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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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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오늘날 우리는 화해가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해를 소망합니다. 크게는 분쟁하는 국가들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미국과 이라크가, 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이 화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남한과 북한이 화해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이 외에도 화해가 필요한 국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얼마든지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화해는 필요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화해가 필요합니다. 친구 간에도, 이웃들과도 화해가 필요합니다. 화해는 참 좋은 것입니다. 적대국이 우방이 되고, 서로를 해치던 일을 그치고 서로 돕는 처지가 됩니다.

원수지간이던 사람이라도 화해하면 친구로 변하고, 서로 미워하던 사이가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화해를 생활화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낙원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야께서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 이 말씀과 같이, 마음에 적의와 미움이 도사리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리나 표범이나 곰이나 사자와 같이 남을 해치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양과 같고 송아지와 같고 어린 아이와 같이 선량하게 변화되어야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화해와 결부시켜서 말한다면, 화해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은 전쟁과 분쟁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국가 간에, 민족 간에 다툼이 끝이 없습니다. 세계사는 곧 전쟁사라는 할 정도입니다. 모든 문제를 대화를 통해서 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대화로써 해결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국제연합을 만들고 국가 간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성과가 미흡합니다.

이는 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지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살아갈수록 느끼는 것은 화목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투고 미워하는 것은 잘하지만 화목하게 지내는 데는 왜 그리도 서툰지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인으로서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가 무엇이기에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일까요?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 하셨으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용했습니다.

계시록 20장에 보면,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했습니다(계 20:1-2). 이는 하와를 꾀인 뱀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이로써 뱀의 말을 들은 것은 곧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편에 서든지, 마귀의 편에 서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편도 아니고, 마귀의 편도 아닌,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죄인되었고,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대로 사망이 인생에게 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과 원수 되고 불화한 사람이 행복할 리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약 1:17)고 하였는데, 하나님을 대적하였으니 그 삶에 저주가 임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살 길은 없는 것일까요? 죄인이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명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화해하면 됩니다.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지워버릴 때 인생은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 가지 알아 둘 점은, 죄인은 절대로 자기편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감염된 영혼은 하나님을 찾을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하고 나자, 그만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이나 따먹은 후나 외관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본디부터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그만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의식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식을 갖게 됩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그의 양심은 죄책으로 움츠려 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피합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으신 눈앞에 자기의 죄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서 어두운 데 숨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민 32:23)고 했습니다.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일 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느니라’(창 4:)고 하셨습니다. 아벨의 피가 살아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땅이 변동치 않는 증인입니다. 또한 가인의 양심이 증인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를 숨길 수가 없으며, 범죄한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죄 짓고 불의한 인생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의 이름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까? 이것은 아담이 머물러 있는 물리적인 장소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하나님 뵙기를 기뻐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뵙기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말씀에는 아담의 타락을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말씀은 아담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서 죄인이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아담’이란 인류의 조상 아담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보통명사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말씀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는 하나님의 물으심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솔직히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 1장 18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여러분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셨다면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녔으나 아직도 진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아니한 분들이 있거든 이 시간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 회개하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악의 길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악행을 버리지 아니하고 계속 행하면서 입술로만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이사야서 55장 6절로 7절에 이르기를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던 아들은 오래잖아 파산했습니다. 요즘 노숙자 신세는 그래도 행복합니다. 매끼니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고, 편하지는 않지만 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잠잘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아들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들판에서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음식은 고사하고 돼지들이 먹는 쥐염 열매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나마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돼지처럼 취급받았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떠나온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돌이켜 말하기를 “17)…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곧 일어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버지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했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몸 둘 바를 몰라하며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그 날 아버지의 집에서는 돌아온 아들로 인해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앞부분에서 저는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으며, 그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그 분이 본질상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에는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 인생들은 각자 자기의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죽음을 당하실 이유가 없으시지만 죄로 인해 멸망할 인생들을 구하시기 위해 대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생명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신 결과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생들과 화목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구원 받는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만 믿을 이유가 어디 있어요? 부처를 믿어도 되고, 마호메트를 믿어도 되고, 힌두교의 신들을 믿어도 되는 것 아니예요? 무엇을 믿든지 진실하게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이지, 꼭 예수님을 믿어야만 한다니, 그것은 기독교의 독선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신 이웃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종교인들이 그렇게 항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교회 안에서도 그 같이 말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도 있고, 목회자 가운데도 있고, 신자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유명한 목사가 불교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상을 종교 다원주의라고 부릅니다. 요즘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면 언론의 찬사를 받고, 인기가 좋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기가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 사상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유대인의 공회에 서서 선포한 말씀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선언하기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구세주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주가 되실 자격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친히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도록 계획하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음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고,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는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치 아니하셨다면 결코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우리의 참 구주가 되실 충분한 자격자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고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와 마찬가지로 성현 군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인류의 구세주는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으므로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훌륭한 성현들이 많이 출현했으나 그들은 다 자기 죄 값으로 죽었습니다. 석가모니의 죽음은 그가 남긴 진신사리가 증거하고 있으며, 공자나 마호메트 역시 각자 무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으므로 무덤이 비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하셨습니다. 이는 말세가 되면 바른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그만큼 적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국인 로버트 토머스 선교사가 대동강 가에서 순교의 피를 뿌린 1866년 8월을 기점으로 해서 계산하면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 온지가 어느덧 140년이 되어 갑니다.

그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1200만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생겨났고, 6만개가 넘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금에 한국 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교회를 위협하는 적은 외부의 핍박이 아닙니다. 핍박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 신앙을 순수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세속화의 유혹과 무속적 기복신앙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신자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현세적인 축복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와 가난과 질병을 다 짊어지셨으니 이제 예수 믿는 신자들은 가난이나 질병에서 해방된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나는 반드시 부자가 된다.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고 외치면서 나아가면 그 꿈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사복음서 어디에 예수님께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의 서신 어디에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만사형통한다고 한 말씀이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부요나 가난을 초월한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기 전과는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내가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전에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돈을 사랑하며 살았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전에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면 기가 살고 주머니 사정이 빈약하면 기가 죽어지냈으나, 이제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할 줄 압니다. 부하다고 재물을 의지하지 않으며, 가난하다고 비굴하게 살지 않습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삽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함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상관없는 의인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화해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화해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고린도후서 5장 18절로 19절에 이르기를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이 고귀한 직책을 수행해야 할 적격자가 된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 ‘피스 메이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니,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이기 때문에 화평케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이라야 사람과도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지속해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와 불화할지라도 자녀의 자격이 상실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효를 저지른 못된 자식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되고 잘못된 길로 가면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어 그 양심이 가책을 받게 됩니다.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고 곁길로 가면 하나님의 매를 맞게 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징계의 매를 맞고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보다는 사도의 권면대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화목케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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