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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밖의 구원자 (삼상 23:1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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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남아시아의 쓰나미 해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관심이 온 지구공동체 적으로 지금 집중되고 있습니다. 발빠르게 호주 정부가 8억 달러의 구호금을 주겠노라고 선언했고,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한 유럽연합이 5억 달러를 구호금으로 내놓았습니다.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인 미국이 1500만 달러를 구호금으로 내려고 발표했다가 거센 세계의 비난을 받고서 3억5천달러로 올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세계 12번째 경제대국이라고 하는 그 위상에 맞추어서 처음에 60만 달러를 구호금으로 낸다고 했다가 영 체면이 서지 않아서 후에 5천만달러로 올렸습니다만은, 주변에 일본이나 여러나라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그런 모습입니다.

세계 각국이 앞을 다투어서 이렇게 재해 기금을 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크게 2가지 이유라고 생각이 드는 데, 하나는 후원의 규모가 자국의 국제적 신뢰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자국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국제적인 재해가 생길 때에 기부금을 내면서 자신의 국가적 신뢰도를 높이려고 하는 의도 때문에 서로 앞을 다투어서 기부금을 내려고 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세계 속에서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이제는 한 국가가 자신들만의 국가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리더쉽을 가진 국가라고 하는 위상을 위해서 이런 어려울 때 리더쉽을 발휘함으로써 국가 간에 자리 매김을 든든히 하려고 하는 의도 속에서 기부금을 내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정치적인 의도이든, 어떤 사회적 리더쉽에 대한 의도이든,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들에게는 그저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가 영국의 토인비는 역사연구에 관한 글에서 역사의 법칙을 도전과 응전이라고 하는 원리로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도전의 문제가 우리에게 발생하면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역사가 발전하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한다라는 그런 논리입니다.

그런 논리에 의해서 본다고 하면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이집트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심각한 우리의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를 가리켜서 나일강이 준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집트에 가본 사람들은 90%가 넘는 사막의 땅에서 이집트가 문명을 꽃피운다고 하는 것이 정말 기적처럼 보이고, 매년 한 번씩 나일강의 범람으로 모든 것을 쓸어가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이집트가 역사의 중심에 섰던 한 시대를 구가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로 다가 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매년 겪는 나일강의 범람이 이집트의 천문학, 건축학을 발달시키고, 그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평가가 바로 토인비의 역사적 평가의 원리에 적용해 볼 때 정확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세계의 재난과 어려움이 다가올 때에 그것이 국가적으로 침체가 되고, 그리고 그것이 국가적으로 재기의 상황에서 몰락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오히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가 그들을 새롭게 일구어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도 세계적으로 625의 참상에서 그 패해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이렇게 빨리 재기 할 수 있는가 하는 불가사의한 부흥과 발전을 이룬 나라로써 모든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의미에서 우리 한국 민족들도 재해와 재난의 잿더미 위에서 오히려 창조적 삶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그런 한 몫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전과 응전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지금도 계속 적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삶을 보면서 그의 삶의 상당한 부분들이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서 그는 광야로 혹은 산간지역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생명을 은신하고, 그들의 삶을 연명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그의 공동체와 함께 십 황무지 수풀에 숨어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황무지 수풀은 그들이 평온할 때에는 그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충분하지만 어떤 공격을, 자신들의 거처가 노출된 상황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그것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십 황무지 수풀에 은신하면서 그들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고, 늘 불안함과 염려가 그들의 삶을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16절에 보면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의 예기치 못한 방문을 받게 됩니다.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서 다윗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그에게 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세가지의 말로 다윗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하지 마시오. 인간적으로는 처남과 매부 사이입니다. 요나단의 누이가 다윗의 아내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사울왕의 후계자로써 요나단은 앞으로 왕을 이어가야할 사람이고, 다윗은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왕권과 왕위를 빼앗아 갈 사람으로 여겨져서 다윗을 죽이지 않고는 자기의 왕위가 아들에게 갈 수 없다고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아주 긴장관계에 놓여 있을 수 밖에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우리가 역사상 더 이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우정의 관계요, 아름다운 관계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위를 빼앗을 자로 생각이 되고, 요나단은 자기 아들로써 장차 왕위를 이어가야할 사람인데, 사울왕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스럽게도 요나단은 왕위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기름을 부은 다윗에게 자기의 왕위를 양보하고 있습니다.

오늘 17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두 번 째 권면하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 나는 너 다음의 순서이고, 네가 먼저다. 왜냐하면 아버지 생각에는 내가 먼저 생각하고 있지만, 내 기준은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기를 원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고 주의 종이라고 하는 너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순서, 곧 네가 다음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분, 일반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당연한 일이 아니지요. 그냥 요나단은 점잖게 가만히 있으면 자기에게 왕위가 돌아올 상황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앞장서서 지금 수풀에 숨어있는 다윗을 찾아가서 위로하면서 지금은 곤경이고, 어려움이지만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고, 나는 네 다음 순서라고 그렇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보면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모세와 바로와의 관계입니다. 모세 당시의 바로는 투투모스 1세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당시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으로써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는 딸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딸이 핫셉슈트라고 생각이 됩니다. 핫셉슈트의 남편은 투투모스2세였지만,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그들은 히브리여인의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을 했습니다. 그것이 물에서 건졌다고 하는 모세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계속해서 자식이 없자, 핫셉슈트와 투투모스 2세는 궁녀에게서 투투모스3세를 낳았습니다. 순서로 보면 모세가 먼저이고, 궁녀에게서 낳은 투투모스 3세가 나중인데, 이 3세는 언제나 모세를 향해서 적대적이고, 시기와 모함을 일삼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모세를 죽이고, 쫓아내고 자기가 다음 파라오의 자리에 앉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약점을 찾아내서 왕에게 고자질하고, 모세를 추격하고, 모세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에 이 3세는 모든 노력을 경주합니다. 결국 모세는 히브리 사람을 살해한 일로 인해서 미디안 광야로 피신을 가고, 자연스럽게 투투모스 3세가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우리는 출애굽기에 의해서 들었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면 어쩌면 정상적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자기의 영화와 명예를 차지하는 것, 어쩌면 그런 면에서 투투모스 3세는 성공적인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단은 자신이 먼저 왕 위에 오를 수 있는 자리에 있었고, 그냥 점잔만 빼고 있으면 될 일이었는데,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이 다윗보다 더 가까이 반응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찾아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위로해 주고,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할 것이라고 격려해 주고,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이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자신의 위치를 밝히는 겸손을 그는 잊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언약까지 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사울왕이 다윗을 찾아서 군대를 동원해서 그의 목숨을 찾는 그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요나단을 다윗에게 보낸 이 손길, 저는 이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확신합니다.

전혀 다윗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손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을 주고, 하나님을 힘차게 의지하도록 권면하는 놀라운 우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위로 속에 다윗과 공동체는 얼마나 안도하고 평안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세상사람들의 기준과 가치관을 넘어서는 요나단의 희생과 겸손,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기득권도 얼마든지 뒤로 물릴 수 있는 그런 희생적인 결단이 요나단에게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다가올 때에도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고, 이득이 된다고 하는 현실적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행동하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 인간적인 이익과 욕구 때문에 예배의 자리에서 멀어지셨습니까? ‘어떻게 오늘 예배에 안 보이십니까?’ ‘아, 오늘 오랜 만에 친구들이 와서..’ 친구와 만나서 소일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자신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오늘 예배에 오지 않았습니까?’ ‘아, 오늘부터 백화점 세일이 시작이 되지 않았습니까? 늦게 가면 좋은 물건 못 골라요.’ 주일은 다음에 또 오지만, 세일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세일상품 먼저 고르는 것이 자기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느 때는 유치원 행사, 어느 학교 행사 이런 것 때문에 빠진대요.

저는 생각하면 그 분이 새가족이 아니라 집사요, 권사 쯤 되는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우리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주님의 뜻이 분명히 다가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이익과 유익을 위해서 우리는 거침없이 우리의 육신의 자리에 다가가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우리는 쉽게 쉽게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요나단의 발걸음은 그렇게 간단한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아름다운 우정의 관계처럼 더 아름다운 관계는 없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다윗의 공동체에 십사람들이 사울에게 갔습니다. 우리 동네에 다윗과 공동체에 숨어있습니다. 왕이 지금 얼른 군대를 가지고 와서 포위한다면 쉽게 그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왕에게 알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이 되어서 왔습니다.

이미 사울은 온 국민들에게, 온 백성들에게 다윗이 어디에 숨어있는가를 알리도록 명령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알고도 그것을 알리지 않는 사람들은 놉 땅에 있는 제사장과 생명이 있는 모조리 죽인 것처럼 그들은 공포에 싸여져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군대를 데리고 곧 갈 터이니 먼저 가서 그들이 얼마나 어떻게 숨어있는지를 더 자세히 살펴서 내게 고하라.

십 사람들이 자기 마을로 먼저 돌아간 후에 사울은 군대를 일으켜서 이제는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황무지의 수풀을 에워싸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을 에워싸고 있는 동안 다윗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골짜기도 아니고, 산도 아니고, 완전히 다윗은 사면초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사울과 그의 군대에 붙잡혀서 목숨을 잃을 상황에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27절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이 흥분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지를 알았습니다. 마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처럼 마음을 졸이고, 이젠 어쩔 수 없이, 이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이스라엘의 서쪽에 머물고 있는 블레셋이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서쪽을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빨리 군대를 돌이켜서 대항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전체가 위급하다고 하는 전갈입니다. 사울로써는 지금 다 잡아놓은 상황이지만, 할 수 없이 군대를 돌이켜서 블레셋과 싸움을 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감격하고 감사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우연이지, 어떤 간증을 하는 사람 앞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볼 때는 우연인 것 같은데, 그런데 그 간증자는 그렇게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당신의 언어로 빌린다면 우연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할 수록 우연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우연이라는 말할 수 밖에 없지만, 그들의 언어를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기도하니까, 기도하는 사람들 앞에 우연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도우시는 손길들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들어서, 여호수와를 들어서, 갈렙을 들어서, 수없이 많은 당신의 종들을 들어서 당신의 일들을 하기 원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손길을 들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모세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려 했을 때, 하나님을 모르는 아닥사스다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느헤미야의 사역을 돕는 동역자로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염려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예루살렘의 성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돈과 모든 물질과 그들을 지켜주는 사람들까지 준비해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사용하실 때 하나님은 다리오왕을 사용해서 그를 지켜주시고, 그를 모함하고,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을 물리쳐 주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종들만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모든 세계의 역사에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밖의 구원의 손길은 요나단과 또 블레셋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자 다윗을 구원하고 계심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은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이 말은 다윗이 이제 유대 광야에 엔게디 광야, 물이 흐르는 광야입니다. 그 광야에 풀 한포기, 물 한줄기 없는 그런 곳에 엔게디 광야는 물이 샘이 있는 곳입니다. 그 샘이 있는 곳으로 공동체를 옮겨서 거기서 거한다는 거예요. 다윗이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화제의 책이 있습니다. 토미 테니가 쓴 다윗의 장막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토미 테니는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릴 적 집에 대한 추억이 있는가? 있다면 그 집건물에 대한 추억인가? 아니면 그 집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추억인가? 나는 확신하건데, 당신이 이 옛집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그것은 건물에 대한 추억보다는 거기서 일어난 일들에 의한 추억일 것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함께 어릴 적 집에 살면서 그 집 뒤에 있는 개울가에서 바지를 걷고 고기를 잡던 추억, 어머니가 밥을 짓느라고 장작불을 때울 때, 그 옆에서 그 장작불을 쬐면서 그 장작불이 꺼지면 거기에다가 군고구마를 굽던 추억, 그런 행복하고 따뜻한 추억들은 건물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그 건물 속에서 주어졌던 사람들과의, 부모들과의 행복했던 추억일 것이다.

그러면서 토미 테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행복한 추억을 느끼시고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 그리고 그는 그 장소가 다윗의 장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가장 소중한, 가장 정성을 다해서 춤을 추면서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여호와의 법궤가 이제는 저 블레셋 지경에서부터 점점 자기 삶의 중심으로 예루살렘 시온 자리로 거기서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거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했던 그 다윗의 순박한 순수한 모습을 보면서 아직 솔로몬 때에 그 건물이 완성은 되었지만, 그 다윗이 헌신하려고 했던 장막 터를 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은 가장 기억하고 싶은 가장 행복해 하는 하나님의 추억이 바로 다윗의 장막터라고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헌신이 거기에 있고, 자신의 사랑이 있고, 자신의 온 마음과 정신이 거기에 드려져 있던 곳, 그 다윗의 장막터를 추억의 장소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물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드린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열정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이 지금 엔게디 요새에 거한다고 하는 말은 이제 그가 여전히 광야에 있고,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도전과 위협 속에 있지만, 그는 자신이 고백했던 것처럼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에게 있어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평화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장막이라고 하는 보여지는 건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예루살렘에 왕궁에 거해야 하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 있을지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곳이기에 여기가 평안이요, 행복이라고 고백하는 그의 고백의 삶이 오늘 평안의 성도들 여러분의 평안이 되시고, 행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곳이 아니라 어디든지 행복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어떤 사람,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성이요, 나의 반석이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거할 처소이시라.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하시는 곳이 요새가 되고, 안식처가 된다는 다윗의 고백처럼 오늘 여러분의 삶들이 때때로 고단하고, 역경 속에 있다 할 지라도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형통이 잘 되는 것, 많이 되는 것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 그런 상대적인 비교에서 오는 형통의 기쁨이 아니라 내 삶에 주님이 동행하시는 형통이요, 주님이 함께 하심이 기쁨이요, 평안이 넘치는 그러한 진정한 성도의 감사가 바로 다윗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도 증거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때때로 우정의 사람 요나단을 통해서, 때때로 생각지 못했던 블레셋 사람들을 통해서 주의 종 다윗을 건지시는 주의 손길을 기억합니다.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는 그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실감되는지 모릅니다. 주님, 우리의 모든 삶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는 줄 믿습니다. 뜻밖의 구원자들을 통해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평안의 성도들이 이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에 늘 안위함을 받고, 평안함을 누리며 감사로 주님을 노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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