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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일감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입니다 (수 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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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지철 목사

흑인 슬럼가에서 태어나 24세에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제패한 후 40연승의 기록을 세우고 그것도 부족하여 은퇴 10년 만에 복귀를 선언, 45세에 최고령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사나이, 권투계의 신화로 불리는 조지 포먼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인생의 링에서 쓰러졌을 때 당당하게 일어서라"는 책에서 조지 포먼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가 담겨져 있는데
그는 "나이가 많다고 어쩔 수 없이 틀에 박힌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삶에 실패와 좌절감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조지 포먼이 94년 45세 때에 다시 글러브를 낀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그는 과거에 자기와 같은 가난한 빈민들을 위한 특수목회를 하려고 하니 많은 자금이 필요로 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던 중 성령의 인도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유일 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글러브를 껴라"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기마다 승리했고 그것도 완벽한 K. O승을 거뒀습니다. 마이클 무어리를 이기고 또 다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지금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인생을 승리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은 결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즉 선을 이루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매사에 임 할 때에는 놀라운 결과를 반드시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같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매사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에 따라 너무나도 다른 삶의 결과를 가져 온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조지 포먼에 견줄 바가 아닌 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의 젊은 사람들도 하기 싫은 헤브론 산지를 공격해야 하는 참으로 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나이 8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여호와의 말씀 하신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고 나섰습니다.
45세의 포먼이 KO의 주먹을 날린 것과 같이 85세의 갈렙의 펀치가 헤브론의 아낙 자손을 무찌르고 승리 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적을 두고 감당 하고자 할 때에 이와같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그 일로 인하여 그 사람은 참으로 승리하며 복된 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는 무엇을 위하여 내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가?를 바로 설정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 또 내가 무엇을 위하여 이 일을 하여야 하는 가를 잘 알지 못하고 살아가므로 참으로 삶이 불안하고 불확실 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에는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위하여 살아가고 내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의 선을 위하여 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삶에 참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똑같은 삶을 살아가더라도 그의 삶에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나만을 위한 삶을 사는 자가 있고 같은 삶이 라도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하나님을 위한다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사고를 어디에 두느냐? 에 따라서 살아가는 방식도 그 결과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전혀 그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가난한 흑인들이 몰려 사는 할렘가를 한 어머니와 어린 아이가 지나가면서 한참을 가다 보니까 오른쪽 낡은 건물 벽에 지저분한 글씨로 이러한 글귀가 씌어 있었습니다. 'God is no where.' 이 말을 원문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고 어머니가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무심코 지나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걷고 있던 꼬마 아이가 엄마를 보고 말했습니다. "엄마 저건 이렇게 읽는 거야?" 'God is now here.' '하나님은 이곳에 계신다.' 라고 하면서 글귀를 가리켰습니다. 영어의 no where를 w자를 no 뒤에다 붙이니까 그 뜻은 180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는 어디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았지만 아이에게는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 하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자의 삶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의 삶은 너무나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나의 삶에는 하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삶으로 인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계시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갈렙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능력과 축복을 받은 체험적인 삶이 나에게도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이 무엇일까요?
저는 지난 철야기도 시간에 두 명의 성도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한 하나님에게 사용되어 지는 만큼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형편과 입장만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똑 같은 사람이지만 만사를 인간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사람이요 똑같은 눈이지만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보는 눈이 있고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는 눈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와서 똑같은 주보를 보는데 어떤 사람은 주보 속에 담겨져 있는 ‘은혜스러운 것’을 보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주보의 틀린 글자만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의 체험은 인간의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자입니다.
어떤 여인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가정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생각에는 어떠한 판단이 서겠습니까? 인간적인 시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마음으로 그의 생활이 어떠할까요? 그 일로 인하여 크게 두려워하고 고민하고 거의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을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 날 것이며 하나님의 평안으로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을 아주 귀한 자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가 망하고 안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내 입장만을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보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사에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헤브론 산지를 점령하는 일을 결코 아름답게 보지 않았습니다.
8절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결코 헤브론을 점령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제 속았다 모세에게 속았고 하나님께 속았다 얼마나 믿음이 없는 소리를 하고 온 백성들은 은혜가 다 떨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생각 한 대로 그들에게 임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도 그들 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다고 한데로 죽겠다고 소리 친 데로 그들은 할 수 없었고 다 죽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우리 가운데 교회 일이나 주의 일을 그렇게 만사를 그렇게 바라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갈렙은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습니다.
12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 할지라도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적이었습니까?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가 믿었던 대로 그의 말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승리하고 그 땅을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누리는 축복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누구도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축복을 받을 사람은 제 눈으로 보기에는 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교회를 인간적으로 바라보면 은 얼마나 제 자신부터 실망이 되고 그 누구도 기대를 할 수 없는 자들뿐입니다.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저렇고 그래서 안 되고 참으로 그렇게만 보이니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 볼 때에 제 자신부터 소망적 일뿐 아니라 누구든지 믿음으로 따라오기만 하기만 하면 큰일을 할 수 있는 자들로 다 보이는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다 할지라도 누구는 저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복 되게 하실 거야 그러니 제 마음이 살판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여러분들을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제 인생을 인간적으로 바라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장 죽어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을 즐거워하고 가장 당연히 여기게 됩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할렐루야!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과 구원은 말 그 대로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만사가 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선을 알고서 하고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기를 주저하고 있는가? 왜 하지 않는가? 왜 능력 있고 축복된 자가 되지 못하는가 하고 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아예 행하려고 마음을 먹지 않고 있으니 어찌 행할 수 있으며 행하지도 않으니 어찌 역사가 있으며 역사가 없으니 어찌 축복이 되겠습니까?
하려고만 하십시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게 합니다.
하지도 않고 할 수 없다 하고 복 받을 짓도 없이 축복하시지 않는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라고 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일을 지키고 보면 주일은 주일대로 다 지켜지고 모든 일이 다 할 수 있고 주일을 지킴으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예 주일을 안 지켜도 된다는 생각이 있으니 그 사람 어찌 제대로 주일 한번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주일을 지킴으로 오는 안식의 축복이 하늘의 축복이 임하겠습니까?
주일의 안식의 축복하고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 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육으로 심으면 썩어 질 것을 거두고 영으로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선을 행 하려고만 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헤브론 땅을 주실 때에 이미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민수기 13:1-2)
이 말을 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주권을 가지시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라는 말입니다. 이 일의 책임자는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 “주는” 이란 말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신 땅입니다(창세기12:1; 15:16). “보내어” “보내라” 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각 지파의 정탐꾼을 보내라는 말입니다. 보내신 자는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주기로 약속한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좇아내리이다”(민수기 14:10-12)
여기서 우리는 갈렙의 신앙과 열정을 보게 됩니다. 이 산지는 “필경” 정복될 산지입니다. 하나님이 주기로 약속한 것을 그는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고 감당하려고 하니 감당하게 하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두시고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는 줄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 목적과 자신의 배를 위한 자는 하나님이 다 불러 가셨습니다.
왜 내가 죽지 않고 왜 내가 살아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을 내가 하려는 마음 아니 기도해 보겠습니다가 아니라 이제는 그 선을 향하여 하는 행동 개시만 남았습니다. 할렐루야!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정확한 십일조의 생활을 하십시오. 듣기 싫지만은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조금 형편과 사정이 나아지면 하겠습니다. 어찌 행치 않는데 형편이 나아지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행하지 못합니다. 형편이 나쁘니깐 더 빨리 해야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치 않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하나님을 떠나고 있음을 왜 모르고 있습니까?
저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을 때에 반드시 이것저것을 행하십시오. 라고 말씀을 통해서 선을 분명히 일러 주었는데도 그 때는 그들이 어찌 그리 쉽게 예 하고 대답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살아가는데도 이상하리만큼 하나님이 축복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위하여 유독이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법이 있고 선을 위하여 사용하여도 부유케 되는 법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주를 위하여 수고한 것은 결국 나에게 많은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불러서 이 일을 내게 맡기셨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주어진 선을 욕심을 내어서 내가 어떤 사업에 이익을 얻기 위하여 투자하는 마음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광야 사십년 동안을 지켜 주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위하여 감당하는 자의 길을 지켜 주시며 보호해 주시고 간섭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불신앙의 다수를 필요로 하시지 아니하시고 선을 감당하고자 하는 믿음의 소수를 원하십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다수결의 역사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진리의 역사입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불의한 다수가 순간은 승리하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거룩한 소수가 승리했습니다. 열 정탐꾼과 이들과 함께 그 무리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가 분명히 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저것을 구하는 자가 되기 전에 먼저 내 입장에서 요구되는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핑계하지 마십시오. 당장 이 시간부터 행동에 옮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은 감당 하지 못 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은혜로 감당 할 수 있고 쉽게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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