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골방에서 만나자 (마 6:5-8)

  • 잡초 잡초
  • 369
  • 0

첨부 1


- 설교 : 이덕만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그리스인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호흡을 안 하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죽습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과 직통할 수 있는 비밀 페스워드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가 수요일 날도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기도는 영적전쟁에서는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이겼고 모세의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영적의 호흡이고,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고, 영적전쟁의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라 것입니다. 

존 번연은 기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도는 영혼의 방패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며, 사단을 향한 채찍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이 압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산기도도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새벽기도회도 하고 철야기도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100일 작정기도를 하고 어떤 분들은 40일 작정기도를 합니다. 교회마다 기도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기도합니다. 그래서 세이레 기도회, 다니엘 기도회, 특별새벽기도회, 특별 작정기도회, 여리고 성 작전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가지고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교회마다 기도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ABC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네. 앞길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라는 노래가 있듯이 기도는 우리의 안식입니다.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올바른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잘못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잘못된 기도가 무엇입니까?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외식이란 전 주에도 우리가 생각했지만 “연극한다. 가면을 쓰고 연극한다.”라는 뜻입니다. 기도하면서 외식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연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정해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거기 서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사람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사람이 보면 기도하고 사람이 보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8장 10절부터 14절에 나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사람은 바리새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1-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1-12)

따로 서서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비교합니다. 세리와 같지 않다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서 기도합니다. 나는 금식하였고 십일조를 드렸다고 자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혀 언급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한 잘못된 기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외식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연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의무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사람의 귀에 좋은 말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듣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잘못된 기도를 드리지 않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사람을 의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면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잘못된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7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바탈라게오”라는 말입니다. 즉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언부언의 기도는 타 종교에서 주문 외우듯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내가 하는 기도의 내용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기도가 중언부언의 기도입니다.

제가 새벽예배 때 예배 후에 기도하는데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비몽사몽간에 중언부언의 기도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적 음성이 들렸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날 엄청 울었습니다. 하나님께 엄청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불경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고백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내 속에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에게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중언부언의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았을 때 그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것 때문에 중언부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언부언의 기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 훈련이 잘 안되었는데 그래서 할 기도의 내용이 없어서 다시 반복하는 것은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바울사도도 자기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3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중언부언의 기도는 반복되는 기도가 아니라 내용 없이, 의미 없이 반복하여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기도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알고 시간 때우기 기도를 하였습니다. 물론 기도의 시간에 대해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시간보다 내용입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때로는 “주님 내 맘 아시죠?” 한마디 기도할 때 내 심령에서 마음이 뭉클하면서 무엇인가 쏟아 오르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리의 기도가 그런 기도였습니다. 바리새인처럼 화려하고 자랑할 것이 없었지만 세리의 기도는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을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읽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시간보다, 많은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주님은 외식된 기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 내용은 없이 말을 많이 하는 기도는 본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잘못된 기도는 본 받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올바른 기도는 무엇입니까?
골방의 기도입니다.
6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골방은 큰 방 뒤쪽에 딸린 작은 방을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골방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집에 골방이 있습니까?
골방은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하나님과 만나는 그곳이 바로 골방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일대일도 만나는 그곳이 골방입니다. 그러므로 골방은 자동차도 될 수 있습니다. 전철안도 될 수 있습니다. 화장실도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도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주님과 만남을 가지고 교제하고 있다면 그곳이 바로 골방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과 마음과 마음이 만나지지 않는다면 그곳은 골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골방에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여인과 일대일 데이트를 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여성분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제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만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만날 때마다 누군가 같이 만나서 테이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자기는 나와 둘이서 영화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싶은데 꼭 사람들과 함께 나와서 일대일로 만난 시간이 얼마나 있었느냐고… 그래서 아 여성들이 일대일로 데이트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알았습니다.

저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일대일로 테이트를 즐기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 사람과도 만남을 좋아하시지만 때로는 하나님도 일대일로 골방에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뿔랴라 휍시바라 부르셨기에 일대일로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세상의 자랑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세상의 분주함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잡념들을 닫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욕심들을 닫아야 합니다. 그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골방에는 격식이나 숨김이나 형식이 필요 없습니다. 골방에서는 마음을 쏟아 놓으면 됩니다.
여러분 골방을 만듭시다. 골방으로 들어갑시다.
골방에 들어가면
여러분의 빈 잔이 채워집니다. 여러분의 연약함이 벗어집니다. 여러분의 갈급함이 채워집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사랑이 샘 쏟습니다. 골방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위대한 아이작 뉴톤이라는 과학자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망원경을 가지고 우주 공간 수백만 마일 저 멀리까지 봅니다. 그러나 망원경을 치우고 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기도하면 땅 위의 망원경들과 기타 도구들의 도움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하늘을 보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골방에 들어가면 은밀히 보시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어는 것도 아닌 하나님과 만나는 골방입니다. 골방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또한 올바른 기도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버지”라는 단어가 3번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아버지입니다. 사랑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은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저는 제 자녀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제 자녀들의 필요를 다른 사람보다는 더 잘 압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심정을 아십니다. 아버지는 나의 고민을 아십니다. 내 마음의 상처도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1-5)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십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 아시죠?”의 한마디의 기도가 우리 속에서 쏟아 주님과 마음과 마음이 만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잘못된 기도는 제하여 버리고 주님 원하시는 골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마음껏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