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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기도(6) (창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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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용서의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내 이웃을 용서하고, 또 내 이웃에게 용서받게 되는 삶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인 줄 압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용서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의 내용은 우리 크리스천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용서의 사람이었던 요셉의 경우를 통해서 이러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용서란 무엇일까?

용서란 자기가 당한 아픔이나 원망, 한(恨) 같은 것들이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요셉이 당했던 아픔이란 어떤 아픔이었을까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요셉에 대해서 그저 형들을 통해서 노예로 팔린 사람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 좀 더 현실적으로 그 때의 상황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십시다. 창 37:23이하,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1)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간 요셉

아버지 야곱은 양떼를 치러 간 아들들에게 요셉을 보내어 “형들과 양떼들이 잘 있는지를 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요셉이 형들에게 간 것입니다. 아마 아버지 야곱이 형들에게 갖다 주라고 한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형들이 좋아할 모습을 기대하며 갔을 것입니다.

(2) 요셉을 죽이려고 한 형들

그런데 평소 요셉을 시기하던 형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죽이기로 꾀하였습니다. 자기가 꿈을 꿨다고 하면서 아니꼽게 놀던 요셉, 그리고 아버지께 고자질을 잘 하는 요셉을 형들은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요셉을 귀여워하고 사랑해서 자기들은 입어보지도 못한 채색 옷을 입히는 아버지에 대한 불평과 불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화풀이를 요셉에게 하고자 하여 이 요셉을 죽여 버리자는 억하심정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장남되는 르우벤이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에 던져 버리자고 제의하는 바람에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이 구덩이는 빗물을 받아 두거나 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입니다. 이는 깊고 크게 판 것으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는 그러한 구덩이입니다.

(3) 이런 상황에서 형들의 모습

25절 상반 절,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었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말씀입니다. “앉아서 밥 먹었다”는 것이 뭐 그다지 중요하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우리가 볼 수 없는 요셉의 한과 원통함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번 구덩이에 빠진 요셉과 앉아서 밥을 먹는 형들을 비교해 보십시다. 이 상황에서 요셉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요셉은 “살려 달라”, “꺼내 달라”고 형들에게 울며불며 애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형들은 어땠습니까? 태연히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소리치며 살려달라고 하는 동생의 아우성을 들으면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천연스레 밥을 먹는 형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형들을 향해 소리치는 요셉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밥은 누가 가져온 밥인가요? 요셉이 가져온 것 아닙니까? 여기에 요셉의 한과 원통함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요셉의 한과 원통함을 달리 표현하지 않고, 이렇게 아무런 일이 없는 듯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형들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들의 태연함은 여유가 아니라, 인간성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못된 죄의 현실인 것입니다.

(4) 노예로 팔린 요셉

결국 요셉은 그 당시 노예 값인 은 20에 팔려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 상인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고, 이들은 또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애굽의 노예 시장에서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던 것입니다. 이때가 요셉이 17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애굽의 총리가 되는 30세가 되기까지 약 13년 동안 요셉은 이 가슴에 맺힌 한을 품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노예 생활을 하면서, 강간 미수죄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가?” 하며 형들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이 원망을 풀리게 하는 것이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총리가 된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만나게 된 장면입니다. 흉년이 들어 양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보고 이 형들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형들에 대한 모든 원망과 한을 넘어서서 형들을 용서하게 됩니다.

2. 용서는 개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용서에는 필요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용서함에는 필요조건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요셉은 형들에게 두 번씩이나 말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절,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5절,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여기서 요셉은 형들에게 “나를 팔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형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부끄럽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실제사실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언급하지 않으면 형들에게 자기가 동생 요셉임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에게 있어서 ‘요셉을 팔아버린 사실’은 아버지 야곱에게도 숨긴 그들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요셉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비밀이 밝혀져야만 형들은 이 국무총리가 자기들의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용서의 개인성과 필요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죄란 사실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비밀스러운 것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나의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나의 죄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 같은 죄를 짓는데...”하는 것은 나의 죄의 사실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진정한 용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의 사실성, 비밀스런 모습으로 인한 부끄러움은 진정한 용서 즉 하나님의 용서가 있는 곳에서는 감춰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애굽의 모든 신하들을 다 물리친 후에 이 사실을 형들에게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형들을 가까이 오게 한 후에 이 사실을 말합니다.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이 끌고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사람들을 다 물러가게 한 후에 이 여인에게 사죄의 확신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의 비밀스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밝혀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기에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두려워해서 감히 회개하지 못함으로 진정한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녀 글라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죄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사치와 타락에 빠져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도원에 들어와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수도원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자기의 손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손목에 쇠고랑을 차고 지냈다고 합니다. 얼굴이 죄를 지었다고 목에 쇠 멍에를 만들어서 메고 다녔다고 합니다. 발목에도 쇠고리를 주렁주렁 달고 고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침대도 딱딱한 판자로 만들어 고단한 잠을 잡니다. 그러다 어느 날, 지나가는 사람과 이야기 하다가 그만 실수를 합니다. “당신은 위선자요”라는 말에 역정을 내며 상대방을 욕하고 저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내가 아직 멀었구나!”하고 다시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혀가 말썽이라 하여 송곳으로 혀를 두 번이나 찔러서 사흘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용서함에는 이러한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죄가 사실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조건인 것입니다.

3. 용서의 가능성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5절 하). 또 7절,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리고 8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은 자기가 총리가 됨으로 하나님께서 어릴 적에 허락하신 꿈을 이루어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노예로 남아 있었다면 형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결코 노예로 남아있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요셉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할 뿐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말라”고, 또 “한탄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지닌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상태에서는 용서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자유인만이 누릴 수 있는 겸손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지 사람됨의 크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만일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내가 사람됨의 그릇이 작아서라고 생각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더 성서적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용서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눅 7:47).

4. 용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기에 자기 민족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형들을 용서하지 않고는 아버지 야곱과 친동생 베냐민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 와서 살 수 있도록 함으로 그 당시 민족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가정의 형제간의 용서함이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용서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용서함으로 가장 유익을 얻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심리학자 칼 메닝거 박사는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경험한 바를 이렇게 술회합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많은 환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만 줄 수 있다면 그 중의 75%가 그 다음날로 퇴원하게 될 것이다.” 의사와 상담을 하고 치료를 열심히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근본 문제는 죄라는 것입니다. 죄를 사함 받았다는 확신을 자기는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만 있다면 환자의 대다수가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재간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어차피 모든 고민의 심연에는 죄가 있고 그 죄에 대한 가책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겁 많은 이 사람은 감옥살이 할 것이 두려워서 도망을 다니는데 무려 10년을 끌었답니다. 용케도 잡히지 않았는데 그만 공소시효를 이틀 앞두고 체포당했답니다.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아이고, 그 사람 재수 더럽게 없구만. 이틀만 더 지났으면 일없었을 것을..” 하고 말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쇠고랑을 차고 가면서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10년이란 세월이 그에게는 너무나 괴로웠던 것입니다. 체포되는 순간에 비로소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무엇으로 고민하십니까? 얼마나 깊이 회개해 보셨습니까? 절망도 해 보셨습니까? 사는 것이 괴로워서 죽고 싶고, 그 죽는 것 때문에 고민해 보셨습니까? 흔히  죄책감의 종말은 4D라는 과정을 통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의 상실(Depression), 절망(Despair), 좌절(Defeat), 그리고 파멸(Destruction)로 결론 맺는다고 합니다.               

용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얼마만큼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자 외아들을 보내실 만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외아들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용서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크리스천은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자와 용서하는 자로서 하나의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자녀들 사이에, 그리고 우리 사람들끼리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주셨다고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우리는 이 기도를 우리의 삶 속에서 직접 함으로써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꼭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의 내용을 용서의 사람, 요셉을 생각하며 명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용서가 필요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하지 못하는 저희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하옵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믿는 저희들이지만, 이 용서라는 현실을 피해가는 저희들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요셉과 같이 용서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용기 있는 자녀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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