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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도 기회가 있는 것일까요?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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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종천 목사 

우리 인간들에게 늘 다가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내게 과연 기회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어느 순간에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기도 하고, 인간관계는 다 깨어져 비난을 받고 심령은 비틀어져 다 메말라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정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은 시대와는 상관없는 쓸모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져 죄송스러울 만큼 마음이 침체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이제 나는 끝이야.’ 라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소망 없는 사람이 선택하게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삶에 대한 포기, 혹은 되는 대로 사는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언제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게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호흡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기회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아버지와 그에게 있는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를 기다리는 하나님, 그리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세 가지 면모를 우리 인생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인간들의 하나님을 멀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일면을 보여주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생각만 해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슴 벅차오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면모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잠시 설명 드리면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모범생, 작은 아들은 막부가내로 자기의 계획과 그리고 자기의 모든 욕심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큰아들은 모범생답게 아버지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으나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상심하게 하는 이와 같은 말썽꾼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얼토당토않게 아버지에게 와서 재산을 요구합니다. 아버지가 세상 떠나면 재산의 절반은 내 것이니 미리 나에게 주어서 내가 그 재산 가지고 나가서 쓰게 하소서. 아버지가 그 얘기를 쉽게 들을 리 없으나 그 아들의 이와 같은 정말 졸라대는 것을 견디다 못하여서 그 횡포에 견디지 못한 아버지가 재산을 반분하여 아들에게 줍니다. 돈 가지고 나갑니다. 외국으로 갑니다. 다 써버리게 됩니다. 마침내 그 주변의 사람들도 다 떨어져 나가게 되고 돈을 쓸 줄은 알았지만 모을 줄은 몰랐기에 결국 그는 아무 소망이 없고 돼지를 치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돼지 치는 돼지치기가 되어서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를 같이 먹고 지내는데 그것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어 배가 고파 견딜 수 가 없습니다.

그의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이 납니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품꾼이 많이 있는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은 못되더라도 그 품꾼 중에 하나로 혹시 내가 아버지께 써 달라고 한다면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품꾼은 먹을 것이라도 마음껏 먹으니 지금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용기를 내서 돌아갑니다. 그때 그 아들의 모든 행보를 미리 파악한 그 아버지 언젠가는 네가 돈 다 탕진하고 나면 고생하다 내 생각나서 돌아올 것이라고 마음의 모든 행로를 읽었던 아버지는 매일매일 동구 밖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여 기쁨으로 그를 환대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와서 아들의 지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은 장면을 통해서 끊임없이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돌아온 아들을 용서해주는 아버지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시는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먼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작은 아들이 어찌 생각하면 그날 돌아왔을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어쩌다 그날 나갔다가 마침 만난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나간 이후에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여 매일매일 동네 밖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 아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며 그 아들의 행동을 미리 예측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재산의 반분을 요구 할 때 이미 그것을 탕진하고 고통 속에 괴로워 하다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는 것을 그 아버지는 훤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말리지 않았습니까?’ 할 말 없는 인간들은 잘못 되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끝까지 말렸더라면 내가 죄짓지 않고 어려움에 빠지지 않고 고통 속에 처하지 않았을 텐데 왜 나를 날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아들의 말은 자기 핑계에 불과 합니다. 말린들 들었겠습니까? 아버지가 말리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고집쟁이인 그에게 아버지는 견디다 못해서 재산을 반분해 나눠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말입니다.
재산 탕진하고 고통에 빠져 돌아올 것을 알고 계신 이와 같은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곁을 떠나 마음대로 죄를 짓겠다는 인간들에 대하여 때로는 이와 같이 놓아두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마침내 그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인간의 자아발견이라고 얘기합니다. 부끄러움을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을 하나님의 발견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 앞에 달려오는 것을 회개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달려온 자를 품에 안으시고 구원하는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고 합니다. 인간의 자아 발견, 하나님 발견, 회개, 구원의 역사 이와 같은 것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원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둑을 두거나 어떤 게임을 해도 그 게임을 강한 상수가 되는 사람은 처음 초보자들이 하는 일을 읽을 수 가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마음의 행보를 하나님이 읽지 못하시겠습니까? 이 아버지는 동네 밖에 나와서 매일매일 아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에 우리들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욱이 아버지가 기다려 준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음 아파하고 괘씸해함 보다 측은함과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능가하는 사랑의 감정을 소유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아들은 사실 엉뚱한 것을 요구합니다. 유산을 나눠달라니요. 유산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나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번연히 살아 있는데 그걸 나눠 달라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야말로 막된 요구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자기 몫에 열심히 챙겨 계산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더 인색한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할 때도 자기 몫만 계산하니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요. 하나님 앞에 수고하고 헌신 한 것이 생각나 자기 몫을 챙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그 몫의 열배를 더해도 모자랄 텐데 그 생각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적은 수고의 분량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생각은 하지 않고 자그만 선행만 생각하여 자신을 지나치게 의롭게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이와 같은 마음과는 달리 하나님은 그것을 괘씸히 여겨야할 입장에 계시면서도 괘씸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측은함과 사랑의 눈길을 가지고 우리를 눈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벌써 35년 이상 시간이 흘렀는데도 전혀 잊어버리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림처럼 여겨지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오면 청소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교실도 청소하고 그러는 거 같은데 저희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생들이 직접 청소도 하고 책상도 닦고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분단별로 나눠서 이렇게 나눠서 청소를 하는데요. 책상을 밀고 쓸고 닦고 책상 배열하고 책상 위를 걸레로 닦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주 아주 장난꾸러기가 한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청소를 하고 있는데 그 책상 위를 신발을 신고 절겅절겅 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책상위에 발자국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거기를 절겅절겅 다니다가 그냥 책상이 휘까닥 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그 학생이 넘어졌어요. 넘어졌는데 팔 쪽으로 넘어졌는지 팔이 부러졌어요. 그래서 급히 교무실에 가서 전화를 해서 그 엄마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와서 그 모습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갑자기 눈이 이렇게 올라 가더니요 뭐라고 얘기 하냐면 잘 부러졌다 잘 부러졌어.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 장면이 너무너무 충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니 그래도 엄마가 와서 어떻게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아이는 워낙 장난꾸러기라서 그런 일이 아마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잘 부러졌는지.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1학년 4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담임선생님 이름이 박준영 선생님이고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 반에 그 아이 이름은 제가 차마 말씀은 못 드리겠고요. 아 그 어머니가 아주 그냥 그렇게 얘기하는 게 너무너무 마음에 아주 충격으로 와 닿았던 것 같아요 그 어머니의 옷 색깔이며 얼굴 표정이며 아직까지도 선연합니다.
아마 생각하기에는 그 어머니가 그 아들이 팔 부러진 게 잘 부러졌다고 그래서 그런 건 아니고 너무너무 속상하니까 아마 반어법적으로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늘 사고치고 늘 장난치다가 뭐 이렇게 어머니 마음 상하게 하니까 아마 괘씸해서 그렇게 얘기한줄 알았지만 그러나 어머니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 손 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지는 않습니다.

눈물 흘리며 괘씸함보다는 측은함과 사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뛰어가 그 아들 품어주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분명히 징계하실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비교가 되는 대상에게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하나님 앞에 우리는 부끄러울 수 없습니다.
더욱이 기다림의 지루함과 아픔과 인내와 사랑으로 지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격 할 따름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서 이삭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그 25년이라는 시간은 그에게 너무 지루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을 합니다. 그는 이삭을 얻기 전에 이스마엘을 얻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의심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을 봅니다.
우리 인생은 지루한 기다림 가운데 굴곡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다려 마침내 우리가 그 하나님의 품에 올 때까지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가운데 기다려 주시는 것을 봅니다.

포기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포기하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예요. 내가 마음하나 접고 말지. 내가 눈 감고 가면 그 뒤에 있는 일들 나는 아무런 생각 할 수 없을 거야. 어느 순간 내 자신에 대하여 포기하고 모든 것 잊어버리자 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간편한 우리의 어려움에서 부터의 고통에서부터의 탈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고 오늘도 끝까지 동네 밖 어귀에 나와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처럼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 우리를 어찌 우리 자신이 포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화가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시니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갈 수 있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품어 주실 것이고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다릴 수 있습니까? 마음에 진정한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기다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을 수일 같이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랑이한 오랜 기다림을 가능케 하는 역사임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일 많이 실망하는 게 뭡니까? 상황에 대해서 실망해요? 사람에 대해서 실망해요? 아니면 여건 내 주변의 모든 구조에 대하서 실망합니까?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이 가장 많이 실망 하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인거 같아요.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나? 내가 정말 이정도 수준 밖에 안 되나? 내가 애쓴 것이 고작 이것 밖에 안 되나.’ 라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와 같이 버젓이 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포기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기다리며 우리를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고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낙심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주를 떠나서 영적인 낙심에 지경이 이른 사람이 있습니다. 공들였던 삶의 일들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할 일이 없어서 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삶의 시간을 보내기가 지루하고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내가 그 긴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고 생각 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오면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 질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이가 많은 늙은 어부였습니다. 마태는 당시에 비난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 후 에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소심한 사람이지만 그의 소심함은 오히려 사랑의 사도로 평가받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날카로운 사람이었고 오히려 자신의 그릇된 신념 때문에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는 신약 최대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처럼 주님을 멀리 떠난 분들만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삶의 짐을 진 모든 사람들 역시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주님에게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박두진이라는 시인의 ‘도봉’ 이라는 시 여러분 아마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삶은 한갓 외롭고 쓸쓸해져 갈 뿐’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외롭고 쓸쓸해져 갈 뿐인 이런 시기가 있습니다. 남은 것은 고독이고 느끼는 것은 쓸쓸함이고 내 앞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외로움뿐인 이러한 시기가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내 잘못이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건 삶의 구조적인 피해이건 예상치 못했던 재앙이건 마치 세계에 재앙의 그물이 덮치듯 하루아침에 삶이 곤두박질치고 예상치 못했던 어둠의 계곡 속에 떨어질 때가 있다 이 말입니다. 긴 기약 정말 약속 없이 절규해야 될 슬픔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고 부르짖다 지칠 때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여 주님 앞에 돌아온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집을 나간 탕자가 고통가운데 절규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생각하여 그의 집으로 돌아 올 때 동네 어귀에서 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고통가운데 절규하다 마침내 절규에 지쳐 엎드려져 있을 때 우리 주님을 생각하여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될 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맞이하여 주신다 이 말입니다.

두 번째는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다릴 뿐 아니라 용서하고 받아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처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갈 염치가 안됐습니다. 아버지에게 강권하여 재물을 빼앗아 가져 왔습니다. 탕진하고, 금의환향하기는 커녕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죽기보다 더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심령은 어떻습니까? 떳떳하지 못해도 누추함을 느끼더라도 우리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회복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위해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생활을 정돈하고요. 죄 지은 것 씻어버리고요. 어려운 문제 해결하고요.’ 그래도 어느 정도 얼굴을 들 수 있을 때 주님 앞에 돌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봉사 할 때도 어려운 문제 해결하고 봉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해결하고 돌아오려면 이 세상에 우리 이름 석 자는 이미 없어진 이후입니다. 우리가 모든 문제 정리하고 돌아오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호흡하는 것이 이미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문제가 평정 된 다음에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문제의 해결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기 이전에도 쓰임 받았지만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던 것을 봅니다.
우리 인생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로운들 우리가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의를 가졌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슨 주장할 것이 있으며 우리가 정돈해 봐야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우리의 의는 그야말로 더러운 옷과 같은 것인데 날마다 인생의 어려움 속에 뒹구는 우리들 깨끗해 보아야 한번 나갔다 돌아오면 더러워지는 것이 우리 아니겠습니까? 아침에 세수하지요 잠깐 나갔다 들어오면 또다시 세수해야 됩니다. 여러분 방 깨끗이 청소하고요 문 꼭 닫아놓고 며칠 지나서 방바닥 쓸어보면 또 시꺼멓게 먼지가 묻혀지게 되는 것을 우리 보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악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죄악의 요소들 부유하고 있는 이와 같은 모든 죄악의 요소들이 마침내 우리를 오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정돈해 봐야 우리는 죄악뿐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덮어주시고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사랑이 어떤 것인가 생각할 때 꼭 이 도배하는 문제를 생각해요. 여러분 도배아시죠? 집이 오래됐거나 혹은 애들이 낙서를 했거나 할 때 그 벽지를 뜯어내던지 아니면 있는 벽지에 위에 다시 붙이던지 하여간 말끔하게 깨끗하게 도배하지요? 아니 뭔가 좀 이해하는 것 같아야 얘기를 진행해 나가지요. 여러분 도배하는데 여러분 어떤 집에 이사 가서 깨끗이 도배하고 ‘야! 새집 같아.’ 집이 좀 오래됐지만 도배하니까 새집 같아 하고 여러분 생각하시죠? 그런데 이런 분들 계세요? 저안에는 어떤 벽지를 발랐을까? 얼마나 더러웠을까? 하고 그 도배한 것을 뜯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꼬치꼬치 캐보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런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옆에 사람 볼 때 지금 어떻게 봅니까? 저사람 마음에 얼마나 음험한 죄가 도사리고 있을까? 그리고 옆에 사람 쳐다봅니까? 지금 내 옆에서 이렇게 거룩한 척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저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죄악과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자리 잡고 있을까?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요. 우리는 서로를 볼 때 우리는 세상에서 죄악된 세상에서 살고 있고 어쩔 수 없이 남을 속이고 남에게 못된 일 하고 또 남에게 정말 해코지 하고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자신을 씻어내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돌이키고 새로운 은혜를 받기 위하여 내가 다시 돌이키기 위하여 그래도 마음 정돈하고 한번 예배드리자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와 같은 성도를 보며 우리는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가 사랑하지 않은가 하는 것을 판별해 볼려면요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상대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이 안보여요 내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보는데 내가 정말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여요. 허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오히려 허물이라고 생각되면 그것 때문에 내 가슴이 아프고 다른 사람이 그 허물을 보고 혹시라도 공격하고 혹시라도 해할까봐 그 허물을 내가 덮어주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에요. 자 옆에 사람 봅니다. 허물이 보여요 안보여요. 자 한번 인사해 봅시다. 당신은 모든 게 다 좋네요. 마음이 찔려서 차마 그렇게 못하나요. 여러분 사랑하고 있으면요 아무런 허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눈이 가리어진다. 그러잖아요. 허물이 안 보여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하면 허물이 그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옆에 사람 봅시다. 허물이 보여요 허물이 안보여요. 자. 저는 당신이 왜 이렇게 완벽한지 모르겠어요.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저는 당신이 완벽하게 보여요. 네. 잘못 말하면 입 삐뚤어집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면요 허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의할 일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감정의 상태가 아니에요. 사랑은 흘러가는 감정의 상태가 아닙니다. 사랑에는 보다 더 의도적인 의지가 더 많이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정말 십자가를 지기를 원치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은 흘러가는 마음의 상태 속에서 져야겠다고 진 것이 아니라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마음의 감정으로는 원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의도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의지로 사랑을 이룬 겁니다.

우리는 상대를 볼 때도 내 마음에 허물이 보일 때 그 허물을 가리울 수 있는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그 사랑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허물이 보이는 건 미워하는 겁니다. 사랑하면 허물이 절대 보이지 않아요. 어떻게 저것이 남에게 드러나기 전에 내가 해결해 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에겐 탕자의 허물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이 탕자를 욕하기 전에 먼저 품에 안고 옷을 갈아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갈아 신기고 잔칫상을 배설하며 “내가 잃었던 아들 찾았도다.” 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이 탕자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말하기 전에 오히려 탕자를 감싸 안고 그를 높이 세워줬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고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그런 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매우 우리 성도들은 인격적인 분들이기 때문에. 여러분 아이들 혼내주신 적 있죠. 아니 인격적이래도 혼내주는 겁니다. 혼내주신 적 있죠. 근데 막 그냥 화가 끝까지 나서 이래본 적 있어요. 아마 그런 분들 없으리라고 제가 믿지만 그냥 가정해 봅시다. 야! 너 나가! 다시는 들어오지 말어. 그런데 애가 정말로 알았어요 하고 집 문을 탁 닫고 나가면 여러분 가슴에 속 시원하겠어요. 아~ 시원하다. 여러분 그러실 것 같아요? 아니죠. 내가 실수했구나. 내가 아무리 화가 나도 해야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데 내가 실수했구나. 탁 닫고 나갈 때 여러분 무슨 마음이 들죠? 요새 애들 잘못되는데 쟤가 정말 저러다 나쁜 마음먹고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될 거에요. 그 아이가 부모에게 큰 은혜를 끼치는 방법이 있죠. 그날 밤 늦게 들어올수록 은혜를 더 받죠. 이 심오한 뜻을 얼른 알아차리겠습니까. 밤 10시쯤 들어오면 큰 은혜를 못 받아요. 이게 들어오기만 해봐 가만 놔두나. 그런데 10시가 지나서 11시, 12시가 되는데 안 들어와요. 빨리 들어오기만 해봐라. 1시가 지나도 안 들어와요. 2시가 되어서 들어오면 엎드려 절하고 싶죠. 이 심오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죠.

이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너무너무 기뻐한 거예요. 기다렸을 뿐 아니라 그를 용서해 주고 너무너무 기뻐해서 정말 그에게 있었던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라 이 말입니다. 시편기자는 얘기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리라’ 시편 27편 10절은 말씀합니다. 세상이 끊을 수 없는 것이 부모 자식 관계지만 부모와 자식이 피차 어쩔 수 없어서 버렸을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영접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화가 난 적 있겠죠. 그러나 눈 녹듯이 녹아질 것입니다. 분노가지고 우리를 징계하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나님. 잃은 양 찾을 때 기쁨이 더 커 나간 것에 대하여 분노를 일절 생각하지 않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그대로 감싸 안으시려는 우리 주님을 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 주님은 우리의 깨끗한 모습을 받으시려는 것보다 우리 모든 것을 있는 그 상태에서 받으셔서 깨끗하게 하셔서 소유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기다릴 뿐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도 주님께 갈 수 있어요. 따라서 합시다. 언제라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태라도 갈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갈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기회는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갈 때 주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신다 이 말입니다.

마지막 주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이전의 여건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회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탕자는 그 자신이 처했던 위치로 볼 때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소위 그의 주장대로 그의 몫을 다 써버렸으니 무엇하나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돈이 많을 땐 옆에 사람이 즐비했겠지만 허비하고 나니 모두가 떠나버렸습니다. 돈을 쓸 줄 알았지만 벌 줄 모르니 회생할 소망이 없습니다. 16절 보니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으나 그것조차도 먹지 못했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 비로소 도식적인 내용이지만 극한의 상황 속에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도 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출발점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창피해도 뻔뻔스럽게 느껴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오늘 탕자에게 유일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아버지의 자비에 의지해서 그의 품 안에 뛰어드는 겁니다. 오늘 18절과 19절을 보니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 가자. 품꾼 중의 하나라도 나를 써주시리라 하는 기대가 바로 탕자를 살렸던 것입니다.
용기는 내 힘과 내 여건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용과 사랑에 의존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만남으로 인하여 이전에 풍요로움을 회복하였습니다. 좋은 옷으로 풍성함,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회복시켜주심은 우리 현재의 위치를 일시에 바꾸어버리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때 어떠한 일이 있는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버지는 탕자를 분명히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로 받아들여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주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전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의 모든 지위 생활 배고픈 것 풍요를 간구하는 마음, 모든 것이 일거에 회복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의 방법과 순차와 힘과 하나님의 방법과 순차와 힘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잃어버렸던 것 회복하려면 그와 같은 방법을 또 다시 밟아야 돼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거에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계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놀라운 은혜를 느끼는데요. 정말 그 때마다 느껴요. 여러분 우리 지역에는 눈이 많이 안 왔지만 강원도 산간 지역에 보니깐 눈이 많이 왔더라고요. 여러분 눈이 많이 와서 2시간만 되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죠. 잘 모르세요? 눈 2시간만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얀색으로 변합니다. 저는 그 때마다 놀라움을 발견해요. 이 조그만 예배당 그 때 도색할 때보니깐 1주일 걸리더라고요. 요 조그만 예배당 도색하는데 1주일이 걸리더라고요. 근데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 흰색으로 도색하는데 단 2시간 눈 내리면 되더라고요. 또 햇빛 몇 시간 쬐이면 그 눈이 다 녹아져요. 갈색이 되고 봄기운이 돌면 초록색이 되고 또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한 단풍이 채색이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힘의 차이에요. 하나님의 힘과 인간의 힘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순차와 방법을 능가하는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는 거예요. 방법과 순차와 질서라는 것은 그것은 힘이 제한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능가할 힘이 있기 때문에 일거에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해결하실 수 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람의 능력은 비교되지 않습니다. 오늘 24절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탕자를 향하여 아버지는 말합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스바냐 3장 17절은 말씀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은 매우 좋아하시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가지고 삶의 힌트를 얻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기본적인 부담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하고 성도들을 섬겨야 하고 무엇인가 기쁨과 즐거움을 제공해야 하고 무엇인가 삶의 꿈과 소망을 제공해 드려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늘 은혜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새롭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어요.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무언가 반드시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저 내가 내 위치에 내 모습으로 든든히 있는 것만 해도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겠다. 건강히 내 위치에 있는 것만 해도 성도들에게 감사한 생각이 들 수 있겠다. 내 자신이 기뻐하는 모습 보면 성도들이 기뻐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더라고요. 뭐 전혀 아니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시는데요. 저는 여러분들 그래요. 우리 성도들이 좋아하면 저는 기뻐요. 성도들이 잘되면 저게 또 얼마나 교만해질까 뭐 이런 마음 들지 않아요. 저게 또 얼마나 교만해져서 또 하나님 모른다 그럴까 이런 마음 들지 않고 잘되면 그냥 잘되는 것 가지고 기쁘더라고요. 성도들이 좋아하면 좋아하고요 성도들이 기쁘면 기쁘고 참 좋아요. 제가 우리 성도들 위해서 기도할 때 공적으로 기도하는 거 여러분 많이 들으셨을 거에요.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눈물로 울며울며 봉사하지 않게 하시고 기쁨으로 웃으며 감사하고 감사하며 봉사하게 해주십시오. 늘 이렇게 기도해요. 저는 성도들이 눈물로 울며 울며 하나님 앞에 정말 가슴 아파하며 봉사하기를 원치 않아요.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겁고 감격스러워서 감사 때문에 봉사하지 어쩔 수 없어서 두려워서 봉사하기를 원치 않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슬픔을 주시기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는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큰 좋은 것을 해드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큰 헌신을 해드리는 것이 믿음이 아니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있어드리는 것이 믿음이에요.

하나님께 가면 내 부족을 해결해주시고 내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나를 받아주시고 나를 회복해주신다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효도라는 것이 우리가 크게 잘돼서 뭐 좋은 것을 부모님께 해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옆에 있어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심을 믿는 것 하나님이 나를 회복시켜주심을 믿고 기대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에게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보니 가장 중요한 일이 있어요.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요 이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은 바뀐 게 한 가지도 없어요. 바뀐 게 한 가지도 없어요. 그의 성품도 바뀐 게 없고요. 말투도 바뀐 게 없고 그의 모든 외모도 바뀐 게 없고 그의 모든 능력도 바뀐 게 없고 바뀐 게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순전한 사랑 때문에 그 아들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대우를 받게 됐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꼭 바꿔져야만 내가 꼭 능력이 있어야만 내가 꼭 모든 것을 구비해야만 하나님께서 내게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주신다면 우리는 매우 어려워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다 성자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여러분 다 거룩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부족함을 안고 우리의 연약함을 안고 우리의 누추함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자체가 믿음이요 그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겨주시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오늘 탕자가 그럴 듯한 모습으로 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반겨주고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준·것이 아니라 누추한 모습이요 초라한 모습이요 정말 배척받아야 될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왔다는 것 가지고 아버지는 대연을 베풀고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자랑을 했던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뭔가를 이루어 볼까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바꾸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임 나를 바꿀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포기할 기회는 없지만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가서 새로운 은혜와 능력을 힘입을 기회는 있는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다고 느낄 때 삶이 외롭다고 느낄 때 내 삶에 남을 것은 고독뿐이라고 느낄 때 내 삶은 쓸쓸함만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기회를 소멸치 말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가 우리를 기다리시고 용서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주님의 송도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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