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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역 동반자 (행 13: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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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필재 목사

지금 바울과 바나바, 마가 이 세 사람이 전도대를 조직해서 구브로 섬에 가서 성공적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신이 났습니다. 배를 타고 소아시아 대륙인 밤빌리아 땅에 갔습니다. '버가'라고 하는 작은 지역 안에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첫 번 선교지에서 성공을 했기 때문에 신이 난 세 사람이 지금 그 곳에 갔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는데 큰 불행이 생겼습니다. 세 사람 중 하나인 마가가 "난 못하겠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린 겁니다. 남은 두 사람은 실망이 된단 말입니다. 아마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인데도 실망이 컸습니다. 전도자로서 일생을 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 몸을 바치는 일이기 때문에 시작을 아주 신중히 해야 됩니다. 이러한 일은 동역자를 크게 실망을 시킵니다. 제가 목회자로 경험이 많잖아요? 함께 일하던 그 많은 집사님, 권사님들 가운데 한 사람만 어디로 가도 마음이 허전합니다. 그런데 함께 세 사람이 있다가 한 사람이 난 못하겠다고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리는 이 사건은 전도대의 큰 불행의 역사가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마음이 이렇습니다. 누가 한 사람이 새로 오면 신이 납니다. 나의 동역자가 생겼다는 영적 기쁨이 생깁니다. 물러갈 때 가장 마음이 괴롭고 슬픕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예 다른 데로 가실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신학교 동기 가운데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린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신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 "나는 목사를 못하겠다." 그러는 겁니다. 나하고 제일 친한 친구이고 용인이 집이고, 참 친분을 함께 나누면서 기숙사 밥을 같이 먹으며 우정을 나누고 그랬는데 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동 약품'에 취직을 한다고 그러니 제가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야!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나는 우리 아버지가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수 믿고 부모를 교회로 인도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너희 아버지는 장로님 아니냐? 너희 어머니는 권사님이시고 너를 주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는데 준비가 다 된 사람이 갑자기 목사 못하겠다는 이유가 뭐냐?" "나는 목회가 너무 고생스러워서 못하겠다." "그럼, 나는 하라는 말이냐? 우리 그런 이야기는 다 끝난 문제 아니냐?" 그래도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설득, 설득하다가 맨 마지막에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잘 쳐 먹고 잘 살아라! 뭐가 그렇게 세상이 좋다고…."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끝까지 직장 생활을 했다가 이제 은퇴했다고 연락이 와서 예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신학교 때 같이 공부하던 그 친구의 이탈이 내 마음에 그렇게 슬프고, '그가 아마 나와 같이 길을 갔다면 내가 좀더 행복했을 텐데, 목회 하다가 어려울 때 서로 이야기도 같이 하고….'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의 심정이 이때 이랬단 말입니다. 마가가 따라와서 열심히 조수 노릇을 해주니까 신이 났고 구브로에서 성공을 했는데 이렇게 이탈해버리니까 '아, 이거 어떡하나?' 나중에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바울의 그 섭섭한 마음이 표현되는 것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이런 일은 성도들의 믿음에도 큰 손해를 끼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젊은 청년인 마가가 전도 대원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한 팀을 이루어서 구브로까지 갔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우리 예루살렘 다락방 출신의 마가가 그래도 훌륭하다." 박수를 쳐 보낸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터벅터벅 걸어서 들어온단 말이에요. "어? 이거 어떻게 된 거냐?" "저 못하겠습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필재 목사가 "못하겠다. 분당 먹자골목에서 내가 김밥 장사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그런 음식점 사업을 하고 있을 때 여러분이 김밥을 사 드시러 오셨다고 합시다.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그것과 똑같은 겁니다. 마가를 바라보는 예루살렘 교인들도 희망에 부풀어서 '이런 핍박 시대에 이 젊은이가 정말 열심이다! 이야! 기쁘다.' 막 기도해 주고 박수를 치고 있는데 이 모양이 되니까 낙심이 되는 겁니다.

왜 마가는 이탈을 하였는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전도자 생활에 적합하지 아니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몸이 약했습니다. 그러니까 목회는 정신노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육체노동입니다. 평생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잖아요? 노동자들 못지않은 체력을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 목사를 뽑을 때는 제가 체력부터 검사할 겁니다. 밤 보통 10시까지 심방을 다녀야 하잖아요? 그러면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시간을 계산해 보세요. 체력이 떨어지면 못합니다. 신앙만큼 건강이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시간관리도 잘해서 건강 유지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제가 열심히 하잖아요? 마가는 몸이 약했어요. 그래서 견딜 수 없었던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또 하나는 너무 어려요. 그래서 고난에 익숙하지 못했어요. 고생되기 때문에 그만 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본래 부잣집 아들이어서 준비가 덜 된 것이 마가로 하여금 결심은 굳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구브로 전도 하나로 끝내고 되돌아와 버리는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왜 그가 따라 나섰는가? 이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활동을 목격한데서 받은 감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서 환영받는 바울과 바나바를 봤을 때 '이야! 내가 이 보람 있는 일을 위해서 이 젊음을 바쳐야 되겠다.'라고 감화를 받았습니다. 또 하나는 지금 같이 다니는 바나바가 외삼촌이에요. 그러면 외삼촌만 따라 다니면 되잖아요? 외삼촌이 보호자가 되어서 괜찮을 것이라고 하는 인간적 계산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지금 걸어 다니는 전도지인 타우르스 산맥이 해발 1,500미터에서 2,700미터인데 그 산을 넘어가야 하거든요? 백두산이 몇 미터이지요? 우리는 백두산이 2,774미터라고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타우르스 산맥이 2,700미터입니다. 이것을 넘어가자니까 몸이 약한 고난에 익숙하지 않은 마가가 견디지 못했습니다. 여기가 얼마나 더운지 대기가 주전자의 증기 같고 바람이 없어서 말라리아 열병에 걸리기 좋은 그런 기후를 마가가 이겨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나이가 어려서 집을 떠나고 보니까 집이 얼마나 그리운지 몰라요. 집안에서 편안히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 그의 마음에는 섭섭한 게 있어요. 자기 외삼촌이 바나바잖아요? 바나바가 데리고 가니까 따라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바울 선생이 더 우세해요. 그리고 외삼촌 바나바는 바울 선생님의 조수 역할을 하니까 회의가 온 겁니다. 사실 바나바 때문에 바울이 기회를 얻었잖아요? 길리기아 다소에 가서 묶여있을 때 예루살렘 총회에서는 바울을 핍박자라고 하며 인정하지 않았을 때 바나바가 쫓아가서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오늘에 이른 사람인가에 대한 배경 설명을 잘 함으로 지금의 바울이 될 수 있는 기초를 바나바가 놔주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마가의 판단은 이 일이 거꾸로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소 섭섭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어려웠던 것은 마가는 미처 박해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안디옥에서와 같이 복음을 전하면 환영을 받는 줄만 알았는데 버가에 가서 홍수의 위험, 도적의 위험, 유대인의 위험이 시작됐잖아요? 그러니까 매우 호화스럽게 살던 부잣집 어린 아들은 그 모든 일을 견뎌내기에는 너무 부적합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그만 두고 이제 오늘 성경말씀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제 마가가 없는 전도 여행을 떠나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하는 내용이 오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든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회당을 짓습니다. 그리고 회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삽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안식일에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을 걸어가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는 율법 때문에 회당을 짓고 그 주변에 전부 모여 사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가든지 유대인들이 있는 곳은 회당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도 유대인들이 와서 많이 살았기 때문에 회당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열 사람만 모여도 회당을 마련하고 회당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들의 예배 형식이 아주 특이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여기서 전도하기가 아주 편했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 하면 이렇게 드립니다. 처음에는 탈리트라고 하는 긴 옷을 입고 입당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쉘리악이라는 회당의 천사라고 하는 이름이 있는데 그 사람이 기도문을 낭독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파라샤라고 하는 율법의 일부를 히브리 말로 낭독합니다. 카아짠이라고 하는 회당 서기, 법궤에서 율법 두루마리를 꺼내서 낭독자에게 건네주고 그 다음에는 하푸타라라고 하는 구약 성서의 일부를 세 절씩 낭독하고 미드라시라고 하는 유대 구약 성경 주석, 또는 설교를 맨 마지막에 하는 예배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이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나 주석은 어떤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회당 예배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자, 예수님도 12살 때 회당에서 서기관들과 대화를 하면서 묻기도 하고 말씀하시기도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죠?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예배 모범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 선생이 아주 긴 설교를, 15절에서 41절까지 하는 것을 우리가 읽었잖아요? 그러면 바울이 그 회당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그 지방에 사는 사람도 아닌 처음 참석했는데 어떻게 그 교회 처음 간 사람이 긴 설교를 할 수 있었을까? 이런 게 우리 예배 모범 가운데 의문이 되잖아요?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려도 미리 준비된 사람들이 순서를 다 맞지, 아무나 나와서 설교하는 게 없잖아요? 그런데 그 때에는 거의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누구도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장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구원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광고하잖아요? 이런 누구든지 이런 예배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교도들이 있는데 바로 케이카 교도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설교자가 따로 없어요. 쭉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다가 "아, 내가 성령의 지시가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하면서 누구든지 그 시간에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예배 모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그런 형태로 예배 모범을 가지고 예배를 많이 드렸단 말이에요. 그러면 바울이 그 시간에 나가는 겁니다. 그 회당에 처음 간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을 알고 바울이 그 시간에 일어나서 15절에서 41절에 이르는 긴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바울이 설교를 한 내용을 몇 대목으로 나누면 첫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조상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하셨다." 그것을 몇 절에 걸쳐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민족이 걸어왔던 과거의 역사의 시작부터 바울 선생이 설교를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 430년 노예 역사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앞세워서 출애굽 역사가 있었고, 광야생활 40년의 역사가 있었고, 사무엘까지 사사를 주시고, 베냐민 지파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까지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 민족과 함께 역사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에게 약속하신 아들이 곧 우리가 전하는 예수이다." 예수를 역사의 끝에 붙여서 설명하는 거죠? 그러니까 메시아가 탄생하면 다윗의 혈통에서 낳을 것을 구약에서 수없이 예언하여 왔습니다. 우리가 잘 기억하는 성경말씀이 있잖아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태어나 다윗의 위에 앉아서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전하실 것이니라." 이렇게 예언이 되어 있잖아요? 그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온다는 말이 뭐냐? 결국 "이새의 가문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가 나실 것을 구약 가운데 수없이 예언했는데, 오실 그이가 벌써 오셨다. 그가 누구이냐?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곧 그이다. 그가 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 바울의 설교의 초점은 여기 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세종 임금 때 높은 벼슬인 좌의정과 우의정을 다 지낸 맹사승이라고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자기 고향인 온양에 가기 위해서 고향을 내려 왔는데 그 소리를 듣고 온 동네 사람들이 맹사승께서 이제 고향을 돌아오시니까 길을 닦자고 쓰레기를 치우는데 하루 종일 하니까 사람들이 짜증이 나고 배고프고 더운데 그 온다던 맹사승은 안 온다 말입니다. 그런데 맹사승은 벌써 지나갔단 말입니다. 지나가면서 "수고들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길을 닦고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거기서 길 닦는 사람이 짜증내면서 "맹사승인지 나발인지가 지나간다고 해서 하루종일 이 모양입니다." 맹사승은 그 말을 듣고 "그러십니까? 내가 맹사승이요."하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바울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미 오셨고 그는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약속한대로 모든 사명을 마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는데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설교 초점을 과거 역사에 비추어서 설교를 하는데, 이것을 신학에서는 역사 신학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아가 바로 그다." 자, 말라기 성경 이후에 신약의 처음이 마태복음이 되잖아요? 말라기부터 예수님까지는 시간이 몇백 년이 지났죠? 이것을 중간기 역사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선지자나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말라기 예언자를 마지막으로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중간기 역사를 선지자가 없는 시대라고 해서 신학에서는 암흑기의 역사였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살아가는 방법이 말을 잘 듣지 아니하면서도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만 살 수 있는 영적 백성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는 아주 답답하고 괴로워서 약 300년간이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니까 이것을 암흑기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굶주리고 또 굶주리고 "어째서 예언자가 안 나타나느냐? 어째서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느냐?"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릴 때 어느 날 저 광야에서 드디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 세례 요한입니다. 그 소리가 들리니까 사람들이 반응을 일으킵니다. 온 백성이 다 그에게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하는 것을 보니까 메시아 갔단 말입니다. '아! 이는 메시아로구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하는 대로 다 하는 겁니다. 그때까지는 세례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시키는 대로 온 백성이 다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이제 우리 곁에 오셨도다." 그러면서 너무나 좋아하고 세례 요한을 따를 때 세례 요한이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무슨 목소리입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저기 있다." 예수를 소개합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도 감당하지 못한다. 나보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보라! 내가 소개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저기 있다."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가 메시아다." "세례 요한이 그렇게 증거 해주지 아니했느냐? 그런데 온 백성들이 다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바라보고 쳐다보던 그 믿음을 가졌다면 세례 요한이 설교하는 메시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믿었어야 되는데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알았던 사람들이 그보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봤을 때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를 소개하는 거죠. 예수의 무죄성은 빌라도가 증거 했다는 겁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노라. 로마 사람인 빌라도조차도 죄 없다고 한 예수를 너희가 무덤에 내려갈 수 있게 만들지 않았느냐?" 그를 소개합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도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고 다시 살려 부활하게 하셨도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과 그의 말씀대로 되어진 사건이다.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이쯤 설교를 한 바울이 그 회당에 있는 사람들의 심장을 찌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느니라. 구원받지 못하느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구원받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7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하죠?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했는데 이 말씀이 너희에게 미칠 것이다." 이렇게 설교합니다. 그러니까 과거 히브리 민족의 시초부터 역사 신학적 설교를 쭉 해오니까 거절할 수 없거든요? 안 받아들일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당황합니다. 여기 42, 43절을 보면 설교 후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그러잖아요? 거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거, 틀림없는 하나님의 외아들 메시아가 우리 가운데 오신 거로구나! 그러니까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후속적 설교를 해 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훌륭한 믿음의 방향을 찾도록 해달라." 이런 반응이죠?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아주 훌륭한 설교 3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2장의 베드로 설교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사람들을 놓고 죽을지도 모르는 죽이기 위해서 잡아온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말을 순교를 각오하고 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기억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의 설교는 그 설교 한 편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순교 당해 죽었단 말입니다. 그 설교를 안 했다면 스데반은 살았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설교를 한 것을 볼 수가 있고, 그 다음에 13장에서 바울의 설교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유명한 세 설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섭리가 오늘, 어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벌써 창세 전부터, 그 아득한 옛날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오늘에 이르러 지금이 구원의 때가 됨을 질서 있게 나열하는 역사 신학에 기초하는 설교를 했다는 것이 이 설교의 특징입니다. 그 다음에 기독교의 복음이란 무엇이냐? 추상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신적이 아님을 증거 해줍니다. 또, 이 역사란 당시의 사람들이 충분히 다 기억하고 있는 그들의 역사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의 설교는 철학적 논리가 아닙니다. 사실적 근거입니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 잘 쓰는 단어가 하나 있죠? '파라독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리적이라는 말입니다. 순서는 안되었어요. 말 자체는 일관성이 없어요. 자,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이것이 일관성이 있습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나사로가 무덤에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예수님이 와서 나사로야, 나와라 그러니까 나왔다." 그게 오늘 우리의 일관적인 언어로 말이 되는 말입니까?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일관성이 없는데 사실인 진리를 가리켜 파라독스라고 합니다. 영리적입니다. 말이 안 되지만 사실인 것을 어떡합니까? 이들의 설교는 파라독스, 영리적이라는 것이 설교의 특징이고, 그 다음에 "이 역사관은 창세기 전부터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으로 시작이 되어서 오늘까지 온 것이다. 이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러분! 왜 지금이 2004년입니까? 인류의 역사가 2천년, 2억년도 넘었는데? 지금 세상 어느 나라는 금년이 2004년입니다. 왜 2004년입니까? B. C와 A. D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중심 해놓고 그 전에 역사는 Before Christ입니다. 예수가 나기 전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가 나신 이후의 역사를 그때부터 기준해서 온 세상에 역사를 잡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2004년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역사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창세기부터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예언적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것이 목표이다. 그 목적이 지금 다 이루어졌다. 그런데 왜 예수를 죽였느냐? 왜 예수를 안 믿는냐? 우리는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으라!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율법의 논리를 가지고 구원 얻을 영혼이 한 사람도 없다!"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움직여지는 모든 되어지는 일을 영적 시각으로 사도적 관찰로 보기를 좋아합니다. 또, 나 개인의 삶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으로 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으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이 남북 갈리어져서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아직은 왜 이런 역사가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지 대답이 아직 안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역사가 더 많이 흘러가면 후대의 사람들이 이렇게 바울과 같이 역사를 정리할 때는 '아! 하나님이 그래서 그렇게 하셨구나!' 그 대답이 반드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게 오늘 바울 설교의 초점이요 베드로나 스데반의 설교의 초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개인의 모든 삶의 하나님의 우주 통치적 섭리를 믿으면서 그 속에 나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음을 내가 객관성 있게 영적 시각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우주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면 삶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저는 여기서 태어났잖아요? 이 마을에서 최고 영적 말썽꾸러기로 살았잖아요? 동네 사람들한테 새벽종 치지 말라고 야단치고 깡패 같은 형들도 많았어요. 날마다 멱살잡고 "이 놈의 새끼! 내일 새벽에 또 종칠 거냐?" 우리 친구들은 나 혼자 열심히 교회 다니고 전도하고 그러니까 학교에 가서 도시락 먹을 때 기도하는 순간에 도시락 빼앗아가고 완전히 제가 친구들의 장난감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또 어떻게 여길 왔죠? 나는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섭리론에서 '아! 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섭리로구나!' 여러분 자신을 우주 통치적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해석을 하시고 지금 갈보리교회 나오시고 이 지역에 와서 사시고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이 모든 게 다 아브라함 때부터, 어떤 면에서는 창세 전부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던 사건이 지금 나타난 것이 바로 나다! 바울의 설교는 그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믿음으로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울 선생님의 역사성 있는 하나님의 섭리론의 설교를 역사 신학에 기초해서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각이 나에게 주어짐으로 이 말씀에 기초해서 내 존재를 하나님의 우주 통치적 질서에서 나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소시 민족 생활을 하고 교회 출석하고 전도하고 기도생활 하고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고 이것이 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으면서 매일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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