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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 거성들의 고백 (시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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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02월11일 14:36 CCMI성경 : 개역한글 | 표준새번역 | NIV | KJV | 新改譯[japan] CCMI대역성경  기독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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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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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거성들의 고백
2004-11-12 21:24:30  조회 : 24  24.♡.252.12


(신앙 거성들의 고백)

"내가 하는 매일의 중 으뜸가는 일은 주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죠지 뮬러-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임재를 결단적이고 의도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이러한 인격적인 체험은 그의 생이 끝 날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깊어만 갔다." -찰스 피니-

"나의 신앙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접촉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날마다 그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한다." -빌리 그래함-

"참된 기독교는 하나의 동행, 즉 하나님과 더불어 걷는 초자연적인 동행이다. 그러나 실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빌 하이벨스-

"아! 성령님과 동업함의 중요함이여, 이 동업적 참예가 없이는 어떤 것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아키발드 브라운-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위대한 성령의 역사가 목회현장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조용기-

"그분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실제적이며 여러분보다 더 실제적입니다." -캐트린 쿨만-

"바로 그거야! 비밀이 바로 저기에 있었어! 그분을 알아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을 알아야 돼." -베니 힌-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면전의식이다." -브라더 로렌스-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 이분>

저는 성령으로 거듭난 후 매일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고뇌 가운데 몸부림치며 몇 시간씩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욥 23:3)

어느 날 저는 산책을 하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항의하듯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이십니까? 도대체 제 기도를 듣기나 하십니까? 하나님은 벙어리이십니까? 제게 말씀 좀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소경이십니까? 절뚝발이십니까? 팔에 기부스를 했습니까? 왜 나는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막연하게 만나야만 합니까? 하나님, 제발 저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십시오. 저는 친구와 만나듯이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좀 보여 주십시오"

위를 보면서 저의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온 후 침묵 가운데 계속 길을 거닐고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은 저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성령님의 얼굴`이 제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성령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네가 원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너와 이렇게 인격적으로 만나서 교제하고 싶었단다. 나는 모든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사랑을 나누기를 원한단다. 그러나 수많은 나의 자녀들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회오리바람이나 신비한 환상이 나에게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용하지만 선명히 `성령님의 인격`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제 인격에 부딪쳐 왔던 것입니다. 성령님의 실제적인 임재하심이 제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순간 저는 성령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눈, 코, 입, 귀, 얼굴표정, 손, 발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저에게는 성령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성령님은 영이시지만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면 들으시며, 불꽃같은 눈동자로 저를 지켜보고 계시며, 향기를 맡으시며, 미소를 지으시며, 강한 손과 능한 팔을 가지고 계신 너무나도 실제적인 분이셨습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신 인격자이신 성령님을 대하고 보니 성경에 나오는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 이분`이시라는 것을 새삼 알게되면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구약에 나오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스스로 계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창세기부터 성경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신이 바로 저와 함께 계신 이분이셨습니다.
날이 서늘할 때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니셨던 하나님, 에녹과 300년을 동행하시고 노아와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아브라함이 친구처럼 사귀었던 하나님, 요셉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모세와 함께 출애굽의 여정 가운데 홍해를 가르시고 온갖 기적을 베푸신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저와 함께 계신 이분과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계셨고 바울 곁에 서서 바울과 교제를 나누신 분이 바로 지금 저와 함께 계신 이분이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곧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저는 알게 되었고, 이분 성령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눈이 활짝 열려 버렸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놀라운 깨달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날로 풍성해 졌으며, 저의 믿음은 제트기를 타고 공중을 날 듯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분은 제 눈앞에 너무나 실제적으로 충만히 임재해 계셨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곧 저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할지라도 내가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시 3:5~7)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구하는 자였습니다. 다윗의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옵소서."(시 27:7~9)

제가 공원을 산책하며 간절히 구한 것도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제 눈앞에 드러났고 그것은 곧 `인격이신 성령님의 얼굴`이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성령님의 얼굴을 보는 것 보다 시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기자의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주의 얼굴로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시 119:135)
만약 당신이 아직도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하나님, 저도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성령님의 얼굴을 보며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사귀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시오. 제가 지금 간절히 주의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제게서 숨기지 마옵시고 주의 얼굴 빛을 저에게 비춰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윗은 성령님께 항상 그의 눈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눈을 어디로 돌려도 자기 앞에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가득했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7~18)

스웨덴의 유명한 식물학자이며 웁살라 대학의 교수였던 린네(Linnaeus, Carolus, 1707~1778)는 학생들과 함께 들에 나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내 곁을 지나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머리를 숙였다."(1)
성부 하나님의 얼굴은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천국에 가면 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오직 성령 하나님만을 대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물리적인 현상이나 표면적인 형태가 아니라 영의 눈을 떠서 믿음 안에서 인격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성령님을 대면한다`는 말이 이해되십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입니다. 당신은 신앙생활에서 놓쳐버리기 쉬우면서도 매우 중요한 이 사실을 꼭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고자 합니다.
다윗은 항상 자기 앞에 계신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행 2:25)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와 함께 계신 나의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함께 걸으며 이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곧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계속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기초이자 핵심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윗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시 84:3)라고 말한 것처럼 막연한 하나님이나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 나와 함께 계신 나의 하나님 곧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시 119:151) 나와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계신 나의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며 생활하는 것, 성령님을 보며 이분과 함께 살아있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 삶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 of Hippo, 354~430)이 30년 방황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사람이 되기를 결심케 되던 날, 그 밤의 밤새껏 기도한 내용의 전부가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말 한마디였습니다.
정말 당신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며 지금 당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성령님을 대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님을 대면하게 되면 당신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무력하고 아무것도 아닌지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을 절대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욥은 엄청난 고통가운데 풀리지 않던 모든 문제를 종결짓게 되는 그의 신앙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성령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곧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뵙게 될 때에 진정으로 일생을 바쳐서 올바르게 살고자하는 `헌신`의 갈망이 솟구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바쳐서 섬겨도 전혀 아깝지 않은 `최상의 존재`이십니다.
존 화이트는 "헌신이란 가장 가치있는 것을 위해 나머지 것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적극적인 태도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얼굴을 보게될 때 가장 존귀하신 이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 진정으로 헌신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행복이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행 2:25)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거나 환경을 주목하는 순간 낙심과 좌절 속에 용기를 상실하기 쉽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단지 당신의 이성으로 인식만 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당신 앞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보다 하나님께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적군에 에워싸이고 힘있는 장수들이 압살롬과 손을 잡고 다윗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1, 2)

하나님의 손 위에 얹혀서 날마다 이분과 얼굴을 가까이 대하며 사는 생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땅에서 누려야 할 영생인 것입니다. 다윗은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고 고백했습니다.(시 63:8)
우리는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진행되고 소원이 척척 성취될 때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생토록 눈물의 빵을 먹으며 쌓아온 성공의 거대한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도 과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비참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우리 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가능해집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있을 때나 왕으로 있을 때나 변함없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자기 앞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만 바라보면서 즐거워 할 수 있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시 63:11)
당신은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든 어디에 있든지, 어떤 어려운 곤경에 처했든지 당신과 함께 계시는 성령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성령님과 대면한 모세


모세는 호렙산 가시떨기의 불꽃 가운데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이80살에 하나님의 꿈을 품고 40년 동안 닦은 자기 삶의 터전을 정리하고 인생을 재출발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새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모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굳은 의지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그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순간부터 저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과의 교제 가운데 매우 값진 인생으로 새롭게 만들어져 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구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그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자신의 모든 선한 형상을 모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한 반석 위에 모세를 서게 하시고 그 반석 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으나 얼굴은 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 앞으로 지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은 그때 한번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 불기둥 가운데 임재하셨고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어느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했습니까? 민수기12장8절에는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알던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직접 하나님의 본체(本體)를 본 것은 단 한번뿐이었으며 그것도 등을 보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외에 40년 세월동안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으며 그와 얼굴을 맞대고 명백히 대화를 나누었겠습니까? 그것은 구름기둥, 불기둥 가운데 임재하신 여호와의 신이신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므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 불기둥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하고 실제적인 성령님의 임재하심은 여전히 생생하게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모세는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 불기둥과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현현(顯現)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가운데 임재하셔서 말씀하시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성령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 있었으며 거기에 임재해 계신 그분과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자(성령님)를 보는 것 같이 하여"(히 11:27)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으며 믿음으로 피뿌리는 예식을 통해서 유월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믿음의 눈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성령님의 얼굴을 보면서 친교를 나누었고, 성령님의 적극적인 인도를 받으며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와 대면`하여 알던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님과 대면`하여 사귀어야 합니다.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항상 보는 것처럼 하여 그분과 대화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은 우리도 생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 24:6)
성령님을 대면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를 뵈옵고자"(요 12:21) 모래알 같은 군중들이 모여든 것처럼,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내 앞에 서 계신 영으로 오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므로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영으로 당신에게 임재해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에서 눈을 돌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완전히 생각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주는 영이시니......"(고후 5:16, 3:17)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다시금 그 의미를 찾고 가장 긴급히 회복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예배란 무엇입니까?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이 `생활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로마서 12장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진정한 예배에 대한 연구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4장20~24절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인데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장소에서 예배드린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어떤 근본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 조상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피흘림의 제사를 지낸 어떤 산이나 아니면 아주 거룩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예배의 열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어떤 때`입니다! 도대체 어떤 때입니까? "곧 이 때라." `이 때`란 바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때`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곧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요, 하나님을 만나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충격적인 선포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으시느니라."
예배당에서 순서를 따라 예배드리고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며 훌륭한 설교를 듣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배하러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주위만 두리번거리며 사람들만 만나고 온다면 그것은 예배에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비록 모든 것이 부족하고 서툴어도 당신이 예배 중에 하나님을 뵈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음악과 설교는 그 자체가 예배의 목적이 아니라 예배를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나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인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예배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인가 바치는데 만족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 얻으려고 교회에 갑니다. 진정 당신은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얻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을 바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누려야 합니다. 즉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때도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설교자는 하나님의 면전(面前)에서 순수한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저는 예배시간에 단상에 올라서면 설교하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성도들을 보는 것보다 성도들과 저 사이 곧 `내 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의 얼굴을 보고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이것저것 말씀드리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저를 감동시켜 주시고 지금 기름부어 주세요."

또한 다른 분이 설교할 때에도 저는 설교자만을 보지 않습니다. 설교자와 저 사이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예배장소의 영적 분위기를 살피며 이분과 은밀히 교통합니다. 저는 예배순서가 끝난 후에도 성령님과 함께 교회당을 빠져 나옵니다.

"성령님, 함께 나가시지요!"

그리고 일상생활로 돌아와서도 똑같이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활하거나 예배를 드리며 살아갑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행 2:25)

최근에 저는 김인중 목사님이 섬기는 안산동산교회에 저녁예배를 저의 사랑하는 친구이신 성령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250만원을 투자해서 새로운 주의 사업을 시작했는 데 그 일이 빨리 추진이 되지 않아서 뼈아픈 고통을 감내(堪耐)하고 있었습니다.
근근히 푼돈이나마 굴리던 우리 가정의 생활비는 드디어 완전히 바닥을 보인 지 벌써 10일도 넘었고 주일에 헌금은 물론 귀여운 아기의 백원짜리 사탕을 사기 위해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야 하는 처량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냉장고는 서서히 뼈대를 드러냈고 세금 고지서와 할부금 청구서는 우리의 어깨를 짖눌렀습니다. 때로는 쌀도 없어 하루종일 떡국을 끓여 먹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금식을 하고 철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제 인생의 크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저를 도우셨던 좋으신 하나님의 손길은 온데 간데 없고 그분은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우는 법과 밤을 지새는 법과 새벽을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길고 긴 광야의 밤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감성이 풍부한 사랑하는 아내는 불평을 털어놓았고 저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위로의 말로 고통 가운데 감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나는 가난이 싫어요. 이런 거지같은 생활은 지긋지긋해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시는지 답답하기만 해요."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조금씩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셨고 우리는 서서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된 것은 동산교회의 예배 중이었습니다.
"성령님 함께 가시지요." "함께 올라 가실까요." "성령님, 예배 가운데 우리에게 역사해 주세요."라고 말씀드리면서 성령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2층 맨 뒷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예배당 안에 제 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곳에 성령님이 임재해 계세요! 당신 앞에 계신 성령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참석한 우리는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 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께 마음을 모으고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감격의 찬양을 드리는 중에 성령님의 임재하심은 더욱 실제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내게 나타나셨습니다! 즉시 제 영혼이 벌떡 일어나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의 영광 나타나셨네
권능으로 임하셨네
죽음에서 날 살리신 주 성령
놀라우신 주 하나님...

우리는 성령님의 위로의 손길로 만지심에 감동스러운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발견할 수 있었으며 저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희색이 만연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 분의 사업을 세우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기를 원하시며, 또한 우리 속에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서시기를 원하신다!"

사랑스런 저의 아내는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불평과 원망을 쓰레기통에 미련없이 버리고 무조건 감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모든 것을 이겨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은 아내는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예배는 지친 영혼을 살리며 사람을 변화시켜 놓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어떤 사람들은 올바른 중심동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외적으로 갖춰지고 값진 예배당이나 멋진 설교자를 찾을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심이 물결치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임재 속에 이분과 교통하므로 더 깊고 풍성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정해진 예배시간에 충실할 뿐 아니라 24시간 전부다 살아있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언제나 성령님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의 얼굴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행 2:15) 그는 주의 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얼굴을 뵙게 되면 당신은 이분에게 매료됩니다. 이분과 교제를 나눌수록 깊은 사랑의 샘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성령님은 가장 아름다우신 최상의 존재이십니다. 드디어 당신은 성령님의 손에 키스를 하며 애정을 나누고 이분 앞에 엎드려 절하게 되고 기쁨으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므로 영혼이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배시간에 사람에게 집중하지 마십시오. 주위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다른 것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을 교회 안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예배순서가 흐르고 있는 중에 수시로 예배당 안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님을 작은 목소리로 부르십시오.

"예수님, 사랑하는 예수님!"

한 번이나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부르십시오. 찬양할 때나 설교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속삭이십시오. 그리고 계속 집중해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존귀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이십니다. 많은 성도들의 영적인 빈곤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소홀히 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계신 예수님에게 입맞추고 마음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다른 것`에 키스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행사나 종교의식 또는 유명한 주의 종에게 입맞추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비웃으시며 분노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오직 예수님께 입 맞추어야 합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시 2:12)

당신은 하늘보좌에 계신 예수님께 피상적으로 입맞추려고 꿈꾸기 보다는 오히려 지금 `내 앞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 입맞추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당신과 가장 가까이 계신 성령님의 입에 숨이 막힐 정도로 입맞춤하므로 황홀한 예배가 되도록 하십시오. 당신은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감정과 아버지의 품에 푹 싸인 느낌을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당신이 성령님과 은밀한 인격적인 교제로 인한 사랑가운데 뿌리를 내리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충만하신 영광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엡 3:17~19)

눈을 뜨고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보라



많은 그리스인들이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립니다. 눈을 감으면 잡생각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보입니까? 아니면 천국이 보입니까?
우리는 보통 대표기도와 개인기도 시간에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눈을 뜨고 생활합니다. 눈을 뜨고 생활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세상과 나만 의식을 하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가 전부인양 분주하게 뛰어 다닙니다. 그리고는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 때에서야 비로소 실패로 얼룩진 하루를 돌아보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눈을 뜨고 생활할 때 만약 성령님과 함께 살면서 성령님의 얼굴을 보며 인격적인 교제 속에 성령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당신은 잠자리에 들 때 승리의 하루를 찬양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삶을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천국에서나 기대하십시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습관적이고 고질적인 죄에서 해방을 누리게 되고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세상의 자랑에 매여 죄의 종노릇하는 행동을 다스리는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실제적으로 나누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외로워하거나 절망하거나 슬퍼하거나 무기력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그의 강한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공중기도시간이나 개인적인 정시기도시에는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무시기도는 눈을 뜨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 기도할 때는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간구와 소원을 아뢰야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눈을 뜨고 생활할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내 눈앞에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행 2:25)

저는 정시기도시간에도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시간을 기도하면서 계속 눈을 감고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더욱 생생하게 알게 되는 때는 눈을 감았을 때보다는 오히려 눈을 뜨고 골방에서 내 눈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눈을 뜨고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요 17:1)

저는 군에서 혼자서 점심시간에 행정반에 있을 때 이렇게 눈을 뜨고 한시간 이상 기도하며 보낸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은 금방 제 눈앞에 드러났으며 이분의 얼굴을 봄으로 인해 물댄 동산과 같은 행복감에 겨워 한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저는 성령님과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제가 눈을 감고 있으면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가끔씩 느낍니다. 그러나 제가 눈을 뜨고 기도하면 성령님의 실제적인 임재하심이 제 눈앞에 드러나고 크게 감격하면서 기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당신도 교회에서나 집에서 혼자서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앞이나 약간 위를 바라보면서 기도해보십시오. 그러면서 방언을 겸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내 앞에 계신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의식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천정 위를 보면서 하늘나라를 상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골방이나 예배당에 임재해 계신 바로 내 앞에 계신 성령님을 의식하며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때 굉장히 강한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종종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갑자기 일어서서 두 손을 들고 외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의 신이 이곳에 임재하셨도다!
존귀하신 성령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는 계속 눈을 뜨고 방언으로 기도하며 이리저리 걸어다니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며 성령님과 교통을 합니다.

"놀라우신 성령님!" 성령님께서 이곳에 저와 함께 계시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영원토록 성령님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과감히 이렇게 눈을 뜨고 기도해 보십시오. 지금 당신은 이 책을 보느라 눈을 뜨고 있겠지요. 그러면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불러보십시오.

"성령님, 사랑하는 성령님!"

저는 거듭난 후 캄캄한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불을 다 켜고 밝은 데서 기도합니다. 눈을 감거나 불을 다 끄면 무엇이 보입니까? 오히려 두려움만 밀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분위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밝은 것이 더 좋습니다. 설마 불도 켜고 눈도 뜨고 기도하는 것이 너무 큰 개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정시기도를 끝내지 않습니다. 이미 기도 중간 중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오니 주시옵소서!"라고 수 없이 반복해서 간구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이름은 기도를 마치는 종지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보좌에 나아갈 때 가장 먼저 앞장 세우고 내밀어야 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또는 중간에 수시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기도하오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라고 전제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끝나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기억해 두었다가 당신도 한번 해 보십시오.

"성령님, 저의 기도를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 이제 일어나시지요. 저와 함께 나가실까요?"

그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도 저는 거의 눈을 감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신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렇게 눈을 뜨고 생활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만 가지의 사물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살면 안됩니다. 저는 사물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통해 은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다윗은 이 놀랍고 비밀스러운 교제를 누렸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행 2:25)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단순한 도움의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속으로 `하나님 아버지,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 사고가 나지 않게 해주세요.` 등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개 여기에서 특별한 진전이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진정한 친구요, 애인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에 있어 담대한 진보를 가져와야 합니다. 일상적인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과 함께 인생길을 걸으시는 귀하신 성령님께로 당신의 시선을 돌려 인격으로 임재해 계시는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얼마가지 않아서 당신이 성령님의 얼굴 표정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계신 성령님이 슬퍼하시는지, 기뻐하시는지, 근심하고 계시는지를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신나지 않습니까?

성령님의 얼굴을 보는 비결


이와 같이 성령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친구이신 성령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사물에서 눈을 돌리면 언제나 성령님께서 저와 함께 계신 것을 의식하면서 믿음의 눈으로 제 앞에 임재해 계신 이분을 의식합니다.
당신도 이것을 시도해 보십시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님의 얼굴을 보는 비결`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해보십시오!
지금 당장 당신은 몇 미터 앞에 있는 사물을 바라보십시오. 그 다음은 고개를 숙이고 당신 앞에 있는 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의 사물과 당신의 손 사이에 있는 한 공간을 바라보십시오. 사물이 아닌 어떤 한 공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인격이신 성령님이 임재해 계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육신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로 그 공간에 영이신 성령님이 임재해 계신 것을 바라보십시오. 곧, 성령님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러 보십시오.

"성령님, 사랑하는 성령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계시지도 않은 성령님을 상상 속에 만들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다윗의 말처럼 "항상 내 앞에 계신 주"(행 2:15)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 눈앞에 항상 성령님의 인걱적인 얼굴이 실제로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얼굴은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형체(形體)가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격이신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의식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특별한 기도시간 뿐 아니라 24시간 항상 성령님의 얼굴을 대면하면서 그 앞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하나님의 얼굴이 항상 내 눈앞에 존재해 계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요한 칼뱅(John Calvin. 1509~1564)이 일생토록 붙든 `코람데오`(Coram Deo : 하나님 앞에서)의 삶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면전의식(面前意識), 곧 신전의식(神前意識)이 우리에게 진정한 담력과 성결을 가져다주게 되며 가장 정확한 자기발견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라고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축복의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기도였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이 모든 사람들이 구한 것이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성령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신이십니다. 그래서 이분은 영이시므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세상 모든 사물들보다도 더 실제적으로 당신에게 임재해 계십니다. 실제로 계시는 성령님을 의식하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신이신 성령님은 사물들보다 더욱 실제적인 분이시므로 당신이 믿음의 눈만 뜨게되면 그때부터 24시간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의식하면서 이분과 동고동락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살면서 물질만 본다면 당신은 성령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얼굴로 주의 종에게 비춰 주십시오!"(시 119:135)

모세의 경우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자(성령님)를 보는것 같이 하여"(히 11:27)

모세에게 있어 육신의 눈에 하나님이 보였습니까? 그에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시야를 가지고 하나님의 신을 대면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것처럼하여 믿음으로 이분과 교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나의 의인은 보이는 것이나 느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고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 11:1, 6)
모세는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지만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흘리신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성령님과 교제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Jesus Christ)이신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당신에게 임재해 계신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당신의 믿음의 중심이 되시는 것입니다. 당신 앞에 영으로 임재해 계신 예수님께로 눈을 고정시키십시오. 이분의 권능은 당신이 당하는 어떤 환난보다 더 크시며, 당신이 싸우는 어떤 원수보다도 더 위대하십니다.
저는 아내가 가끔씩 힘겨워 어깨가 처지고 얼굴이 무표정으로 굳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을 바라보세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눈 앞에 계시지 않소!"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옵소서!" (시 102:2)

혹시 당신도 지금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져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버리고 멀리 여행이라도 가고 싶지 않습니까? 베낭을 메고 지구 끝까지 돌아다닌다 해도 약간의 기분 전환은 되겠지만 마음의 고통은 떠나가지 않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오직 당신 앞에 임재해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겨버리십시오. 당신 앞에 계신 성령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드리면 되겠지요.

"사랑하는 성령님, 내 마음의 모든 짐을 성령님께 드립니다. 성령님께서 해결해 주십시오. 나는 오직 성령님의 얼굴만 바라봅니다."

당신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실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수님께로부터 눈을 떼고 문제와 당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베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려움에 먹혀 물 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들어 갈 것입니다. 온 세상이 뒤집히고 흉용한 물결이 덮쳐와도 당신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본다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입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행 2:25)
어느 날 권사님 한 분이 집에 ?아왔습니다. 여러 가지 가정에 얽혀 있는 문제와 불치의 병으로 많은 괴로움을 당했고 모든 일은 갈수록 힘들어졌습니다. 식구들은 각자 나름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어디를 돌아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분에게 전들 무슨 속시원한 해결책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전적으로 저와 함께 계신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권사님, 이제 제가 마지막으로 드릴수 있는 말은 모든 문제에서 눈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문제만 붙들고 있어서는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권사님과 가정이 이렇게 된 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권사님의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서 청산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눈을 돌려 내 대신 나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거기에서 모든 죄와 저주를 말끔히 씻는 예수의 피가 흘러내려 지금 권사님과 온 식구를 적시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십시오! 지금 이곳에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보혈이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눌려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저는 그때 성령께서 감동하신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펴놓고 또박또박 소리내어 함께 읽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갑자기 성령님의 임재가 분명해지더니 그 권사님이 성령에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기도하는데 오랫동안 사모했지만 받지 못했던 성령의 세례가 그 즉시로 임하고 입에서는 생전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방언이 강물처럼 흘러나왔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권사님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과 형통함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눈을 돌려 단지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당신은 죄로부터 돌아서게 되며 당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교만과 자아가 깨어지게 됩니다. 당신의 더러운 마음은 정결해지고 복잡한 생각은 단순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과 멍에에서 놓여남을 받으며, 부흥의 불길속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당신은 모든 문제와 환경과 연약함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믿음이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해답입니다. 당신은 지극히 작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당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위대하십니다!
당신의 환경에서 눈을 돌리십시오. 당신의 형편과 사정에서 눈을 돌려 지금 당장 당신 앞에 임재해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모든 불행과 고통에서 눈을 돌려 성령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성령님, 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저는 영원히 성령님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오직 위대하신 성령님의 얼굴을 대면하며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연약한 보통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당신이 당하는 환경보다도 더 크시며, 당신의 생명에 관한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이 당신 앞에 실제로 임재해 계십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믿음으로 성령님을 바라보십시오.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계속해서 보는 행위로 문제의 태산 앞에서 담대하게 승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 4:6,7)

힘 없고 연약한 사람이 성령님을 바라보고 기뻐할 때 새로운 희망과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새힘을 소유하게 됩니다. 당신 앞에 임재해 계신 성령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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