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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을 기쁨으로 이기자 (약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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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성홍모 목사,

  오늘은 창립 50주년 기념 체육대회를 거행하려고 합니다.  체육대회를 다 마치고 마지막에 시상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긴 팀이 나오고, 진 팀도 생길 것입니다.  오늘은 이기고 지는 문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운동 경기에서 이기기를 원하십니까?  시합에서 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비기기를 원하십니까?  이기는데도 대승하는 것을 원하십니까?  상대방이 기권하여 이기는 기권승 정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한 팀이 남아돌아 운 좋게 부전승하기를 원하십니까?  이왕에 땀을 흘려 수고하였으면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까?  운동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요,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운동경기마다 이기려고 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참가하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는 길을 방해하는 시험에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시험에 지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시험에는 지지말고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공생애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시험대였습니다.  악한 사탄은 예수님을 자기 수하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사망 권세까지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승리의 종교요, 이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른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했습니다.

  "시험"이란 말은 "페이라스모스"(      )라고 하여 "시험", "시련", "유혹"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페이라스모스란 말은 "어떤 일을 시도한다"는 말도 되고, "Test -시험", "검사", "유혹"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시련이나 고난을 의미하는 "맛사"라는 말이었습니다.    헬라어의 "페이라스모스"나 히브리어의 "맛사"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특별한 단어라고 합니다.  한 단어 안에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단어요, 하나의 말인데 상반된 두 가지의 뜻을 가질 수 있느냐" 고 하실 지 모르지만 '시험'이란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한 사건을 놓고 이것이다, 저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시험이란 말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다른 말로 시련(Trial)이라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유혹(Temptation)이란 말입니다. 우리 앞에 놓은 시험이란 언제나 양면성이 있습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는 것처럼 시험에도 항상 양면성이 있습니다.  시험을 긍정적인 면으로 보는 것과 부정적으로 보는 것, 시험이 긍정적인 면에서 시련과 연단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부정적인 면에서 유혹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본문 약1:2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당하거든"이란 말은  페리핍토(      )라고 하는데, 페리(  , 주위와 둘레에)와 핍토(    , 떨어지다, 넘어지다)라는 말이 합성어가 되어 "페리핍토"가 되었습니다.  "주위에 떨어지다", "∼에 빠지다", "∼에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이라고 했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라고 했고, 흠정역에서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만나고, 시험을 당하고, 시험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에는 강도가 기다리고 있고, 생각지 않은 복병이 숨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나그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 때 "만났다"고 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 "시험을 당하거든"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원해서 만나고 당하는 것이 아니라, 원치도 않은데 만나야 하고, 빠지게 되는 것이 시험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모든 곳이 우리의 시험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시험도 없고, 고난도 없는 그런 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을 잘 극복하고 이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시험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험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의 기회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과 인격, 영성의 정도와 사람됨됨이를 알아보시려고 시험하시는데, 이러한 시험은 테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 그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은 시련으로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하고 품위 있게 하고 더 순수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시험은 받을 만 합니다.  그 시험에는 반드시 상급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자기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지 알고싶어 시험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시험은 사실 교훈적인 것이며, 잘 되게 하려고 주시는 시험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몰아넣으시고 만나를 먹이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도록 시험하였습니다. 

  신약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이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8)  이런 믿음을 키우기 위한 시험에는 좋은 점, 긍정적인 면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면 악한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악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악한 사탄은 시험이란 무기를 가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으며, 우리를 넘어뜨리고 항복을 받아 자기를 추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사탄이란 디딤돌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은 없고,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시험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시고, 사탄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범위에서만 유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눌시아의 베네딕트라는 경건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사탄의 시험을 피해보려고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가족과 사회를 떠나서 세상적인 것을 무조건 피하면 시험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깊은 동굴에 들어가서 거칠거칠한 털옷을 걸치고 3년을 지냈습니다.  동굴 위에서 내려보내는 소량의 음식으로 버티면서 가시나무 같은 것으로 자기 몸을 괴롭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미혹 받는 사탄의 시험에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사탄의 시험은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는지, 그런 방법을 따라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그가 인간의 몸을 입으신고로 그에게도 시험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신데도 악한 사탄은 예수님을 괴롭혔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메시아로 처신하려고 하면 내 말을 듣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에 충만하시고 말씀의 검을 들고 기도하시면서 물리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받고 있는 하나의 시험을 가지고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이것이 하나님으로 온 시험인지, 마귀가 주는 시험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천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마귀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마귀가 주는 시험도 하나님이 허락하고 묵인하시고 허용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아야 합니다.  욥기에 보면 욥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더 큰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이 마귀가 하는 시험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시험입니까?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욥을 테스트하고 연단하기 위하여 하시는 시험입니까?  마귀가 욥을 망하게 하려고 하는 시험이었습니까?  직접적으로는 마귀가 하는 시험인데, 우리 하나님이 허락한 시험이니 하나님이 욥을 시험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면서 '이것이다', '저것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욥이 10명의 자녀들이 한꺼번에 죽고 전 재산이 날아나고 질병에 빠지는 그런 시험을 가지고 하나님은 욥이 그러한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알고 성숙한 신앙을 가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악에 빠지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시험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첫째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시험과 환란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시험이 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시험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하셨습니다. 
시험치를 자격을 주신 것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찾아오고 기다린다고 하는 것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2:6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8-9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을 바라보면서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은 죄와 죽음으로 몰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안보하시고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무서워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라고 신앙 생활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말입니다.  모든 악함과 추함과 번민과 미움은 사탄의 역사로부터 오고 있지만, 우리의 하루 하루를 다 사탄의 역사다, 귀신의 역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탄, 사탄, 귀신, 귀신" 이렇게 계속 사탄을 말하고 귀신을 강조하면 사탄의식에 빠지고 귀신의 마력에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지, 귀신이 무서워서 귀신을 달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세상에 귀신이란 귀신을 다 모아놓은 것보다 다 큰 능력이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인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마귀의 지령"이란 책에서 "사탄, 사탄, 귀신, 귀신 말하는 사람들은 계속하여 그 귀신의 마력에 빨려 들어간다"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귀신공포증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구원을 끝까지 보증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고귀한 존재요, 가치를 판단하는 힘이 있으며, 윤리적으로 선택하면서 주어질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책임적인 삶을 살아가고 결단하고 헌신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시험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은 결코 시험에서 머물지 않고 무엇을 만들어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시험을 치르게 하시는 것은 더욱 성숙한 신앙을 가지라는 기회인 것입니다. 

  헨델의 메시아 곡 중에 20여 곡의 합창곡을 며칠동안 연습하고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에 찬양대에서 연습하는 것은 얼마나 시시하게 느껴지는지, 웬만한 곡은 한 두 번 맞춰보면 연주할 정도로 성장한 것을 봅니다.  아이들이 조금 아팠다가 낫게되면 아주 성숙해지고 똑똑해지는 것을 봅니다. 

  시험이란 자라게 하고 만들어내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119:71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시험이란 한 가지 사건을 놓고도 동시에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험에 지면 악에게 시험을 받은 것이요, 시험을 이기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은총을 더욱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하기 위한 시험을 하지만 악에 빠지게 하려고 시험하지 않습니다.  그런 시험은 자기가 악에게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에 이겨야 합니다.

  매우 추운 날 새벽 3시, 선교사 지망이 교단 선교국에 면접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찾아 왔습니다.  선교국에서는 선교사 면접 시험을 치른다고 하면서 새벽 3시에 선교국에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약속한 선교국의 선교사 선발 위원은 아무런 사과나 해명도 없이 아침 8시가 되어서 시험장에 나타났습니다.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시험관은 "자, 시험 치겠습니다.  '학교'라는 말 '스쿨'이란 단어의 철자를 말해보세요."  선교지망생은 초등학생에게나 물어볼 수 있는 것을 시험관 앞에서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숫자에 대해서 물어봅시다.  2의 두 배는 얼마지요?"  "예 4입니다." 
시험관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지망생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합격되었습니다.  당신은 선교위원회의 시험에 합격하였으므로 내일 아침 선교사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시험관은 선교 위원회에서 새로운 선교사를 극구 칭찬하면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극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추운 겨울의 새벽 3시에 나오라고 했는데 아무런 불평이 없이 일어났으며 선교국에 나왔습니다.  둘째로 그는 시간을 엄수하였습니다.  그는 신뢰와 약속의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셋째 이 분은 다섯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의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넷째 어린이 시험 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을 한 번도 짓지 않아 겸손의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선교사로서의 자격 요건을 다 갖추었으므로 기꺼이 선교사로 보낼 것입니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추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극기와 신뢰와 약속, 인내, 겸손의 시험에서 합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십니다.  사람이란 인격이 있어야 인간인데, 그의 인격은 인내심 속에서 자라나고 자리잡는 것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온전히"란 말은 최선을 다하여 완전하도록 그런 의미입니다.  모든 일,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있어 인내심을 발휘하라고 하셨습니다. 

  인내라고 하니 무조건 억지로 견디고 보자는 말이 아닙니다.  "넉넉하게 수용한다, 사랑으로 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인내는 만부득이 참아내는 피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인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인내의 모범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참고 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참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사 지실 수 있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더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라고 하십니다.  인내에는 반드시 결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이 주어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피조물인 인간인데,  왜 시험과 고통을 받지 않을 것입니까?  시험과 고통을 면제하여 달라고 하지 말고, 시험과 고통을 이기게 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인내는 연단으로 연단 받아야 소망이 있습니다.  인내를 구비해야 합니다.  인내로 무장하라는 말입니다.  "구비한다"는 말은 완전 무장하는 군인의 용어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역경과 시련을 통과하여야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시험을 이기신 주님을 모셔들이고, 인내로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본받아 시험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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