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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친밀한 자의 복 (시 73: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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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세상에 ‘친밀’이라는 말처럼 좋은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우정’ 또는 ‘비밀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 친구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내게 참으로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밀한 친구가 있다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얼마전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한 밤 중에 친구나 선후배에게 전화하면 달려 나오는 프로를 본적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여러분의 친구가 그렇게 달려 올 수 있을까요?

한 연구에 의하면 친구가 없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은 면역체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친구가 없거나 이혼으로 인해서 외로움을 느끼는 유방암 환자들은 면역활동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탠포드 대학 의료센터의 데이비드 쉬피겔 박사는 암 치료의 방법으로 인간관계의 결속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인간관계야말로 암 치료의 회복도 가장 빠르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친구가 있으면 살맛이 납니다. 크게 돈을 벌지 않아도 출세를 하지 않아도 그런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말 부치기조차 부담스러운 관계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의 친밀감이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친밀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친밀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삶 속에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교회에도 이런 친밀함이 성도 간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거기에 행과 불행이 가늠되며 더 나아가 사활이 판가름될 수 있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좋은 친구와 가까이 하다가 출세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나쁜 친구 가까이 하다가 망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사자성어에 ‘근주자적(近朱者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붉은 것을 가까이 하면 붉게 되고, 검은 것을 가까이 하면 검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은 어떤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인격과 삶이 달라집니다. 책을 가까이 하는 자를 좋아하면 유식해 집니다. 놀기를 좋아하는 자를 가까이 하면 가난해 집니다. 술을 좋아하는 자와 가까이 하면 술주정뱅이가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자와 가까이 하면 수전노가 됩니다. 불평을 잘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면 자기도 모르게 불평꾼이 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맹모는 자식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시장에서 공동묘지로 다시 서당가로 . . . .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분과 가까이 하면 그 사람은 새벽기도 열심히 하게 됩니다. 전도 열심히 하는 분을 가까이 하면 전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봉사를 잘하는 분과 가까이 하면 봉사를 즐거워하는 성도가 됩니다. 또 앉으면 불평 불만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평의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가까이 지내십니까? 좋은 믿음의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은 귀한 복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게 된 것을 서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는 사람과의 교제도 중요 합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렇게 친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앙인이 가까이 할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하나님의 은총과는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하나님의 모든 은총과 가까워집니다.

성경은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약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뜻은 하나님과 친구처럼 비밀을 주고 받으며 깊은 교제를 나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제에는 친구간에, 친척간에, 이웃간에 하는 교제도 있지만 교제 중에 가장 좋은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 신령한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만 하면 그 넉넉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우시게 될 줄 믿습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요15:15)

하나님은 공포의 신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55:1에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1:28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말씀하십니다. 하나니은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친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뜻 속에는 하나님과의 사귐, 교제가 가능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통해 만물을 다스리시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알고,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부러운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로 가깝게 지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밀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창 18:17-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야고보2:23절에도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뜻을 알리고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미리 알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속사정을 하나님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창18:22-23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 . . . 사십오인, 삼십인, 이십인, . . .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의 간절한 속사정을 고백함으로 롯을 그 성에서 구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 있는 죄의 욕심이 하나님과의 거리를 두게 합니다. 마26:58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와 서기관,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밤에 모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군사들에 의해 체포당하시자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완전히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기가 민망했던지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했는데 거리를 두고 “멀찍이”(58절) 따라 갔습니다. 가까이 갈 수도 도망 갈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안전거리를 두고 멀찍이 에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해(손해)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멀찍이 두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 교회를 멀찍이 하고 사는 사람, 목회자와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 하다가 깊이 빠져서 골치 아픈일 안생기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손해 보지 않으려다가 결국은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손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그 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주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 복입니까? 성경에 축복을 받은 모든 인물들은 주께로 가까이 간 자들입니다.
우리가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주께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는 실수 투성이였지만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나아가다가 복을 . . 에서는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도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다고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은혜의 때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이 우리의 곁에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6-7)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으면 왜 복일까요?

1.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참으로 힘들고 피곤한 세상입니다. 직장이나, 학업이나, 사업이나 . . .무엇을 하든지 힘들고 어려운 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하기 때문에 합니다. 이런 피곤한 생을 사는 인간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도움도 사람의 도움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언제나 그 어머니를 가까이 하고 싶어 합니다. 어머니를 가까이 하면 어머니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먹여 주고, 졸리면 재워 주십니다. 이불을 덮어 주십니다. 장난감이 필요할 때 장난감을 사 주고, 길을 갈 때에 손잡아 줍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으면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우십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살아가는 것은 놀라운 은혜요, 복인 것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2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구원의 손, 이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의 손입니다. 원수에게서 보호하시는 손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손, 바다를 잔잔케 하신 손, 태양을 머물게 하신 손, 무슨 병이든 낫게 하신 손, 하늘 문을 열어서 복을 주시는 손입니다.
이 손으로 자기 백성을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시며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43:2-3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이 손으로 잡아주시면 물 가운데서도, 불 가운데서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능력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므로 지금 우리는 하나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복입니다.

2. 나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갈림길에서 방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인생의 길을 환히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갈 때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인도하실까요?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설계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성공 설계도를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좋은 설계도가 꼭 필요하듯이 말씀의 교훈이 설계도입니다.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을 날마다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경은 수면제가 아닙니다. 살아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히4:12)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불기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갈 길을 인도해주는 이정표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입니다. 내 인생의 어둠을 밝혀주는 등대와 같습니다. 배는 항상 등대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진리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지켜 행할 때 복있는 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팔아서 생긴 목돈으로 더 많은 목돈을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복권을 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졸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등불입니다. 안내서입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안내서로 알고 읽으십시오. 전자제품을 사면 사용법을 읽어 보는 것처럼 삶의 안내서로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대로 살면 됩니다.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교훈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3. 사모할 자가 있기에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여러분 우리에게 늘 사모하고 그리워 할 사람과 사는 것 보다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삽에게는 주님 외에 사모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 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신앙은 곧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그리움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하나님 보다 더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보다 더 그리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교회에 가고 싶고, 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은 갈증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갈증이 있습니까?
사모합니다. 몸과 정성을 다해 우리 하나님.
사모합니다. 뜻과 정성을 다해 우리 예수님.
사모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우리 성령님.

예배는 내가 무엇을 받으려고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제물을 죽여 드렸습니다. 예배는 나를 창조하시고,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교인들은 졸음으로 시작하여 축도 할 때 깨는 수면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시계 바늘만 계속 들여다보다 종치는 맥 빠진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설교를 외면하고 성경 읽기로 시간 때우다 끝내는 독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설교 제목 하나 기억 못한 체 끝내 버리는 기억상실증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없고 기분 전환에 초점이 맞추어진 감각 예배!를 날마다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A.W. 토저는 "하루를 예배로시작하는 사람은 결코 마귀가 건드릴 수 없는 권능자의 삶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린 사람은 하루 종일 마귀가 손 못 대는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마귀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한 후 교회 문을 나서는 성도를 가장 무서워합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능력자가 되어 예배당 문을 나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늘 사모하는 자와 함께 사는 것 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 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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