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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몽을 따른 발걸음 (마 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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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추적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남한에 와있는 탈북자들은 불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 탈북자 한 분이 자기 아파트 앞에서 살해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탈북자는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성형수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고위층에 있는 어머니와 이모까지 탈북하면서 그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결국 북한의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에게 자기의 왕위를 빼앗길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거처를 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탄생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주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헤롯은 어떤 아기가 메시아인지 구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인근 마을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다 죽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때를 기준으로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기를 극적으로 탈출합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현몽에 비결이 있었습니다. 현몽이란 꿈에 죽은 조상이나 신령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주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애굽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밤에 즉시 가족을 데리고 몸을 피했습니다.

헤롯의 군대는 베들레헴에 들이 닥쳤고 잔혹한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헤롯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가정이었고, 단지 호적으로 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왔을 뿐입니다.

그들은 결례의식에 따라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이 좋아 그냥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눌러 살기로 했습니다. 아기를 낳고 결혼한 신혼 가정은 행복했습니다.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들이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피신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전해오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애굽으로 피신하던 요셉 가족은 밤에 한 굴에 들어갔습니다. 헤롯의 부하들이 그곳까지 추격해왔습니다. 굴마다 다니면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가족이 피신한 굴 어귀에 거미가 거미줄을 쳤답니다. 헤롯의 군인들은 굴 입구에 쳐진 거미줄을 보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거미줄이 있으니까 사람이 들어간 흔적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미줄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트리에 금줄과 은줄을 장식한다고 합니다. 이 금줄과 은줄은 이 전설의 거미줄을 상징하는 것이랍니다.

또 애굽에 가면 예수님 피난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지하에 지어져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이 굴속에 피해 계셨기 때문에 지하에 지었다고 합니다.

사실 애굽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한 여정입니다. 따지고 보면 역 출애굽 행로입니다. 아기를 데리고 광야를 통과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갑자기 떠났기 때문에 여행 채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며 드린 예물들이 이 여행에 아주 요긴하게 쓰였을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절묘한 은혜입니다.

예수님 가족이 애굽에 머문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헤롯은 여리고에서 병으로 이내 죽습니다. 헤롯은 70 세의 나이에 극히 무섭고 더러운 병에 걸렸습니다. 그 내장이 썩으면서 고통 가운데 죽었습니다.
이 헤롯이 죽은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따지는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6 세기의 로마의 신학자 디오니스우스 엑시구스는 헤롯의 죽은 해를 로마 기원 754 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때를 기원 1 년으로 제정하고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계속적인 연구의 결과 헤롯이 실제 로마기원 750 년에 죽은 것으로 발혀졌습니다. 그래서 4 년의 착오가 났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램제이 경은 성탄 연대를 기원전 6 년으로 정했습니다. 매킨래이 대령은 동방박사가 본 별을 연구하여 기원전 8 년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서기 연호는 4 년에서 8 년의 오차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헤롯이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헤롯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포악했습니다. 그는 아켈라오입니다. 헤롯은 죽으면서 세 명의 아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를 아켈라오에게, 갈릴리 지역은 안티파스에게, 바다네아는 필립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셋 중에서 가장 악독한 왕이 바로 아켈라오입니다. 그는 왕이 되자 왕권을 세우기 위해서 백성을 3,000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베들레헴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아켈라오의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가족은 비교적 유순한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 지역으로 피해갔습니다. 예수님 가정은 나사렛이란 동네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나사렛은 화려한 곳이 아닙니다. 갈릴리 남쪽 분지에 속한 작은 동네입니다. 이곳은 유대인들로부터 천시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부에서 한참 밀려난 변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촌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란 칭호는 멸시와 천대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되심을 의미합니다. 낮고 천한 자들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종의 상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요셉이 현몽을 꾼 장면이 세 번 나옵니다. 한 번은 헤롯이 칼을 휘둘러 어린 사내 아이들을 죽일 때입니다. 급히 애굽으로 피신시키십니다. 두 번째는 헤롯의 죽음을 알리고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세 번째는 아켈라오가 포악하기 때문에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가라는 지시를 하십니다.

모두 절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을 피하게 하십니다. 또 안전한 때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모두 요셉의 꿈을 통해서 갈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순종의 사람 요셉은 현몽이 있을 때마다 망설임 없이 즉각 움직였습니다. 그러기에 실수 없이 예수님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헤롯이 광란의 칼을 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연약한 아기 예수님은 그 칼에 맞설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싸움은 헤롯과 예수님의 싸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헤롯을 조정하고 있는 것은 사단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헤롯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세계를 막는 것입니다. 물론 이 헤롯과 맞서 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을 사단으로부터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인도는 100% 정확합니다. 실수가 없으십니다. 헤롯이 아무리 날뛰어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됩니다.

마태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소개하는 중간 중간에 구약에 선지자들을 통해 이 일이 예언되어 있는 것임을 밝힙니다.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신 일이 구약 호세아서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15 절을 보면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2:15>

또 두 살 아래 사내아이의 학살은 예레미야 선지자 말한 라마의 통곡하는 소리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또 예수님이 나사렛 동네에 정착한 것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 것이라는 겁니다. 헤롯의 방해 작전은 하나님께서 환하게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한 발 앞서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2002 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4 강까지 올라갔습니다. 한 방송사에서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용병술을 회고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히딩크는 경기에 앞서서 작전으로 선수들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작전은 예측한 대로 주효했습니다.

포르투갈 전에서 박지성 선수가 골문 앞에서 가슴으로 받아 왼발로 슛한 것이 골기퍼 가랑이 사이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히딩크는 이 골을 박지성에게 경기 전에 미리 연습시켰습니다. 포르투갈의 수비 때 빈 공간이 생기는 것을 알아내고 박지성을 미리 그 공간에 세웠던 것입니다.

또 터어키전에서 이을용 선수가 절묘한 프리킥을 오른쪽 모서리에 성공시켰습니다. 이것도 연습 때 똑같은 장면을 연습시켰던 결과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이탈리아전 때도 상대편 선수가 2 명은 퇴장 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내린 작전은 ‘상대를 흥분시켜라’였다고 합니다. 히딩크는 이탈리아 전은 연장전까지 갈 것으로 예상하고 체력전으로 맞섰습니다.

선수들이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에 탄복하면서 따른 이유는 그의 예측이 척척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의지할 때 승리가 보장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예측은 틀림없습니다. 언제나 정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만 받으면 실수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인도를 따를 수 있습니까? 요셉처럼 언제나 그렇게 꿈에 나타나 할 일을 지시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분명하고 똑똑하게 알 수만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요셉처럼 우리에게 그렇게 꿈으로,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예수님과 직접 연결이 된 문제였습니다. 여유가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이 계시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면 금방 위기가 닥칠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런 위기상황 때는 대부분 현몽과 같은 분명한 계시가 주어집니다. 더 급한 경우는 하나님의 사자가 꿈이 아니라 직접 나타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랬습니다. 날이 밝으면 베드로는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천사가 감옥에 나타나 급하게 베드로를 깨웠습니다. 성경에는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차면서 깨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직접 계시는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하나님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아주 약한 하나님의 신호를 붙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때로는 성경 말씀을 통해, 또는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사실 기도와 말씀 외에 다른 통로로 하나님의 신호를 붙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요즘 신사도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사도, 사도행전 처럼 능력을 행하는 사도가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가 부활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베니힌 같은 이단은 아침에 일어나면 성령님하고 굳모닝! 하고 인사를 한답니다. 하나님하고 직접 대화하면서 통한다는 거지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도? 위험한 말들입니다.

구약 성경 욥기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호에 답답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습니다. 욥은 아무런 잘못한 일이 없는데 마치 큰 징벌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욥은 내가 왜 고통을 겪어야 되냐고 항변합니다. 욥은 계속 떠드는데도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그러나 욥이 떠들면 떠들수록 하나님의 신호는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국 욥은 잠잠해졌고 그제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욥은 말씀을 통해 완벽함을 자랑했던 자신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해결하시는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신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켜려면 방송국에서 보내는 주파수를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신호를 받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코드에 맞춰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얼 원하시는지, 무얼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맞출 때 비로소 하나님의 신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는 요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자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하십니다.

요셉의 현몽은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만약 요셉이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았다면 그에게 현몽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과 같은 현몽이나, 계시를 원한다면 주님의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일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 속에서 우리는 계시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언가 하려는 일 앞에 장애물이 생겼습니까?
그 일이 주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이 해결할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모시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곁에 계시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편이십니다. 하나님은 밝히 계시하시고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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