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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심이 뜨거우신 하나님! (엘 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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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오늘 우리는 선지자 <요엘>을 만나려고 합니다. 요엘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 이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만, 요엘이란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점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 <브두엘>의 뜻이 <하나님의 성실>이란 점으로 미루어보아, 매우 경건한 가문에서 자라난 선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엘서는 모두 3장으로 구성된 짧은 예언서임에도 불구하고, 구약에서는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신약에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또한 사도 바울이 요엘서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한 책입니다.

요엘서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른 예언서에서 흔히 보이는 선지자 개인의 영적 체험이나 환상이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신, 당시 남 유다 전역을 휩쓸었던 메뚜기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자연 계시>라는 신학적 지평을 열었다고 하겠습니다.

요엘서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남 유다의 제8대 왕 요아스의 통치 기간(주전 835-796년)중에 기록되었다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해서 저 역시 이 입장에 따른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2
그러면 여기서 먼저 요아스 왕이 통치하던 당시 남 왕국 유다의 정세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요아스 왕이 통치하던 시기는, 통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약 100여년이 지난 시기였습니다. 해서 남북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군사적 긴장 상태는 많이 해소되어 있던 반면, 그와 정비례해서 두 왕국 모두 타락과 패역의 역사를 반복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남북의 왕실에서부터 부패와 타락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 왕국의 제7대 왕이었던 <아달랴>는 타락과 패륜의 극치를 보여준 최악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북 왕국의 악한 왕 아합과 악녀 이세벨의 딸로서, 정치적 목적으로 남 왕국 왕실에 시집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왕이었던 자기 남편이 죽고, 남편의 뒤를 이어 왕권을 물려받았던 자기 아들도 죽자, 그 참에 아예 자기가 왕의 자리에 올라앉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다윗 왕가의 왕손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자기의 손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일은, 그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은 다윗 왕가의 대를 이을 씨앗을 남겨 두셨다는 점이었습니다. 권력욕에 눈이 먼 <아달랴>의 딸이, 용케 다윗 왕손 중 한 왕자를 젖먹이 때 몰래 훔쳐다가, 무려 6년 동안을 숨겨 키웠던 것인데, 그가 바로 요엘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왕 요아스였던 것입니다. 이 왕자 요아스를 숨겨주었던 딸의 남편이 마침 성전을 책임지는 제사장이었기에, 저들 부부는 어린 왕자를 하나님의 전에서 숨겨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 제사장의 이름은 여호야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아스가 일곱 살 되던 해, 드디어 아달랴를 몰아내고, 어린 왕자를 남 왕국 유다의 제8대 왕으로 옹립하게 됩니다. 이로써 다윗 왕가가 복원되었던 것인데요, 그러나 불행히도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선정을 베풀 것으로 기대했던 요아스 왕이, 날이 갈수록 점점 패역과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정말 한심하게도, 왕 요아스는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죽음에서 건져 왕으로 세워주셨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결정적인 사고를 치고 마는데요, 때는 생명의 은인인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난 직후였습니다.

역대하서 24장 15절을 이하를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일어난 일들을 전해 주는데요, 왕을 지키던 거룩한 제사장이 죽자, 가장 먼저, 간신배들이 왕의 주변에 꼬이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요아스 왕이 저들의 말에 놀아났다는 점입니다. 결국 요아스 왕은 자기 열조의 하나님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에게 절을 하며, 산당에 올라 성창들과의 향락에 빠지고 말았는데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를 범한 것이었지요. 역대기 사가는 왕 한 사람의 범죄로 온 유다와 예루살렘 전역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다고 전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저 못난 왕도 버리지 못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어 자꾸 경고하십니다.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요아스 왕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카드를 뽑아 드셨는데, 그가 바로 죽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였습니다. 생명의 은인이었던 제사장의 아들을 보내면, 그 아비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해서라도 돌아오리라 기대하셨던 건데요, 그러나 이미 불 회귀선을 넘어버린 요아스, 놀랍게도 아들 선지자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이 뽑아 세운 왕이,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돌로 쳐 죽인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인데요, 문제는 상대가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키워주셨고, 마침내 왕이 되게 해 주신 분의 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형제 같은 사이군요. 그런데 그가 와서 좀 듣기 거북한 예언을 전하기로서니, 돌로 쳐 죽이다니요. 그러니 그런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잘 될 턱이 없었던 거죠. 결국 요아스 왕 자신도 이듬 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고, 온 나라는 나라대로 벌을 받게 되었던 것인데요.

# 3
바로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엄청난 메뚜기 떼가 남 왕국 전역을 습격했던 것입니다. 이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다니, 메뚜기 떼한테 이토록 처참하게 당하다니,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메뚜기 떼의 공격을 받아, 초토화되었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선지자 요엘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 1:4 / (읽기) / 좀 생경한 단어들이 있군요.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이> 모두 메뚜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요, 혹자는 네 종류의 메뚜기를 지칭한다 하고, 더러는 메뚜기의 성장 과정 네 단계를 지칭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네 가지 이름 모두 메뚜기를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그랬습니다. 이 메뚜기가 먹고 남긴 것을 저 메뚜기가 또 먹어 치우고, 저 메뚜기가 먹고 남긴 것은 요 메뚜기가 먹어 치우고, 얘가 먹고 쟤가 먹고, 그렇게 메뚜기들이 온통 먹고, 먹고, 또 먹어서, 사람 먹을 것이 하나가 없도록 다 먹어 치웠던 것인데요, 결국 저들은 메뚜기 보다 못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메뚜기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먹어 치웠는지를, 요엘서 1장 7절을 보면 모든 나무 가지가 하얗게 벗겨졌다고 합니다. 1장 9절을 보면 여호와의 전에 드릴 제물조차 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장 10절을 보면,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여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12절에선 인간의 희락까지 다 말라 버렸다고 합니다. 20절에선, 그 땅에 살던 모든 들짐승까지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고, 시냇물도 다 말라 버렸으며, 들풀까지 다 타버렸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총체적 재앙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던 것인데요,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선지자 요엘이 놀라운 말씀을 선포합니다. / 2:1 / (읽기) / 거기 <여호와의 날>이란 단어에 동그라미 하시고 별표 다섯 개, 정말 중요한 말인데요, 지금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다는 겁니다. 곧 그 날이 온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날에 저들이 당하게 될 일들이, 지금 당하는 메뚜기 재앙 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날일까? 요엘서 2장 2절을 보니 <자고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도 없을> 날이라 합니다. 2장 3절을 보니 심판의 불이 앞과 뒤를 사르고, 에덴이 변하여 황무지가 되는 날이라 합니다. 2장 11절을 보니, 그 날이 너무 크고 심히 두려워 당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이제 그런 무시무시한 날, 마지막 날이 곧 온다는 심판의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 4
그러면 다가올 재앙의 날을 비켜 갈 길은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앉아 그 날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혹시 마지막 그 날을 오히려 축복의 날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는 말인가? 해서 주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인데요, 요엘서 전체의 흐름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구절이기도 하고요, 심판의 예언이 축복의 예언으로 바뀌는 전환점, turning point이기도 합니다. 해서 오늘 저는 이 귀한 말씀을, 설 명절을 지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에게 특별하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으로 받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실까요? / 2:18 / (읽기)

가장 먼저 눈에 띠는 표현이 있군요. 중심이 뜨거우시다는 표현인데요, 먼저 <중심이 뜨겁다>는 히브리 표현은 <불같이 질투한다, 혹은 불같이 시기 한다>는 어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음이 뜨겁긴 한데, 부정적인 원인 때문에 뜨거워진 상태를 말하는 거죠.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모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혹은 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느끼는 뜨거운 감정을 말하는데요, 이 경우 마음의 뜨거움은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이스라엘에게 배신을 당하셨을 때, 그리고 저들이 도리어 우상과 짝하여 노니는 것을 보셨을 때, 그만 그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져, 메뚜기 재앙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뜨거운 사랑이 변하여 뜨거운 분노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거기 18절 말씀에, 그 때에는 하나님의 중심이 뜨거우시되, 긍휼로 뜨거워지신다고 하십니다. 첫 단어 <그 때에> 표시하시고, 중간에 <중심>에 표시하시고, 맨 뒤 <긍휼>에 표시하시고, 종합하면 그 때엔 긍휼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워지신다는 뜻인데요. 이전엔 분노로 뜨거웠던 마음이, 이젠 자비와 사랑으로 뜨거워졌다는 말씀이지요. 달리 말하자면, 파괴적인 뜨거움에서 창조적인 뜨거움으로 변했다고 할까요?

감사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과 사랑으로 뜨거워지자, 진노를 거두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응답을 해 주신다는 점인데요, 그 때 주시는 응답의 내용이 정말 환상적입니다. 직접 들어보실까요? / 2:19- / (읽기) / 거기 <응답>이란 단어에 동그라미, 그리고 조금 넘어가서 <흡족>이란 단어에 동그라미, 어떻게 응답하신다? 한 마디로 흡족한 은혜로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아멘! 설 덕담 나누기!

<흡족한 은혜로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왕에 내친 김에 흡족한 은혜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19절을 보니, 이미 말라 버렸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시되 흡족하게 채워주신다고 하십니다. 또한 다시는 모욕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20절에 보니 모든 적군들을 동해 바다와 서해 바다에 다 빠뜨려 몰아내 주신다고 하십니다. 요즘 우리나라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군요.

또한 22절에 보니, 들풀과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서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하여 23절에 보니, 이젠 시온의 자녀들이 다시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25절에선 그 동안 메뚜기 떼가 먹어치운 것까지 다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때에, 그 날에, 하나님 친히 주실 축복을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 2:26 / (읽기) /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흡족한 은혜로 응답하신다는 이 복된 말씀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여 이 말씀 안에서 날마다 흡족한 은혜를 누리시며, 마침내 금년 한 해를 거룩한 찬송으로 마감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지난 한 해를 고난과 역경 속에 어렵사리 지내 오신 분들께, 이 회복의 말씀, 치유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5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과제는 어떻게 해야 이 모든 흡족한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거지요.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있으니 바로 18절의 첫 단어, <그 때>입니다. 우리가 그 때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인데요, 그렇다면 분노의 뜨거움에서 사랑의 뜨거움으로 바뀌는 그 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세 가지로 답을 정리하며 오늘의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십니다.

2:12 / (읽기) / 이제라도 돌아오라 하십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염치없어 못 오겠거든, 금식하며 돌아오고, 울며불며 돌아오고, 애통하며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여 돌아와야 한다는 점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라는 말씀이지요. 해서 13절을 보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며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십니다. 돌아오는 척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가식적인 회개로는 어림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돌아온다는 말, 가던 길을 돌이킨다는 뜻이지요. 내 삶의 방향을 180도 완전히 바꾼다는 뜻인데요, 그래서 신약성경에선 회개하라 하신 건데요,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 역시 전적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렇게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주 하나님도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어, 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14절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의 중심이 자비와 사랑으로 뜨거워져, 놀라운 복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옆의 분과 이 복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어서 돌아와 큰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거룩한 성회로 모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한번 회개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뜻인가?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 회개를 제도화하라 하십니다. 돌아오는 일을 정례화 하라는 말씀인데요, 왜 그런가? 인간의 마음이 너무나 약해서 오늘 회개하고 내일 또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 직접 확인합니다. / 2:15-16 / (읽기) / 이 구절은 1장 14절과 2장 1절의 병행 구절이기도 한데요, 확인하고 갑니다. / 1:14, 2:1 / (차례로 읽기) / 종합하면, 거룩한 날에, 이 땅의 모든 거민들로 하여금 다 모이게 하되, 여호와의 전에 거룩한 성회로 모이게 하라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배 시간엔 주의 전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하라는 말씀인데요, 2장 16절에 보면, 어린 아이와 심지어 젖 먹는 아이까지 함께 모이라 하십니다. 해서 자모 실에 젖먹이와 함께 계신 부모님, 그리고 우리 자녀들과 함께 교회로 나오시는 부모님들이 참 귀하신데요, 존경하는 부모님 여러분, 참 잘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온 가족이 함께 나와 예배드리는 그 가정에 오늘 말씀 가운데 약속하신 놀라운 복으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역시 2장 16절을 보면, 신랑과 신부도 저들의 방에서 나오게 하라 하십니다. 방금 전엔 성회로 <모으라!> 하셨는데, 신랑과 신부에 대해선 <나오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만큼 신혼부부는 나오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동시에 신혼부부의 재미 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예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모든 공 예배 시간에 주의 전으로 열심히 나와야 합니다. 나오되 우리의 애기들 까지 함께 나와야 합니다. 혹 한 눈 파는 성도들이 있거든 거룩한 성회에 나오도록 열심히 끌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중심이 자비와 사랑으로 뜨거워지며, 우리가 복 받는 그 때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옆의 분과 인사하며 다짐합니다.

<부지런히 모여 흡족한 은혜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 때에 흡족한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은, 돌이켜 거룩한 성회로 모여, 기도하는 일입니다. / 2:17 / (읽기) / 거기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기도하라 하십니다. <낭실>은 요즘 말로 하면 현관이요 <단>은 제단인데요, 당시엔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 동편의 낭실, 곧 현관과 제단 사이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정리하면, 성전의 현관과 제단 사이에 나의 기도하는 자리로 정해 놓고 거기서 울며 간구하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전에 나오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주의 전에 나와서, 내가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되, 내 기도하는 자리를 정해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기는 우리 이 장로님 기도하시는 자리, 저기는 박 권사님 기도하시는 자리, 저기는 김 집사님 기도하시는 자리, 저기는 효주 자리, 여기는 재성이 자리, 그럼요, 내 기도하는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흡족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리를 정해 주의 전에 나와서 기도할 때, 잊지 말 것, 최소한 세 가지 제목을 놓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기도 제목 세 가지인데요, 17절에 나옵니다.

작은 첫째,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긍휼을 구하라 하십니다.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 믿는 성도들의 기도와 간구로 우리 민족이 잘 되고 잘 될 줄 믿습니다.

작은 둘째, 주의 기업으로 욕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하라 하십니다. 거기 <주의 기업>이란 단어,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데요, 정말 이 시대 한국 교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기도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교회가 욕을 당하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으로만 가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작은 셋째, 이방인의 조롱과 멸시를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논리적 순차에 따라 세 번째 기도는 우리 가정을 위한 기도로 받고 싶습니다. 우리 각 가정이 이방인의 조롱을 받지 않게 해 주십사는 기도인데요, 해서 우리의 기도로 동광의 모든 가정이 이방인들에게 조롱 대신 칭송을 듣는 위대한 가정, 행복한 가정 다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자리에서 기도하여 꼭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6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지요, 아버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모질게 굴던 자식인데, 그렇게 거꾸로만 가던 자식인데, 그래도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마음이 뜨거워지셔서, 모든 것 다 용서해 주시고, 흡족한 은혜를 주시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아버지처럼 우리의 마음 중심을 사랑으로 뜨겁게 하십시다. 해서 이젠 온 몸으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보여 드립시다. 나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보이도록 그렇게 삶으로 사랑을 증명해 보이십시다. 꼭 그렇게 살아 흡족한 은혜로 승리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주신 말씀 마음에 새기며, 잠시 명상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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