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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물 (창 3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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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정호 목사

옛말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을 조금 붓더라도 밑이 막힌 독에 물을 부어야만 물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처럼 은혜를 좋아하고 잘 받는 민족이 또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받은 은혜를 집에 도착도 하기 전에 신속히 쏟아 버리는 민족이 있을까요? 마치 맛나게 먹은 음식이 소화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기도 전에 먹은 음식을 토해내듯 우리는 맛있게 받은 은혜를 내 것으로 삼기 전에 벌써 쏟아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예배 때의 충만함이 세상과 문제 앞에만 서면 빈약하고 작아집니다.

  진짜 부자들은 쌀 한 톨, 물 한 방울을 아끼려 벌벌 떱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소중히 여겨, 행여 쏟을까 벌벌 떨어야 은혜의 부자로 살수 있습니다. 은혜를 경히 여기면, 우리의 인생도 정말 가볍게 됩니다. 은혜를 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 방울, 한 톨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며, 그 은혜를 쏟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쳐야만 합니다. 은혜를 우습게 여기며, 주신 은혜를 자꾸 쏟으면, 있던 은혜도 거두어 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열려 있던 은혜의 문도 자주 닫히게 된다.
  우리는 은혜를 쏟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받으면 되지" 그러나, 또 안 주시면 어쩝니까? 돈을 물 쓰듯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동의 댓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반듯한 부자는, 한푼을 아낄 뿐 아니라 쓸 때는 씁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동의 댓가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출혈을 막아야 합니다. 전기도 누스가 되면 전압이 내려갑니다. 마찬가지로 은혜의 누스 현상이 일어나면 우리는 세상의 압력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받은 은혜를 재활용하는 일에 전심을 쏟아야 합니다. 은혜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는 길은 은혜의 밑 빠진 현상을 막는 길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 건강, 신앙, 교회, 가족, 예배, 봉사, 이 순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당연함과 불평으로 살지는 않았습니까? 무감각과 반항적인 삶으로 체질화되었습니다. 감사와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살인과 자살이 판을 치는 극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이 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자신의 작은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남의 생명도 파괴하는 생명경시 사상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살인적인 긴장과 만남의 순간에 야곱이 받은 하나님의 선물을 생각하면서 얼음과 어둠과 같은 공황적인 시대를 살면서 힘들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화목한 삶
  본문 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야곱은 20년만에 형 에서를 만나면서 두려움에 가득차 있습니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로챈 야곱은 에서의 얼굴이 호랑이나 사자의 얼굴로 보였을 것입니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혀 절하면서 에서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화해를 구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형 에서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때 다혈질적 성격인 에서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동생 야곱을 보는 순간 모든 살의(殺意)와 원통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얼음보다 차갑고 칼보다 날카로운 에서의 마음에 은혜와 온기를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형제는 목을 끌어 낮고 입맞추고 울었습니다. 우애가 넘치는 재회 장면으로서 이산 기간에의 서러움과 만남의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눈물은 미움과 원망과 섭섭함을 다 녹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20년의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낸 것입니다. 20년 동안 에서와 야곱의 적대적인 원수 관계가 하나님의 은혜로 형제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이 된 것입니다.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철학가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인간을 불독개미(Bulldog Ant)에 비합니다. 불독개미는 절반으로 잘라 놓아도 머리부분과 꼬리부분이 싸웁니다. 머리는 꼬리를 물고 꼬리의 바늘은 머리를 쏩니다. 두 쪽이 나고서도 이 처참한 자기와 자기의 싸움을 몇 시간이나 계속한다고 합니다. 정말 비참한 동물입니다. 인간도 불독개미와 같습니다. 싸움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됩니다. 이 싸움의 해결이 평화요 행복인데 사람들은 그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마크 트웨인은 개와 고양이를 한 울에 넣어 잘 지내나 실험해 보았다고 합니다. 개와 고양이가 잘 지내자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넣어 보았습니다. 약간의 적응기를 거치자 이들 역시 잘 지냈습니다.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로교인과 천주교인을 넣어 보았습니다. 울 안에는 살아 남은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화목이 힘듭니다. 그러나 화목해야 모두가 삽니다. 싸움과 전쟁은 모두를 불행하게 하고 죽게 합니다. 누구도 행복하거나 잘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야곱처럼 낮아지고 겸손할 때 화목은 시작됩니다. 에서와 야곱이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피차 울었던 화해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화목은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가정, 교회, 이웃과의 관계가 화목의 삶으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선물이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믿음의 삶
  본문 10절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났을 때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에서의 얼굴에 나타난 따뜻하고 온유한 사랑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빛을 보았습니다. 복수심에 가득 찬 형 에서의 마음을 그처럼 부드럽게 변화시켜 자신을 영접토록 역사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살인적인 에서의 마음을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에서의 변화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뵙고 만났던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공로를 감추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낸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4세기의 신학 적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를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도시 출신에 점잖고 구변도 좋아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습니다. 반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낸 어거스틴은 어머니와의 관계도 유별났고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노력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잘못됐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결실도 좋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님을 좇았으나 펠라기우스는 자기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했습니다. 피터슨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론상으로는 어거스틴 쪽이지만 실제 생활은 펠라기우스 쪽이라 지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의 마음까지 사려고 강박적인 노력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나무에는 나이테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를 절단해 보면 그 나무가 성장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나이테 안에 자료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가물었을 때 나타난 표시이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번개를 맞았을 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비가 많이 왔을 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병충해가 심할 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불이 났을 때  나타난 나이테라는 것입니다.' 한 나무의 상처의 질곡들은 대부분 나무의 외형에 나타나지 않고 나무의 가장 깊은 심층복에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외형으로야 온갖 위선과 포장으로 가면쓴 희극배우처럼 살아가지만 살포시 가슴을 헤집어 보면 굵직한 상처와 질펀한 응어리들이 나이테 되어 나만의 자서전으로 남게 됩니다. 어떤 것은 버림받고 거절당한 나이테로, 어떤 것은 억울하게 오해 당한 나이테로, 어떤 것은 병 되도록 참아야 했던 억누른 감정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극심한 외로움과 열등감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무시당함과 외면당함의 나이테로, 어떤 것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한과 부러움의 나이테로 우리의 걸음마다 자국마다, 피되어 흐르고 눈물 되어 강을 이룹니다. 때로는 무성한 잎과 탐스런 열매로 나를 과시하고 덮으려 하지만 무성한 잎과 탐스런 열매 속에 깊게 후벼 패인 상처의 나이테는 가려 지지 않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 불쑥 출몰하는 게릴라처럼 여기 저기서 우리를 어둠과 무기력의 늪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외삼촌 라반으로 인해서 수많은 인생의 응어리와 상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이 절대절명 위기의 순간에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바꾸시고 또한 에서를 바꾸신 것입니다. 내가 변해야 남도 변합니다. 기도할 때 모두가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은 최고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행복입니다. 돈과 권력을 가져도 믿음 없으면 허탈하고 공허합니다. 좌절하고 자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특권과 최고의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허전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서와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처럼 믿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의 선물된 믿음의 삶을 더욱 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섬김의 삶
  본문 11절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야곱은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다는 에서에게 강권하여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동안의 에서에게 입힌 피해를 다 갚을 수야 없겠지만 사죄하며 섬기는 심정으로 최상의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말로만 미안함을 표시해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인 예물과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같이 구체적인 행동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위선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듯이 진정한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야곱은 사죄하는 마음을 물질로 표시하였습니다. 형 에서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긴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애착이 많은 야곱이었으나 형 에서를 물질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으로 형 에서를 섬긴 것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섬김은 섬김을 낳습니다. 섬김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감동이 있어야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게 됩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브라질의 성자로 불렀던 미국 선교사 멜랜드(Doug Meland) 내외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선교하며 평생을 사는 중에 네 번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곳 주민인 풀리오 인디언들은 처음에 멜랜드 내외를 '백인'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그들을 무기로 괴롭혔던 그 허다한 '백인'을 부르던 증오에 찬 명칭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 멜랜드 내외는 의료봉사로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며 병을 치료하는 헌신적인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어느새 그들의 호칭이 '존경하는 백인'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멜랜드 내외는 풀리오 인디언들의 말을 열심히 배워 10년 뒤에는 그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유창한 말을 구사하게 되었고, 생활도 그들의 풍습대로 묻혀 살았습니다. 그들은 멜랜드 내외를 '백인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부상한 인디언 소년의 발을 씻어주고 있었는데 구경하던 인디언들이 "인디언의 발을 씻는 백인을 보았는가? 이 사람들은 하늘이 보내 준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으며, 그때부터 멜랜드 부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것입니다. 멜랜드 선교사 내외의 섬기는 삶에서 새 힘을 주사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섬김을 통하여 관계가 좋아지고 모두가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섬깁니다. 섬김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인색하고 계산적이었던 야곱이 섬기는 삶으로 변화되었을 때 에서도 변화되었습니다. 섬김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처럼 섬깁시다. 가족, 교인, 이웃, 모두를 섬깁시다. 더 무릎을 꿇고 섬깁시다. 입을 다물고 섬깁시다. 나의 가장 귀한 것으로 섬깁시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불안과 싸움과 불신의 시대입니다. 야곱처럼 화목과 믿음과 섬김의 삶을 삽시다.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를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2004년, 여러분의 생애와 가정에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이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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