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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보고 바보처럼 살래요 (마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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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김도향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 “난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난 낙엽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빈 내 마음을 보았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참으로 바보처럼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정말 지키기 어려운 아니 지키기 싫은 말씀일 것입니다.

저는 제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이 있지만 한가지 불만인 기억이 있다면 너무 착하셔서 바보처럼 다른 사람에게 늘 이용당하시고 또 그 사람들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무능하게 보였습니다. 그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이러한 부분은 안 닮아야지 생각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저도 조금은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있는 모습을 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손해 보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손해를 보아도 억울해서 이종환의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대에게가 됩니다. 우리는 생존경쟁이 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너를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으로 모두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에게 조금만 위해를 가해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위해를 가하 사람을 생각하면 이를 갈면서 호시탐탐 복수의 칼을 갈면서 기회만을 노리면서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세상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것처럼 지키기에 어려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 말씀이 지키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정말 지키려면 바보처럼 살아야 합니다. 손해 보아야 합니다. 억울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지키기 편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만약 어떤 사람이 나의 한 쪽 눈을 상하게 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두 눈을 뽑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의 이 한 개를 깨 놓았다면 나는 그 사람의 모든 이를 틀리로 갈아 끼워야 직성이 풀릴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그러한 지나친 자기방어를 방지하기 위해서 또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하라고 구약에서는 가르쳐왔습니다. 

출애굽기 21장 22-25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 21:22-25)
이것이 법입니다. 이것이 정당한 해결 방법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사람들이 배워왔습니다. 사실 이것도 죄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오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
여러분 뺨을 맞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뺨 맞아 본적이 있습니까? 뺨을 치는 사람은 대부분 극도의 분노에 휩싸일 때 자기도 참지 못해 뺨을 때립니다. 사람들이 뺨을 칠 때 내가 때린다하고 때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갑자기 분노를 참지 못해 순간적으로 치게 됩니다. 그래서 뺨을 맞으면 기분이 상당히 나쁘고 수치스럽습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흥분해서 더 세게 받아칩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더 때립니다. 그러다가 힘이 약하면 뒤지게 얻어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뺨을 맞을 때 사람들은 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되고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른뺨을 때리기 위해서는 손등으로 사람을 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 손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서 있는 상태에서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먼저 치게 됩니다. 그런데 오른쪽 뺨을 먼저 친다는 것은 손등으로 친다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의 경우 손바닥으로 뺨을 치는 것보다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두 배의 모욕감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른뺨을 치거든 왼쪽도 돌려 대라고 하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선교사님이 우리나라에 처음 와서 성경을 가르치는 중에 자연히 오늘 본문의 말씀도 가르쳤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한 짓궂은 청년이 선교사가 어떻게 하는가 궁금해서 선교사의 오른 뺨을 갑자기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선교사가 왼편 뺨을 대면서 마저 때리라고 그랬습니다. 이 청년은 짓궂은 마음에 더욱 기분이 좋아 또 힘껏 선교사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선교사가 웃옷을 벗어 놓더니 그 청년을 죽사게 때려 줬습니다. 그 청년이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했는데 왜 그러냐고 하니까 선교사가 하는 말이 성경에는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대라고 했지 그 다음엔 아무 말이 없어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하면서 또 죽지 않을 만치 때려 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4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0)
그 시대의 속옷은 무명이나 아마로 짠 한통으로 된 자루와 같은 키톤이라고 불리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옷은 여러 가지 색깔로 화려하게 만든 모포와 같은 것으로 낮에는 의복으로 그리고 밤에는 이불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가벼운 속옷은 여러 벌 가지고 있었지만 겉옷은 단 한 벌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법에는 소송을 제기할 때 속옷은 저당을 잡을 수 있으나 겉옷은 어떠한 이유로든지 저당을 잡힐 수가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 22:26)

그런데 사람들이 재판을 걸어 속옷을 빼앗아가려고 할 때 법적으로 주지 않아도 되는 겉옷 마져도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나의 것을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재산을 더 주라는 것입니다.
500만원을 소송 걸었다면 그 사람에게 2,000만원 더하여 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송이 걸렸다는 것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억울하게 빼앗기는 재산도 아까운데 거기에 다른 재산까지 더하여 주라는 말씀이 쉬운 말씀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같으면 속옷도 끝까지 소송을 걸어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4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 5:41)

억지로 동행하기가 쉽습니까? 억지로는 한발자국도 가지 싫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내가 억지로 오리를 가야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또 보너스를 요구하십니다.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이 말씀은 그래도 조금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돈이 안 들어가고 나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역시 이 말씀도 우리에게는 참으로 지키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애인과 함께 오리는 걸어가면 모를까 억지로 가고 싶지 않은 길을 십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주님은 42절의 말씀하십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이 부담되십니까? 부담되는 것이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죄의 본능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부담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먼저 이 말씀으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0장 6절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그리고 실제로 주님은 이 말씀대로 엄청난 모욕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비꼬아 말하며 희롱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네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으로 살아할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한국 초대 교회에 그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주님을 만나고 회개한 다음에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는 김익두가 시커먼 책 하나를 들고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을 시험하려고 지나가는 목사님에게 물통으로 물을 뒤집어 씌웠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님이 물을 툭툭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인해서 기뻐하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 때문에 수모를 참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욕당하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지키려고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수치와 모욕을 참고 으로 선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9절에서 21절의 말씀에서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잘 아는 장발쟝이야기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장발쟝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빵 한 조각을 훔치다가 19년 형을 받고 출옥하였습니다. 그런데 출옥한 장발쟝을 전과자라는 이유로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방황하던 중에 '밀리엘'이라는 성직자 집에서 식사 대접을 잘 받고 좋은 방에서 잠을 자는데 눈앞에 비싼 금 촛대가 보여 훔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마침 두 개 중 하나를 훔쳐가지고 도망 하다가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어서 '밀리엘' 집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장발쟝은 틀림없이 야단맞고 끌려가 감옥생활을 하리라고 생각 했는데 전혀 뜻밖에도 '밀리엘은' "내가 준 것"이라고 경찰에게 말하면서 “두개 다 주었는데 왜 하나만 가지고 갔느냐?” 고 했습니다. 그리고 금 촛대를 하나 더 내다 주었습니다.

여기서 완악하던 장발쟝은 "진리란 이런 것인가?" 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좋은 일을 많이 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악을 선으로 갚으면 결국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바보가 됩시다. 예수님 때문에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 됩시다.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도 줍시다. 그리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하면 예수님 때문에 10리 까지 걸어가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십시다. 이것이 오늘을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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