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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 (렘 2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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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한용근 목사

  예레미야 선지자를 흔히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40여년 동안 회개를 부르짖으면서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완악했는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사람들이 얼마나 핍박하였는지 예레미야는 자유롭게 하나님의 성전에도 올라갈 수 없었고, 자유롭게 활동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선지자는 바룩이라는 사람에게 그 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하였고, 선지자를 대신하여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글을 낭독하여 듣게 했습니다. 이 소식이 왕에게 전해지자 여호야김 왕은 그 두루마기 성경을 가져와 여후디라는 서기관을 통해 읽도록 했습니다. 마침 때는 겨울이었기에 왕 앞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화로가 있었습니다. 여후디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그 말씀을 들은 여호야김은 서기관들이 쓰는 아주 날카로운 칼로 그 두루마리를 잘라냈습니다. 그 잘라낸 두루마리를 그는 화롯불에 던져 넣어 태워 버렸습니다(렘36:20-26).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 족각 한 조각씩 불에 던져서 사라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행동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옷을 찢고 마음을 찢으며 통회하고 자복하면서 회개해야할 히스기야 왕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칼로 잘게 잘라 불에 집어넣어 태워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교만하며 말씀을 떠나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예례미야가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왕과 백성과 나라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가 얼마나 고통과 두려움에서 말씀을 전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난당하고 있는 무슬렘 지역과 북한과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멀리 중국과 북학과 저 중동의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들 중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말씀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29:17-19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칼의 고통과 배고픔과 기근의 고통과 염병과 같은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며, 열방 중에 흩어져 학대 받는 고통과 저주거리와 놀림거리와 웃음거리와 모욕과 수치를 받는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던 시대가 예레미야 시대였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너희가 비록 고통을 받아 이방에 붙들려 가고, 흩어져 지낼 지라도 이 고통은 영원한 고통이 아니라 70년이 차면 다시 포로된 것에서 돌아와 회복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과 번성을 통해 잘 되기를 계획하시며 그것을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고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징계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12:7절에는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또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징계를 통해 연단된 사람은 반드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로마서 8:18절을 통해 말하기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영원한 징벌과 영원한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언제나 자녀들을 위해 좋은 것을 계획하고 계시고,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위한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피곤한 손을 이제 강하게 하기 원합니다.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여 바른 길로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타락으로 고난과 고통을 받았던 슬픔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신의 슬픔을 기록한 예레미야 애가서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2-33).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 인생을 지키시는 반석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채찍을 들어 징계하실 수는 있지만 영원히 징계와 채찍질은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히려 그분의 자비하심과 넓으신 사랑으로 주무시지도 않고 깨어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분의 자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회복하신다. 비록 지금 고난은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은 나를 회복하신다.”

  우리는 11절을 통해 이 사실을 더욱 확증할 수 있습니다.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하는 생각이라”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재앙이 아닌 평안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평안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고통이 오면 늘 종교개혁자 존 낙스를 기억합니다. 존 낙스가 활동하던 스코틀랜드는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메리 여왕의 압제 아래서 로마 가톨릭주의 자들의 핍박과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에 힘을 썼지만 그만 카톨릭주의자들에게 붙들려 프랑스의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예로서 수년 동안 배 밑바닥에서 프랑스인들의 채찍에 맞아가면서 노 젖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가장 저주하고 가장 배우기를 싫어했던 프랑어를 노예로서 채찍에 맞으면서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 중에 배워야 했습니다. 그가 노예의 생활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유창한 프랑스 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존 칼빈이 종교개혁을 통해 이룩한 스위스로 보내셨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칼빈의 제자가 되었고, 칼빈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시다 시피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모든 강의와 설교를 프랑스 어로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왜 나이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장래에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울은 즉시로 복음을 위해 선교의 일을 할 능력도 있었고, 재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즉시로 그를 복음의 사역자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무려 3년 6개월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의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후에 그가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알아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도들 중에 바울이라는 사람을 진정으로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3년 6개월 동안 기도를 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 받았지만 하나님은 아직도 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기도 후에 예루살렘에서 15일 동안 사도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외에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다소에서 그후 이름 없이 조용하게 무려 1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쓰신다고 했지만 그를 그 즉시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지 무려 14년이 지나서야 그는 비로소 안디옥의 교사가 되었고, 그후 1년 후에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가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면 안됩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해서도 안됩니다. 세월과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일 스코트 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가 노예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이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명으로 살면서 자신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40년 동안 복음을 전했지만 변하지 않는 유대 백성들을 보고,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했다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만일 99세가 된 아브라함이 자녀를 주신다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잠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수 있지만 영원한 고난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한 때와 기간이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너는 자유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네게 복을 주려고 지금 생각 중이다. 나는 너에게 장래에 평안을 줄 것이고 장래에 소망을 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장래에 나에게 평안을 주신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부르짖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과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우리는 부르짖음이라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할 때에 꼭 소리를 치고 미친 듯이 부르짖어야 하나님께서 들으시냐?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는 분이 아니냐? 소리 칠 것없이 조용히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이 아직 삶의 여유가 있고, 무엇인가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절벽 앞에 있어 보십시오. 소리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히스기야 왕이 불치병에 걸려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울며 통곡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고, 열왕기하 20장 5절에는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55편 17절에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18편 6절에는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33:2-3절에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으며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마음을 보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 마음도 보시고, 우리의 중심도 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르짖는 목소리도 들으시고 눈물도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히브리서 5:7절에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맹인 바디매오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여리고 성에 주님께서 오셨음을 듣고 소리를 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끊임없이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시끄럽다고 하고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그는 주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히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과 배를 타고 함께 갈릴리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은 갑자기 일어나 갈릴리 호수의 폭풍을 만나게 되자 주무시는 주님을 향해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잠자는 주님을 그들을 소리 질러 깨웠습니다. 베드로는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주여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가 주님은 나를 보고 계신다. 주님은 내 생각을 아신다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편 102:1-2절에는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풍랑이 잔잔해지고 불안과 괴로움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시편 22편 5절에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문제 만난 사람들은 부르짖어야 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소리 쳐야 합니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조용히 기도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죽게 되었다고 나를 돌아 봐 달라고 주님을 소리쳐 불러야 합니다. 내 인생의 닫혀 있는 문을 열러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병이 치료되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성령에 충만하게 되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인생의 위기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도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는 자들에게 살길이 열리고 인생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으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한 주간도 주님의 이름과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께 부르짖어 여러분들의 인생에 좋은 일들이 일어나며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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