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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합격통지서 (삼상 24: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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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목사 

바야흐로 시험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고3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수능성적과 내신성적을 들고 동분서주하고 있고, 중학생들은 추첨이긴 하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학교에 가기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스럽습니다. 지난 주 손칠현, 황영미권사님 아들 조은이가 자신이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부천고등학교에 추첨이 되었다는 소식과 이은주집사님 딸 은혜가 대학을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쁜 마음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 드렸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서로 축하를 해야 할 기쁜 소식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지역장님들이나 교구목사님에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미다. 기쁨은 나누면 2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여 다른 대학을 가야 하거나 재수를 해야할 가정들이 있다면 감추지 말고함께 나누면서 서로 위로받고 기도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가 되고 가까워지는 가장 중요한 계기는 우리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나눌 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1968년도 당시 부천북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을 치기 위해 졸업고사를 보았습니다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문제가 많아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버님의 목회지를 따라 국민학교를 4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 끝에 부천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마산에서 시작된 1-2학년 시절은 언제나 일등이어서 매년 우등상을 탔노라고 어머님이 증인이십니다만, 그 후부터 저의 학업은 완전히 끝이 난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썩 좋지 않은 점수를 가지고 중학교 진학을 하자니 선택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이왕이면 미션스쿨을 선택하였는데 균명중학교였습니다. 서울역에서 올려다보면 만리동 언덕 위에 높이 서있는 학교였는데 당시에는 모두가 소위 3류라고 칭하던 학교였습니다. 친구들이 경기중, 서울중학교에 시험을 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저같이 공부 못한 학생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당시에 경쟁율이 대단했기에 여기도 합격못하고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시험을 치루고 나서 합격자 발표를 보러가는데 아버님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저와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떨어질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면하려고 같이 가기를 원치 않았는데 아버님은 굳이 같이 가시겠다고 하셔서 결국 함께 발표장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자로 된 이름을 사용하던 시대였는데, 제 이름은 한글에다가 가나다 순으로 언제나 제일 나중이어서 합격자 대자보 맨 끝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조바심에 아버님보다 먼저 뛰어 올라가 합격자 명단을 보았는데 감사하게도 명단 끝 자락에 제 한글 이름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좋았던지 저도 모르게 환호를 질렀는데 어느새 아버님이 오셔서 제 모습을 보고는 빙그레 웃고 계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너 시험 보느라고 고생했다며 학교 아래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 주셨는데, 아담한 남비에 계란 노란자위가 가운데 엊혀진 아주 근사한 점심을 함게 먹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당시에는 자장면만 먹어도 행복한 시절이었으니까요....

왜 초등학교를 4번씩이나 옮기셨느냐고 부모에게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중학교를 겨우 들어간 저는 기초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학업은 사실상 고통스러운 시간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부담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할 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본교 진학하면 가산점을 준다기에 본교 진학을 지망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도 잠시였습니다. 1학년 말이 되자 2학년 부터는 문과와 이과로 나눌 뿐 아니라 우열반으로 구분한다는 소식에 여기서 내 인생은 판가름 나겠구나 생각하니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답니다.

열심히 공부를 했으니 정말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2학년을 진학하면서 우수반에 들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다시금 제 페이스를 찾은 것이지요. 당시는 서울대학교에 몇사람 합격했는냐를 가지고 고등학교를 평가하던 시기에 저희 학교는 보통 2명에서 3명 정도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학생이 서울대학교를 가면 담임선생님에게 양복을 상급으로 주던 시대였습니다만, 저는 2학년 겨울 방학을 맞아 진로를 고민하다가 혼자서 철원 대한수도원에서 일주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사모했고, 결국 금요일 아침 기도굴에서 분명한 응답을 받고나서 저는 주의 종의 길을 가기로 방향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입학의 시기에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은 혹 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들이나 부모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희망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실패의 시기도 있고 고난의 시기도 올 수 있습니다. 남들이 쉽게 가는 코스를 우리는 어렵게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코스를 빨리 갔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느냐가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다윗이 십 황무지 수풀에서 완전히 사면초가가 되었던 그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블레셋 군사들을 사용하셔서 사울의 군대를 철수 시켰던 하나님의 극적인 손길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가지고 우연이 아니냐고 말하는데, ‘맞습니다. 우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연을 자주 주시는지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기쁨을 우리는 지난 시간 나누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우연이라는 단어 밖에 쓸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합니다. 할렐루야!

이제 블레셋과의 전쟁을 마치고 다시 정신이 든 사울왕은 군대를 이제는 3천명이나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도 군대 중에 택한 사람입니다. 정예용사들 3000명을 데리고 엔게디 황무지에 어느 지역에 숨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찾아온 것입니다.

엔게디 황무지는 다른 황무지와는 달리 거기서는 물이 흐르는,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기에 다윗과 600명의 공동체들에게는 훨씬 피난생활에 유익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수없이 많은 석회암 지역에 동굴들이 있었는데, 그 많은 동굴들 중에서 어느 큰 동굴 속에 이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사울이 그 주변을 지나가다가 용변이 마려워서 군대를 밖에 두고 동굴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밝은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사울왕이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들어오는 것이 용변을 보러 들어온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지만, 그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우리는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하는 말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의 참모들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다윗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와있던 다윗에게 견디기 어려운 피난생활에 어려움에 찌들어있던 다윗에게 이제는 고난을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이제는 모든 수고를 끝낼 수 있는 그리고 사울을 죽이고, 예루살렘 수도로 들어가서 왕궁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셨노라고 그들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얼마나 그럴 듯한 메시지인지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겠다고 네 소견에 네가 선한대로 네가 행동하는 그것이 바로 내 뜻이라고 바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사방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이제 그들의 건의에 따랐습니다. 뒷복장에 칼을 꽂으며 모든 고생과 수고는 끝나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기회가 다가온 것입니다. 너무 좋은 기회가 다윗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경우를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만 끝내면 이것으로 인해서 자기와 공동체와 이스라엘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해방을 받는 한 두가지 정도에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입니다.

그런 기회가 사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결론을 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다윗은 자기의 측근들에게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지 않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사람이다. 만약 하나님이 저를 심판하신다면 저를 병들어 죽게 하든지, 전쟁에 나가서 죽게 하든지,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이다.

역대 상하는 다윗의 고백을 더 자세하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블레셋과 길보아전투에서 싸우다 죽었을 때 성경은 분명하게 사울의 죽음을 평가하기를 사울이 죽은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길보아 전투에서 싸우다가 실력이 떨어져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범죄함을 인하여 그렇게 죽은 것이라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만 자신의 마음을 다듬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주의 종을 손 대는 것을 금하였다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게 유익한 환경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내게 편리하고 도움의 상황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옆에서 누가 이건 하나님의 뜻이야.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증거야. 라고 말만 해 준다면 우리는 단숨에 그 길을 가게 됩니다.

아니 누가 이야기 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거야. 확실히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야. 가끔씩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오실 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교회에 오시게 되었나요?’ ‘목사님, 제가 이 교회 오기 위해서 많이 기도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응답을 주시는데, 평안의교회로 가래요. 그래서 왔습니다. 저 응답받고 온 거예요.’

죄송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교회를 떠나면서 뭐라 그러는지 아십니까? 제가 기도해 보니까 교회를 떠나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떠난대요. 웃기지 않습니까? 자기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예요. 자신의 유리한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예요. 얼마나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얼마나 신앙생활을 편리하게 하는지 몰라요.

우스개말로 우리의 많은 선배들이 이야기 합니다. 목회하는 목사님들이 교회를 새로 부임할 때 저 부둣가에서 목사님 짐을 받아든 교인이, 저 정류장에서 목사님을 환영하고 받아준 그 교인이 목사님을 쫓아내는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당신들 경계하라고 후배들에게 선배목사님들이 교훈하는 한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당신 보따리를 받아준 사람이 당신 쫓아내는 사람이야.

우리가 우리 신앙생활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편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붙이는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4절에서 다윗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기를 원수를 당신 손에 붙이고, 당신이 그 원수를 어떻게 처리 하는지 하나님이 위임했다고 하는 이 말씀은 거짓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말씀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얼마나 그럴 듯하게 갖다 붙였는지 그냥 4절을 읽고 나면 아멘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때는 불신자가 고백하는 말이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잘 못 구분해서 성경을 끝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나 불신자가 하는 말 끝에 성경을 딱 읽고 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아멘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준비 할 때는 어디에서 성경이 끝날 것인지, 굉장히 조심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고, 찬송을 부를 때에도 어떤 찬송은 1절부터 모든 절절이 다 신앙고백적인 표현이 있지만, 어떤 찬송은 1절,2절,3절은 아니예요. 마지막 끝까지 불러야 신앙고백의 표현이 되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면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그리고 끝나면 그것은 아니예요. 마지막 4절 믿어야 살겠네를 불러야 그 찬송은 끝나는 거예요. 보통 바쁘다고 1절만 부르십시다. 그럴 때 사회자들은 찬송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어처구니 없을 때가 많아요.

오늘 이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을 다윗에게 너무너무 그럴 듯 하게 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만들고 판단의 어려움을 줍니다. 그리고 옆에서 막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결정하도록, 이제 우리의 고생은 끝내도록,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그들 앞에서 하나님 중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가 금하시는 것이라. 나도 그렇지만, 너희들도 그래서는 안 된다. 진정한 지도자의 소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당장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당장 내게 어려움이 계속 되더라도 내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반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조용히 사울임금 뒤에 가서 크고도 넓은 왕의 옷자락 한 구석을 베었습니다. 그것도 다윗은 왕의 옷자락을 벤 것 때문에 마음을 아파했다고 할 정도로 다윗은 그렇게 순수했어요. 왕이 볼 일을 보고 저 골짜기 내려가서 군사들 있는 곳으로 다가간 것을 보고나서 다윗이 그 언덕 위에서 옷자락을 흔들면서 말합니다.

‘내 주 왕이시여’, 그리고 다윗을 바라볼 때 다윗은 엎드려서 절을 했습니다. 신하로써 자기가 갖추어야 할 예의를 다 깍듯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11절에 보면 ‘나의 아버지여, 보세요.’ 라고 그 왕의 옷자락을 들 때에도 사위로써 부모님을 향한 자기의 자세가 틀림이 없었어요.

왕이시여, 왕의 주변의 간신배들이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그런 말들을 왜 왕이 듣고서 저를 쫓아다니십니까? 내가 이 왕의 옷자락을 벤 것을 보시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왕을 죽일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어찌하여 왕은 저를 죽이려고 착각하고 있습니까? 옛속담에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왕을 죽일 마음이 조금도 없는데, 어찌하여 왕은 군대를 이끌고 다니시면서 왕에게 있어서 죽은 개나 벼룩과 같이 힘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나를 잡으러 다니십니까?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은 후 사울임금이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내 목소리냐? 그는 소리 높여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였는데, 너는 나를 선대하였구나. 너는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구나. 사람이 원수를 만나면 편안히 가게 하는 법이 없는데, 너는 나로 하여금 평안히 가게 하였구나. 너는 나보다 의롭다.

그러면서 지금 사울임금은 다윗에게 두 가지를 20절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나는 네가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의해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지금 다윗에게 사울왕이 굴 속으로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한 마지막 기말고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많은 테스트가 있었지만, 여러분 시험도 제일 중요한 시험이 뭐예요? 기말고사잖아요. 졸업시험이잖아요. 지금 다윗은 눈 앞에서 창으로 등을 찌르면 모든 수고와 고생이 끝나는 일인데, 마지막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다윗에게 졸업고사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고백합니다. 정답을 써 내고 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종을 내가 손을 들어 해 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정확하게 정답을 써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사울왕의 입을 통해서 다윗에게 합격 통지서를 지금 읽어주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왕이 될 줄을 믿노라. 이 이스라엘 나라가 너로 인하여 견고하게 될 줄을 나는 아노라.

우리끼리 서로 좋아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끼리 서로 칭찬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대해 보면서 1년이고, 2년이고 직장생활 해 가면서 당신은 진짜 크리스찬이야, 당신은 진짜 교사야, 당신은 진짜 성도야. 그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 합격통지서를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시험의 계절에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평가를 받았는데, 사울을 통해 주시는 그 놀라운 그 하나님의 평가, 그런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위기 때에 발휘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라.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위기 때에 그 믿음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이 될 때, 그 믿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마음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사 저들에게 진정한 믿음, 하나님 마음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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