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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힘의 원천 (왕상 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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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교 자 : 박영준 목사

인간의 삶을 생존경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고, 목숨을 내 놓고 싸우듯이 해야 한다는 말이겠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 전쟁을 하듯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신앙생활도 사실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생활을 싸움으로 묘사한 말씀이 적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6:12
  “너희가 죄와 싸우되” 히12:4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롬7:23
 
딤전 6:12절에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고,
히브리서 12:4절에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라고 했으며,
로마서 7:23절에서는, “......내 마음의 법과 싸워....”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을 정리한 말씀이 있습니다.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딤후4:7-8)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의 믿음생활, 복음 전파를, 선한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싸우는 사람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바울은 그야 말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미움을 받고 매를 맞았으며, 추방을 당했고, 모진 고난을 다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변함없이 달려갈 길을 다 갔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떳떳하게 면류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영적인 싸움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전쟁이든, 불행하게도 전쟁에 나가서, 죽거나 패배하고 돌아오면, 비참하고 슬프지만, 이기고 돌아오면, 그 전쟁이 재미있고 당당하게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싸움은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싸움이든지, 힘이 있어야 하지만, 믿음의 싸움에는, 더욱더 힘이 필요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만나는 신앙의 적이 무엇입니까?
/////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6-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함이라.”(엡6:6-12)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와 싸우는 적이, 혈과 육을 가진 그 어떤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아니고, 개, 되지도 아니고, 사자나 호랑이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적입니까?

다같이 한 번 따라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

정사와 권세를 가진 어두운 세상 주관자들은, 신앙을 박해하는 정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악령은,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궤계를 씁니다.
궤계란, 간사스런 꾀, 궤모를 말합니다.‘
마귀는, 결코 어리석지 않습니다.
나쁜 꾀를 가지고 있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이 들으면, 그럴싸해서 금방 넘어갈 수밖에 없는, 사악한 꾀를 씁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을 보십시오.
그 두 사람은, 마귀가 꾀니까, 그럴 듯해서 넘어 간 것입니다.
이 땅에 있던 수많은 이단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럴듯하니까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적들과 싸워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도 입고, 늘 주안에도 있어야 하지만, 또한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강력한 신앙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근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이 터져서 수많은 적군들에게 포위되는 위기를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적들을 두렵고 떨리게 해서 쫓아내 버립니다.
때문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은, 강력한 믿음의 힘을 소유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믿음의 강력한 힘을 소유함으로, 악한 영들, 사단과 마귀의 세력을 제압하고, 귀신의 세력을 내 쫓으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 믿음의 힘을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답을, 오늘 읽은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엘리야의 말과 그와 관계된 기사입니다.
엘리야는, 주전 9세기에 북왕국, 이스라엘 길르앗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와 관계된 기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북 이스라엘 7대왕인 아합과 그의 처인 이세벨과 싸운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왕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권을 이어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의 아버지 솔로몬 왕은, 지혜로운 왕으로서, 초기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왕이었고, 정치도 잘해 나갔으나, 말년에 가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왕기상 11:1-8절에 보면,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결혼을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수많은 여인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모압과 압몬과 에돔과 헷 출신 여인들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야훼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여인들이었으므로, 왕에게,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신 밀곰을 섬기게, 유도했습니다.
솔로몬이, 아내들 때문에, 참 신앙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정치를 할 수 없었고, 대적 자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대적자의 대표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솔로몬의 신복인,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측근에서 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저항은, 성공하지 못했고, 애굽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등극하자, 큰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왕은 정치를 좀 새롭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귀국해서 르호보암 왕에게 나타나, 이렇게 청원했습니다.
/////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매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12:4)라는 청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선정을 베풀면, 반역심을 버리고, 잘 섬기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르호보암은, 그 청원을 받고, 노인 그룹의 신하들과, 젊은 그룹의 신하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자문을 구했는데, 노인 그룹은 저들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좋은 대답을 하라는 조언을 해 주었고, 젊은 자들의 그룹은 그와 반대의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즉 그들에게,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12:11)
르호보암은, 그 두 조언 중에서, 노인들의 조언을 버리고, 젊은 자들의 자문을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앞으로 포악한 정치를 하겠다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중에,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빠진 열 지파가 일제히 일어나서,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열 지파의 북 이스라엘과, 르호보암이 통치하는 남 유다가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여로보암의 북 이스라엘이, 명분도 좋았고 백성도 절대 다수여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일단 왕이 되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왕권을 계속 장악하고 싶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근본이 종교적이었고, 그들의 신앙구심점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들은, 남자이면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1년에 적어도 세 차례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기의 백성들을 가만히 놔두면, 전통에 따라서 계속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고, 드디어는 신앙의 종주국은 유대이니, 다시 유다 왕족을 섬기자는 운동이 일어나서, 자기의 왕국이 와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유다와의 국경을 철저히 봉쇄하여, 왕래를 못하게 하고, 그 대신 신앙의 공백을 채워주기 위해서, 북쪽에는 단, 남쪽에는 벧엘에다가 예루살렘을 성전을 대신한 성전을 세우고, 그 속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웠습니다.

자기의 정권욕을 채우기 위해서,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제 1, 2계명을 어기게 한 것입니다.
그러한 토양에서 출발한 북이스라엘 이었으므로, 정의와 신의가 깨어져서, 정권이 계속 흔들렸고, 배신과 혁명과 살육이 거듭되는, 우상 숭배의 나라가 되어졌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제 7대 아합 왕도, 그러한 토양에서 왕이 된 자였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그는 우상 숭배의 본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두로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더 철저한 반 야훼 신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합왕이 모든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악독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인격적으로 남달랐다기 보다는,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취해서, 그녀에게 이용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세벨은, 두로에서 아합 왕후로 올 때, 두로의 신앙대상인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가져 왔고, 수도인 사마리아에다가, 거대한 바알 신전을 다시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바알 제사장 450명을 육성시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이 잡듯 샅샅이  찾아서 처형을 해 나갔습니다.
박해가 너무 심해서, 야훼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쓰고 피신해 다니다가, 잡혀서 죽어갔습니다.

선지자의 학교도 폐쇄되어,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아합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본문 말씀 바로 앞인 16:30-33절에 있습니다.
/////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 하였더라.”(왕상16:30-33)는 것입니다.     

나라의 통치가 그러니, 야훼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들은, 어디에 가도 살 수 없었습니다,
시대가 이러하니, 누구하나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요” 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저마다 야훼 하나님을 배교 했고, 바알 신 숭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때에, 하늘의 별같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이 야훼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면서,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자기편이 되어 줄 사람 하니 없고, 잡히면 죽을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싸움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엘리야는 길르앗의 디셉에 살던,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은 요단 강 동편에 있는데 계곡과, 바위가 많은 거친 광야였습니다.‘
음침할 정도로 고요한 적막을 깨는 것은, 계곡 물소리뿐이었고, 광야의 사나운 맹수들이 울부짖는, 포효 소리들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 같은 도시의 사람들은, 디셉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한 곳에서 자라난 엘리야였기에, 특별히 배운 것이나 재산 같은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아는 것은 짐승을 치는 일이나, 농자 짓는 것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편이 되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합과 이세벨에게 신앙의 싸움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심한 박해와 목숨을 내건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용기는, 내면에 어떤 강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힘 인줄로 믿습니다.
신앙의 힘을 가지면, 대적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 힘은, 반드시 이기는 힘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엘리야가, 어떻게 그러한 믿음의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본문에서 보면, 그 출처가 믿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1. 그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히 아합에게 나아갔고, 담대하게 말하고 도전할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보다 신앙인을 강하게 하는 믿음은, 더 이상 없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증거 하는 애훼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기 때문에, 신앙의 힘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도, 바로 이러한 믿음인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관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도,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앙에 철저할 때, 우리는 어떠한 대적도 이길 수 있는, 힘의 소유자가 되어지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앞부분에 보면,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섬기는 것은, 앞에서 하는 일입니다.
뒤에서는 못 섬깁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39편 7-10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 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 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힘이 되게 하십니다.
  [본 회퍼] /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제2차 대전 당시, 신자였던 [본 회퍼]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하나의 신앙을 가지고, 히틀러와 대항해 싸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히틀러 앞에 굴복했으나, [본 회퍼]만은 그 신앙 때문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 나갔습니다.

세계의 존경과 사랑을 불렀던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첼로 연주자로서 심한 근시로, 연주할 때에, 제대로 악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속해 있던 악단의 지휘자가, 병원에 갑자기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단원 들 중 누군가에게 지휘를 부탁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악보를 몽땅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선발되어서, 지휘자를 대신해 지휘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서, 세계적인 지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토스카니니]가 그토록 시력이 나쁘지 않았다면 그는 평범한 첼로 연주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시력이 나빠서 약보를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악보를 외워야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더 큰 능력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합니다.
[토스카니니]는 회고록에서 "어려울 때 힘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눈물! 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눈물이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힘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는, 그 어떤 대적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굴복을 모르는 강한 힘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
현대인들이 왜 이렇게 나약합니까?
조그마한 시험에도 흔들리고, 말 몇 마디에 상처를 받아 원한을 사고, 그것들 때문에 신앙이 흔들입니다.
엘리야가 가졌던 것과 같은,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며, 내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나의 힘 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생명을 가진 곤충 가운데, 개미처럼 신비한 곤충도 없습니다.
가느다란 허리로, 하루 종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체구로,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먹이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죽은 메뚜기를 질질 끌고 가는 개미를 지켜보던 어떤 관찰자가, 개미의 몸무게를 달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개미는, 무려 자기보다 60배나 더 되는 것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힘을 가지고 살았던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이겨나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왕에 신앙생활 할 바에는,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믿고, 오직 그분의 힘만이 참된 힘이 되시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죄악과 어떤 악령의 힘도 이기는, 강한 능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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