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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막 9:38-41,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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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성홍모 목사

  어떤 대기업에서 아프리카에 신발을 수출하기 위한 사전 시장을 조사하려고 2명의 사원을 아프리카 현지로 보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모든 조사를 마치고 본사로 돌아와서 사장에게 보고를 합니다.    한 사람은 긍정적인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는 무한한 시장성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 켤레의 신발도 팔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라는 부정적인 보고했습니다.  사람이란 그가 가진 가치관과 보는 관점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산에 올라가는 등산가들의 가장 큰 보람이 있다면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다가 정상에 서면 산 너머까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시시한 것은 보이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좀 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고,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요한이란 사람은 12제자 중에 가장 먼저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요한이라는 사도에 대하여 연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요안네스"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는 세배대의 아들이었으며 사도 야고보의 형제였습니다.  신약성경에 요한복음과 요한1,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 문서를 이룬 사람입니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세배대인데, 부자인 어부로 여러 사람을 고용하고 있었으며, 배도 여러 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살로메라는 분인데, 이렇게 한 가족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는 예도 드물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 살로메라는 분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지간이라고 하는데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연구하는 이들은 살로메가 들어갈 자리에 예수님의 이모란 말이 들어가는 것을 비교하면서 마리아와 자매지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뿐입니다.  사도 요한에 대한 상세한 말씀을 다 드릴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오늘 본문과 관계된 것만 말씀드려도 될 것입니다.

  이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요한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란 말씀을 들은 후 안드레와 함께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앞에서 따른 4명의 제자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였습니다.  사도요한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갔을 정도로 정말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한이 하루는 예수님께 와서 하는 말이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번 일은 제자로서 잘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잘못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예수님의 전도단의 일원도 아니고, 이선에서 후원하고 따르는 70문도의 사람도 아니고,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을 금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계속하라고 내버려두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사도요한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소심한 점도 보이지만, 한번 마음만 먹으면 꺾이지 않는 불같은 성격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의 한 촌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하시라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 중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면서 귀신 쫓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과격한 성격을 잘 드러내시며,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는 붙여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요한은 훗날 사도행전에서 제사장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외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대담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어떤 확신이 있다고 하면 거침없이 말하는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발견한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가 어떠하였으면 좋은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는 금하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처음부터 따르던 사도 요한이 보기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자세히 들으니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요한이 길을 가다가 귀신을 쫓아내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인 것 같은데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귀신이 잘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아니 우리편도 아니요,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특별한 대화를 나눈 사람도 아니요, 자기들을 위하여 헌금을 낸 것도 아니요,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예수의 이름으로 외치기만 하면 귀신도 꼼짝 못하고 나간다고 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이름이란 우리만의 전매특허요, 우리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득권을 가졌는데,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이 사용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세요.  요한에게 너 잘했다고 하실 터인데,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 얼마나 넉넉하시고 여유가 있고, 포용력이 있는 말씀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상생의 정치가 되지 못하고 극한 대립의 길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정치권은 좀더 국민을 편하게 할 수 없는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감안하여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하는 자, 우리를 반대하는 자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내 편 네 편 따지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우리 민족입니다.  내 편이 아니면 죽이는데, 죽창으로 찔러 죽입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사람을 세우고, 낮에는 좌익으로 몰아 죽이고, 밤에는 우익으로 몰아 죽이고 옛날 이야기 하면 참으로 끔찍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안에만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수없이 많아 말씀드리기조차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안에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교파가 100여개 인데, 괄호 안에 통합, 합동, 고신 개혁, 합신, 호헌 연합, 정통, 신정통, 보수, 진리, 주류, 비주류 이런 식의 특별한 교파 이름을 넣어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좋다는 말은 다 붙이다 보니 이제는 붙일 것이 없습니다.  합동 정통, 합동 개혁, 개혁 정통, 정통 개혁,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왜 한 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같은데, 분열을 가져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습니다.  예수교는 무엇이고, 장로교는 무엇인지 세상에 전도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교파가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한국교회 안에는 계층과 계층 간의 갈등, 세대와 세대 간의 갈등, 지역과 지역 간의 갈등, 학연, 혈연, 지연 옛날 교인, 새교인, 왜 그렇게 편을 가르고 서로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와 다르면 너는 안 된다.  너희는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보다는 교회의 전통을 더 중시하고, 신앙보다는 제도를 강조하고, 은혜나 사랑보다는 규율과 교리를 말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편일률적인 사람들, 다 판에 박은 주장과 언어는 기독교회가 가지는 특성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나, 오직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하나가 되라고 하여 다양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찬양대에 전부 소프라노만 있다고 하면 결코 아름다운 찬양곡을 만들지 못합니다.  소프라노에 알토와 테너와 베이스가 어우러지면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한 화음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 베이스들만 있으면 정말 재미없습니다.  그런데 그 베이스가 음악을 웅장하게 만들어 줍니다.  모든 거친 소리를 다 잡아주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다양한 소리들이 모여서 화음을 연출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우리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 남자만 있으면 얼마나 재미없는 날을 살 것입니까?  아마 남자들끼리만 살면 전쟁이 일어나고 다 죽고 말 것입니다.  아내를 독일에 보내고 25일 간 지내는데 얼마나 쓸쓸할 것입니까?  침대에 들어가는데 혼자 쏙 들어갔다가 쏙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이불 갤 것도 없습니다. 혼자 지내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참아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집에 와 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좋던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할 뻔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려면 여러 은사를 필요로 합니다.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에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여 비난하고 몰라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려고 하면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라는 말이요, 무슨 일을 하던지 긍정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난 멋에 살고 자존심 하나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다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겸손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앞장서서 일하면 긍정적으로 밀어주고 알아주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실수를 발견하게 될 때는 비난하거나 고쳐주려 하지말고, 먼저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고 하면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주님이 섬김의 생애를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닮아간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으면 주님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등록한 것으로 어떤 자격증이나 라이센스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가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쳐서 복종시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의 조직 안에 들어오고,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어떤 제도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하나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열어놓고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서로의 장점을 보아주고 긍정적인 자세로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고 감격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나라에서 물 한 그릇이라고 하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섬김이요, 사랑으로 여겼습니다.  물 한 그릇이 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 주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노라고 하면서 우리는 내 것을 풀어 주려는 마음을 막으면 그것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하나되라, 용납하라, 관용하라, 포용성을 가지고 전도하라는 말씀을 하시다가 실족하게 하는 문제로 주제에서 가지를 치고 나가서 다른 말씀을 하시다가 본래 말씀하시려는 주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사람마다 하나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런 화목과 일치는 독재자일수록 더 외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진실이 없으며, 사랑이 없으며 용서가 없기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야합하는 것과 화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야합은 내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화합은 내 이익을 포기하면서 이루려고 할 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1934년 인도의 간디는 일곱 가지 망국론을 말하였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상업,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 시대만의 진리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틀림없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희생 없는 신앙이 문제라고 봅니다. 신앙은 좋습니다.  그러나 희생이라든지 고난이라든지 강조하지 말고, 더욱 강요하지 말라고 합니다.

  소금의 역할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로 맛을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혈압이 높아도 적당량의 소금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음식에 맛을 내고 있습니다. 음식에 맛이 있다는 말은 간이 적당하여 맛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소금은 방부제 역할을 잘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냉장고에 김치 냉장고에 냉동실, 화장품 냉장고, 의약품 냉장고 할 것 없이 정말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금은 부드럽게 하고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김치를 담을 때 배추를 소금에 절여 고르게 하고 숨을 죽여서 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말씀은 자기를 죽이고 부드럽게 하고, 고르게 하여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모든 소제물에는 소금을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금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소제물은 곡식과 채소를 드리는 것인데, 뻣뻣한 배추는 부드럽게 만들어 가지고 드리라고 하십니다.  뻣뻣한 자신의 혈기를 죽여야 합니다. 목이 곧은 이는 목을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어깨에 힘을 주는 사람은 힘을 빼야 합니다.  눈이 높은 사람은 눈높이를 낮추어야 합니다.  잘 났다고 하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소금을 치듯 하여 겸손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도 언약의 소금으로 자신의 혈기를 꺾으라고 하십니다.  소금으로 고르게 하려면 소금 자신은 녹아져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은 간 곳 없고 녹아지고 스며들어야 합니다.  일평생 녹을 줄 모르는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은 녹아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녹아 없어진 것 같으나 예수님의 향기를 품어내야 합니다.

  저는 20세기가 낳은 인물 중에 가장 훌륭한 어른은 넬슨 만델라를 들고 싶습니다.  그는 인종차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아공화국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습니까? 여러분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어요. 그 고통스러운 곳에서 젊은 나이를 다 보냈습니다.  요새 몇 달 갔다오고 훈장 단 것처럼 내세우는 사람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정의를 위하여, 오직 하나되기를 위하여, 그는 백인과 흑인의 인종차별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싸우다가 무려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어요. 그는 감옥에서 나와서 이제 온 민족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를 보세요.  대통령 되고 나서 바로 자기를 괴롭히던 그 많은 백인들 그 모든 정적들을 다 사면해 버렸어요.  다 용서해 버렸어요. 그는 누구도 저주하지 않았어요.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어요. 자기를 괴롭힌 자를 절대로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대통령 기간의 직무를 마치고 그가 그 특유한 웃음을 웃으면서 고향으로 가는 모습을 보세요. 아무 미련 없이 고향으로 갔어요. 대통령은 그만 둔 다음에 잘 살아야 되는 거요.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대통령직을 할 때보다도 그만 둔 다음에 얼마나 존경을 받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절간으로 가도 안 되고, 감옥으로 가도 안 되고, 청문회에 나가도 안 되는 거요. 이걸 아셔야 되요. 대통령은 그만 둔 다음에 더욱 존경을 받고 조용하게 행복하게 살아야 그게 민주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모양입니까?  전직 대통령의 가구를 경매에 붙여야 한다고 하니 세계 여러 나라에 창피한 노릇입니다. 
깊이 생각하세요. 만델라 그는 욕심이 없었어요 전혀 욕심이 없었어요. 그는 정말로 나라를 사랑했고 민족을 사랑했어요.  의를 사랑했을 뿐이요. 그리고 자기 희생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나를 완전히 희생해야 되요. 녹아 형체가 없어져야 비로소 화해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신비로운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소금처럼 녹아 없어져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그대로 지켜가라."  이 신비로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소금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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