 내가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 더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소망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3-4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정금 같은 시련을 통하여 마침내 인격이 변화되고 소망을 이루려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시련 가운데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12절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하려 함이라 ” 라고 말씀합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고 골짜기가 깊으면 물이 그만큼 시원하다고 합니다. 고난 가운데는 반드시 영광이 따라옵니다. 주 안에서의 시련은 변장된 축복이라고 합니다 시련의 골짜기에 계십니까? 절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습니다. 시련으로 인하여 내 인격이 변화되고 내 신앙이 순결해지고 내 삶이 거룩해지고 마침내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 (로마서 8장18절)
하나님의 능력은 시련보다 큽니다. 강한 훈련이 강한 병사를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시련이라는 철조망을 통과하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다듬어져가는 것입니다. 강한 시련 속에서 불평과 원망을 버리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2005년도가 이제 시작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이 다 있습니다.꼭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얼마나 삶이 건조하고 딱딱하겠습니까? 바라는 것이 없으면 가장 처량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살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의 조류 앞에 우리는 영원한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영원 한 사망을 면하고 영광스러운 둘째부활에 참예할 자가 되었습니다. 영생의 티켓을 이미 받았습니다. 앞서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산 소망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될지라도 , 당장에 내 곳간에 양식이 없어도 ,하늘의 영원한 기업이 있기에 우리는 자족할수 있는 것입니다 장차 받을 영원한 기업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열린 천국문 을 들어가서 빛난 면류관을 쓰고 주와 함께 다스리는 것이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세상의 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성도는 영원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련의 때를 기쁨으로 견디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정금과 같이 변화 시키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위대한 조각가 이신 주님이 손길이 모난 우리를 조각하실 때는 잠시 근심이 되지만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은 우리를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빚으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시는 그분의 만지심에 기뻐하는 우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하시듯 주안에 있는 성도의 소망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쇠하는 것도 아닙니다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 소망을 품으시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하는 한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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