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정의달] 울타리가 있는 가정 (잠 15:15-17, 행10:1-8)

  • 잡초 잡초
  • 518
  • 0

첨부 1


- 설교 : 이영무 목사

  옆에 분들과 웃는 얼굴로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의 가정에는 울타리가 있습니까?”

  세종대왕 때의 일입니다. 민손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젊은이가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로 맞이한 계모와 계모가 낳은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계모 밑의 민손은 안타깝게도 구박을 받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이 계모는 그 추운 엄동설한에 자기가 재혼해서 낳은 두 아들은 따뜻한 솜옷을 해 입히고, 민손에게는 갈대를 껴서 천만 씌운 홑옷을 해 입혔습니다.

  어느 날, 관청에 볼 일이 있어 아버지는 민손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자신은 수레에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겨울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아들 민손이 벌벌 떨며 추워했습니다. 아버지가 “너, 그렇게 춥냐?” “예, 조금 추워요. 아버지” 아버지가 수레에서 내려 옷을 만져보니 아들 민손이 입은 옷이 갈대 이파리가 들은 홋 겹 옷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집에 돌아와 계모를 앉혀 놓고서는 “어떻게 이럴수가 있소!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 집에 필요도 없소이다. 썩 나가시오!” 하고 소리쳤습니다. 난처해진 민손은 아버지께 공손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만 추우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면 세 아들이 다 추위에 떨게 됩니다. 부디 어머니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더랍니다. 여러분들, 이해가 되시지요? 그 말을 들은 계모가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고 그 이후 좋은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은 참 중요합니다. 계모일지라도 어머니가 계시는 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콩쥐팥쥐 이야기만 듣고 계모는 다 나쁜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은 행복한 가정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인터넷에 한 글이 올라왔는데 제목이 “엄마가 날 버렸어요!” 였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이야기를 써 놓았습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했지만 지금도 그것이 늘 가슴에 맺혀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설이 되어 친척들이 모여 있어 세배를 해도 다른 집 아이들은 부모가 있다고 다 세뱃돈을 주는데 자기는 안 주더라는 얘기, 학교에서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와라”해서 큰 어머니를 모셔가면 “너희 어머니는 어디 갔느냐”했던 얘기 등 부모가 없어 늘 가슴에 상처가 되었던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민속명절을 앞두고 가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명절이 되면 가족이 다시 모이고, 떨어졌던 부모님을 만나게 되고, 형제자매가 화목한 자리를 준비합니다. 명절이 되면 누가 가라고 말 안 해도 다 알아서 짐 싸서 고향으로 향합니다. 부모를 찾아가고, 형제를 찾아가고, 또 자녀를 찾아서 떠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무엇인가 힘이 느껴집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에는 무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에너지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올해도 삼천만명이 대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의 힘, 가정의 힘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가정은 무한한 에너지가 생성되는 곳입니다.

  가족이라는 사랑이라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경험을 떠올려 봅시다. 갑자기 배가 아플 때면 활명수니, 훼스탈이니 소용없습니다. 엄마가 ‘내 손은 약손이다’하고 몇 번 만져주면 다 낫습니다. 가족이 하나의 “치유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웬만큼 마음이 낙심되고 상처를 받아도 가족이라는 사랑의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정하신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사랑의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흠”에 대해서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단점과 약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나가서 남들과의 사이에서 노출이 되면 그것은 흠이 되고, 약점이 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연약함도, 실수도 다 용납될 수 있습니다.

  혹시 “이 잡는 가족”을 아십니까?^^ 저 어릴 때만 해도 그제서야 겨우 전깃불이 들어왔는데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온 가족이 옷을 벗어 그 불 밑에 앉아 이를 잡느라고 여념이 없었습니다. 서로 “아빠 큰 것 잡았다!” 신이 났습니다. 잡다가 또 맘에 안 들면 또 옷을 이로 씹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심심할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윗 옷을 벗고 젖가슴을 드러내도 흠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가족이기에 그랬습니다.

  7남매에 할아버지까지 열 사람이 둘러앉아 밥을 먹다 보면 네 명의 형들 중 방귀를 뀌는 형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흠이 되지 않았습니다. “문 열어라!” 한마디 후, 밥을 또 열심히 먹습니다. 밖에 나가서 그랬다면 쫓겨날 일입니다. 그러나 가족이기에 다 용납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족은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됩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소속감을 주고 안정감을 줍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급속한 가정의 해체입니다. 결혼한 가정의 절반이 5년 이내에 이혼한다고 합니다.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가정을 설계하셨고, 가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파괴될 때 하나님의 복을 받을 그릇이 없고 자리가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가정을 떠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들은 어두운 뒷골목에서 방황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범죄의 유혹에 그대로 노출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회의 문제가 됩니다. 가정을 떠난 남편과 아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우리에게는 어려운 불행,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가정을 허무는 여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아가서 2장 15절에 보니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팔레스타인 광야에는 여우가 많습니다. 사사기에도 보면 삼손이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가지고 꼬리에 꼬리를 다 연결했습니다. 횃불로 불을 붙여 꼬리가 뜨거우니까 이 여우가 블레셋 군대의 논과 밭을 다 불태우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여우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은 짐승이 아닙니다. 여우들은 무덤이 있는 곳에 기식하면서 무덤에 굴을 파고 송장을 뜯어 먹습니다. 이 팔레스타인 여우들은 포도 농사가 한참 꽃피고 오를 때 그 때 꽃을 망가뜨리고 뿌리를 갉아먹는, 포도원에 들어가서 망가뜨리는 것이 여우입니다.

  구약에서 포도원은 흔히 가정이나 교회를 상징합니다. 시편 128편 3절에 보면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포도원은 바로 가정을 의미합니다. 바로 포도나무는 탐스런 아내, 사랑스런 아내를 의미합니다. 이 가정의 행복을 갉아먹는 여우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무신론적인 사단의 꾀임에 빠진 여우들이 공격을 해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정을 허무는 여우로부터 우리 가정을 지키려면 우리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보면 시골에 울타리가 있습니다.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울타리 말입니다. 어떤 집은 무궁화를 심기도 하고, 가시나무를 심기도 해서 이웃과 우리 집의 경계를 정했습니다. 그 울타리 속에서 우리 가정은 행복할 수 있었고, 서로가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 가정들은 울타리가 없어졌습니다. 그것이 문제 입니다. 우리는 울타리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울타리들은 어떤 울타리들일까요?

  첫째, 사랑의 울타리를 세워야 합니다.

따라할까요? “가정에는 사랑의 울타리가 필요하다!” 우리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날 먹을 음식이 없습니까? 탈 차가 없습니까? 입을 옷이 없습니까? 거할 집이 없습니까?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두 사랑에 갈급해 있습니다. 잠언 15장 17절에 보니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나물을 먹어도, 보리밥을 먹어도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이 최고지, 갈비를 뜯으며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것이 살로도 안 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리 가정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낍니다. 고독해합니다. 이러한 오늘의 시대를 가리키는 사회적인 용어가  “군중속의 고독”입니다. 명동이나 종로에 나가면 사람이 너무 많아 부딪치고 지나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역시 나는 고독합니다. 나하고 마음 터 놓고 대화할 사람이 없고, 내 아픈 상처를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독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교회에 나와도 고독을 느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을 터놓고 상처를 나눌 대화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가정이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사랑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열고 상처를 치유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바로 가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엔 더더욱 사랑의 울타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전쟁 고아가 되어 군 병원에 집단으로 수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자꾸 병에 걸리고 우유를 먹으면 자꾸 토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학자들이 연구를 했답니다. 이 아이들의 문제는 “사랑이 없는 우유”였습니다. 간호사들의 인력이 모자라니 아이들 입에다 우유 하나씩 물려주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는데 결국 그 “사랑이 없는 우유”가 아이들을 토하게 만들고, 병에 대한 면역력을 떨어뜨리게 만든 것이었답니다. 믿음, 소망, 사랑가운데 그 중 제일은 사랑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아이들에게 돈을 주는 것만으로 부모 역할을 다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L.A로 이민 간 가정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일에 바쁘니 늘 아이에게는 돈 주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가게에 나왔답니다. 또 돈이 필요해서 나온 줄 알고 무턱대로 돈부터 쥐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아빠를 쳐다보면서 말했답니다. “난 돈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바로 아빠가 필요해요, 엄마가 필요해요”라고 말입니다.

  영어 단어 중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무엇이냐는 설문에 1위로 나온 답은 “mother"였습니다. 어머니 말입니다. 가정에는 엄마, 아빠가 필요하고, 가족이 필요하고, 또한 사랑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에 든든한 사랑의 울타리를 세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가정에 세워야 할 울타리는 용서의 울타리 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용서가 없는 세상, 용서가 없는 가정이 지옥이지 어디 사람 살 곳입니까?
  어떤 부부는 한번 삐치면 평생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고 보자”는 식 입니다. 남편 퇴직금 받으면 이혼하려고 두고 보고, 아이 결혼만 하면 이혼하지 내가 사나 보자 하는 부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도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신풍시장에 손잡고 장보러 가는 부부가 진짜 행복한 부부입니다. 그것은 지조가 없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부부입니다. 오늘은 헤어질 것처럼 싸우지만 내일은 그렇게 행복한 모습의 가정을 찾아 볼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용서하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부부는 오늘 섭섭한 것이 있어도 내일은 다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은 마음의 상처를 오래 품고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이야기하는 유머입니다만, 어느 노인 부부가 장수 프로그램에 나갔답니다. 사회자가 할아버지에게 문제를 보여주면, 할아버지가 그 단어를 보고 설명을 하고, 할머니가 답을 맞추어야 하는 프로입니다. 사회자가 단어를 보여주는데, ‘천생연분’이란 네 글자 였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문제를 냅니다. “여보, 우리처럼 잘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 있지? 그거 뭐지?”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웬수”그랬답니다!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그것 말고 4자” 그러니까 “알았어! 평!생!웬!수!’ 라고 했답니다.

  왜 웬수 입니까?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바람 피운 것, 아직도 마음속에 꽁하고 있는 겁니다.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가정이 불행해지고 부부가 늘 등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용서는 참으로 귀중한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 할까요?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일곱 번 아니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이 말씀은 490번이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에는 제한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보니까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4장 32절에 보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가족이란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 혹시 이번 명절에 친척이나 가족들 만날 때 좀 껄끄러운 관계가 있는 분 계십니까? 갈등하는 관계에 있습니까? 다 마음에서 씻어 버리고, 용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용서의 울타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한 가족입니다.

  세 번째는 격려의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가정은 격려하는 곳입니다. 칭찬이란 잘할 때, 칭찬하는 것이고 격려란 공부를 못해도 끌어올리는 힘을 붙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격려인 것입니다. 가족은 늘 가정에서 격려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격려가 없는 가정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오직 잘못한 것에 대한 질책과 책망만 있다면 그곳은 지옥이지 낙원이 아닙니다. 못해도 격려해주고, 잘하면 더 칭찬해주고 그것이 가정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그 무지한 고래도 칭찬을 받으면, 춤울 추듯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격려가 꼭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아이가 영화를 보고 나서 저희 부부한테 영화가 참 좋다고 꼭 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말아톤’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설 명절에 텔레비전만 보지 말고, 할아버지, 손자, 아빠, 엄마 온 가족이 모두 손잡고 보러 가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영화 보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돈도 얼마 안 들고 온 가족이 은혜를 받고 오게 됩니다. 설교만 들어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도 은혜를 받게 됩니다. 12세 입장가 이니까 아이들이 다 가도 괜찮습니다. 이상한 장면 하나 없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여러분이 꼭 보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자폐아였습니다. 자폐아는 집중을 못하고, 산만하고, 좀 지능이 낮고, 이상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이 아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희생의 마음을 가지고, 이 아이를 키워 나갑니다. 탤런트 김미숙씨가 엄마로 나오고 윤초원이라는 자폐아 연기는 조승우란 배우가 했는데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지 모릅니다.
  엄마가 이 아이를 위해 전 생애를 바치면서 헌신합니다. 이 아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니, 달리기를 잘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달리기를 통해서 의지를 키워주고, 그의 인생을 세워주고자 합니다. 초원이는 달리기를 잘하지만 그 안의 장애로 인해 엄마가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초원이는 얼룩말을 좋아합니다. 어떤 아가씨가 얼룩말 무늬가 있는 치마를 입고 있으니 무작정 가서 치마를 만집니다. 오해를 받아 혼쭐이 나도 초원이는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는 얼룩말을 좋아하니까 얼룩말 무늬만 있으면 가서 그냥 만지는 것입니다. 남의 핸드백도 얼룩말 무늬가 있으면 가서 만지다가 소매치기로 오해를 받고, 엄마는 “우리 아이는 장애아 입니다”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다 사고, 20살이지만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초원이에게 “네가 한번 싸인 해봐라” 그랬더니 싸인 하는 란에 “싸인” 이라고 또박또박 씁니다. 엄마는 지능을 넘어서 사랑으로 그 아이를 키워갑니다. 또한 아이를 격려합니다. 엄마가 “우리 초원이의 다리는 뭐지”하고 물으면 초원이는 “백만 불짜리 다리!” “우리 초원이의 몸매는?”하면, “끝내줘요!”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엄마의 격려입니다. “너의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야! 초원아 얼마든지 너는 달릴 수 있어.” “너의 몸매는 끝내주는 몸매야. 열등감 가질 필요가 없어”라는 엄마의 마음과 지속적인 격려가 담긴 대화의 결과였습니다.
  그 후 아이는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10km 경주에 나가서 3등을 합니다. 그리고 마라톤 전 구간 42.195km를 달리는 춘천 마라톤 대회에서 결국 완주하게 됩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온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고 회복되는 모습이 영화에 잘 담겨 있습니다.
  엄마가 지나치게 큰아들 초원이에게만 집중한 결과로 남편도 저리 가라, 작은 아들도 저리가라로 멀어졌었지만 이런 사건을 통해서 다시 가족이 화목해지고, 하나가 되는 “회복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정에는 격려와 칭찬이 필요합니다.

  이번 명절에 부모님을 만나면, 부모님께도 격려해 드리고 칭찬해 드리시길 바랍니다. 아버님의 연세가 70세가 넘으셨어도 “아버님, 60대 젊은이 같으세요. 염색만 좀 하고 넥타이만 매시면 밖에 나가면 할머니들이 줄줄 따라오시겠는데요~” 해 보십시오. 그렇게 칭찬 드리면 얼마나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어쩌면 이렇게 피부가 고우신지 몰라” 해야지, 기껏 한다는 얘기가 “아이고 아버지, 일년 만에 만나니 아주 폭삭 늙으셨네요”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시면 아버지가 더 늙으십니다. 가족끼리도 자식은 부모를 격려해드리고, 부모는 자녀를 칭찬해야 우리 가정이 격려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가정에는 기도의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명절에 모이면 윷놀이도 합니다만, 어떤 가정은 윷을 살 돈이 없고, 화투밖에 살돈이 없어서 그것으로 노는 가족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동서간에 싸움이 나기도 한답니다. 그래도 아주 보기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아마도 가족이 함께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는 모습 때문에 그런것 같습니다. 가족이 모여서 함께 뭔가 즐긴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거기다 가족이 모여서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기도의 울타리!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울타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고넬료 가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인이지만 백부장이 되어서 유대에 주둔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둔군의 장교이지만, 그는 유대교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겼고 그는 두개의 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창이요, 하나는 이웃을 향한 구제의 창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이 기도하고, 늘 기도하고, 많이 구제하고, 늘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던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가족, 이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를 보시고 그 가정을 축복하셔서 베드로 사도를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했습니다. 이후 온 가족이 베드로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세례를 받고 거듭나는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울타리가 있다면 걱정할 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울타리가 있다면, 성령의 울타리가 있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가정을 허물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든든한 기도의 울타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갈등하는 부부들은 없으십니까? 결혼생활을 지속해 오면서 상처를 주고받고, 또 성격차이라고 위로하며 살아가는 그런 가정은 없습니까? 우리 가정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치료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허물이고, 내 죄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부부의 문제는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한 부부가 아이를 낳고 10년 동안 살다가 여러 가지 성격차이로 자꾸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다 얼마동안 별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법은 얼마동안 별거하면 이혼사유가 됩니다. 변호사를 사서 이혼을 추진하게 되는데 도장만 찍으면 절차가 끝나게 됩니다. 남편이 별거하면서 잠을 자는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10년 세월의 결혼생활을 생각해 보니 “이게 실패한 인생이구나, 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내 인생에 중요한 게 무엇인가?”생각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답니다. 그는 그 새벽에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를 안 나가다가 새벽에 나갔는데, 마지막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은은한 십자가의 불빛이 비치는 앞자리에 앉아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 너무 서럽고 안타깝고 비참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눈을 들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있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는데 그것을 생각해보니 자기의 죄가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내가 얼마나 내 고집만 부렸었는지, 내가 얼마나 내 정욕만을 위해 살아갔던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이혼 하는 것이 부인의 모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 했는데 돌아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더 많았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더 잘못 했습니다. 제가 제 아내보다 더 잘못이 큽니다” 마침 그때, 그의 아내가 새벽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새벽기도에 늦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어떤 남자가 어께를 들썩거리면서 울며 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 남편의 목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제 아내보다 더 큰 잘못을 했습니다. 저게 더 큰 잘못이 있습니다”하면서 소리치는데, 아내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도 엉엉 울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내 남편에게 독살스럽게 대할 때가 많았는지, 얼마나 남편의 마음속에 상처를 줄때가 많았는지 아내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이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손을 잡고 부둥켜안고 다시 회복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 그들의 언어가 달라졌습니다. 대화할 때 문제가 생기면, “여보, 내 책임이야. 내 잘못이야”서로 자기의 잘못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답니다. 남의 탓도 아니요, 당신 성격이 못나서도 아니요, 당신이 매너가 없는 남편이래서가 아니요, 돈 못 벌어 오는 남편 이래서가 아니요, 내 잘못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답니다. 살림을 잘못한 내 잘못이요. 관리를 잘 못한 내 잘못이요라고 고백하듯 언어가 달라졌답니다. 그들 사이의 상처가 다 아물고, 사랑이 솟아오르고 북돋아 오를 때, 그들은 그림 잘 그리는 좋은 친구에게 부탁해서 십자가를 그렸답니다. 그리고, 십자가 양쪽에 남편과 아내 사진을 붙여 놓았답니다. 무슨 의미 입니까? “우리는 헤어질뻔한 부부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늘 그 십자가와 사진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갈등이 무엇입니까? “남의 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다면, 어찌 부부의 관계가 다시 합쳐질 수 없겠습니까? 왜 우리의 갈등과 우리의 원망이 십자가에서 해결되지 못하겠습니까?
  십자가의 흘린 피는 우리의 허물을 다 덮어줍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씻어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명절이 다가오게 되면,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고, 또 자식을 외국에 보내고 혼자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또, 홀로 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가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한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한 가족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역이 작은 가족입니다. 홀로계신 분들은 우리 구역에서 챙겨드리고, 함께 식사도 하고, 초청도 하고 그래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소외된 분들이 계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뜨거운 가족애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관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가정을 지키게 하는 울타리, 즉 사랑의 울타리, 용서의 울타리, 격려의 울타리, 기도의 울타리를 세워야만 합니다. 그 울타리가 든든할 때 우리는 바람 많은 세상에서도 견고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우리 모두의 가정에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